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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773화 (773/956)

대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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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응급실 앞의 복도는 적막 그 자체였다. 가끔 피곤에 지친 의사나 간호사가 느릿한 걸음으로 오갈 뿐인 복도라 생각을 정리하기엔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오직 간헐적으로 솟는 분노와 증오심이 방해할 뿐.

그때 소매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며 단유의 상념을 깨웠다. 액정에 뜬 번호를 보고 얼굴을 굳힌 단유는 호흡을 고른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야, 놀랐어. 정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반성이나 죄책감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었다.

“왜 전화를 한 거지?”

―거 알아보니까 나보다 나이도 어리던데, 너무 쉽게 반말하는 거 아닌가?

“존대를 받을 수준이 안 되잖아, 당신.”

―거 참.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너무한 거 아닌가?

“같은 처지?”

―너나 나나 비슷한 힘을 가진 처지 아닌가?

“헛소리.”

―너무하네. 그래도 너라면···.

단유는 상대의 말을 잘랐다.

“우리가 이렇게 정답게 대화할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화가 많이 났나?

“일부러 화를 돋울 생각이었다면, 성공했어.”

평소의 단유라면 보이지 않았을 어투였지만, 상대는 그것을 몰랐다.

―그거라도 성공했다니 다행이군. 내 인생엔 항상 실패만 있었는데 말이야.

“말장난이라면 그만둬. 지금 당신이랑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만 하면서 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너무 각박하군. 농담은 삶의 활력소란 걸 모르나?

“그렇다면 즐겨둬. 당신의 마지막 활력소일지 모르니.”

―아이고 무서워라. 너무 무서워서 지릴 것 같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죽여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

―죽이겠다고? 나를? 그런 마음이었으면 진작 죽이지 그랬어? 좀 전에 부리나케 달아난 사람은 누구였지?

사내의 이죽거림을 들으니 더욱 화가 났다. 좀처럼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 단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내에게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 불만을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왜 대답을 못 하나? 아, 그러고 보니 서울대생이더만? 공부를 꽤 열심히 했나 보지? 그런데 그런 범생이 주제에 어디 제대로 싸워본 적이나 있으려나?

사내는 단유를 우습게 보았다. 거칠게 살아온 자신과 단유의 화려한 삶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손을 써야 할 때는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던 단유였다.

그때였다.

“저기요?”

응급실 문을 열고 몸을 반쯤 내민 간호사의 부름에 단유가 핸드폰 아래를 손으로 막았다.

“네?”

“강 새벽씨 보호자분?”

“네.”

“의사선생님께서 찾으시는데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간호사가 다시 응급실로 돌아간 뒤, 단유는 손을 뗐다.

“조만간 당신의 경솔함을 후회하게 될 거야.”

―아이고 무서워라. 어디 목의 때라도 밀고 기다릴까?

단유는 대꾸하는 대신 통화를 종료했다.

어깨와 손목에 입은 부상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심각한 곳은 없었던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 크고 작은 정도의 타박상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문제는 화상이었다.

“심재성 2도 화상은 시간이 지나 피부가 재생되더라도 착색이나 탈색, 또는 피부가 쪼그라드는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흉터가 생긴다는 말씀이죠?”

그나마 어깨에 난 흉터라 옷으로 가릴 수 있다지만, 새벽의 입장에서는 그저 억울하기만 한 일이리라. 내려다보니 새벽은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탈진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일입니까?”

단유는 할 말이 없었다.

“사고였습니다.”

이건 사고였다. 교통사고 같은.

****

동쪽 하늘이 어스름해질 무렵 새벽이 정신을 차렸다. 그 사이 응급실에서 1인 병실로 옮긴 터라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눈을 뜬 새벽이 통증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더니 바로 옆에서 단유가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형···. 어떻게 된 거죠? 여긴 어디예요?”

“병원이야.”

“병원···이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새벽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기억이 없어?”

“그게···드문드문 기억이 나긴 하는데···, 아!”

뭔가를 떠올린 새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새벽은 사내의 기습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납치가 되었고, 정신을 차린 새벽은 사내의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어떻게 고문을 받았는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고, 그 이후의 일들도 끊어진 필름처럼 부분적으로 흐릿하게만 생각날 뿐이었다.

단유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한 기억 따위를 온전히 기억해봐야 좋은 일은 아니니까.

“나 때문이야.”

“왜 형이,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어요?”

“···우선은 낫는 것만 신경 쓰는 게 좋겠어.”

“그 사람, 형을 노리는 건가요?”

“그래.”

“왜요? 그런데 저는 왜?”

억울할 것이다. 새벽의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당하기만 했을 뿐이니 말이다. 단유는 처음 생각했던 대로, 사실을 이야기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도 모른다면 새벽의 처지가 더 불쌍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심한 경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온전히 말할 수는 없었다. 미안하게도 말이다.

“최근 서울에 일어났던 일련의 화재사건 알아?”

그가 화재사건의 범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단유가 알아챘고, 상대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단유를 잡으려 했다는 이야기로 상황을 설명했다. 밝힐 수 없는 비밀까지는 말해주지 못했지만, 어쨌든 사실이었으니까.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알아서 할게.”

“형이 어떻게요?”

“방법이 있어.”

“위험한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무조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휴식을 취해야 돼. 그리고 병원비 걱정은 안 해도 돼.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내가 처리해줄게.”

“이게 어떻게 형 때문이에요? 그놈 때문이지.”

달리 새벽을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미안하다.”

오직 그 말 밖에는.

****

단유는 핸드폰을 세게 움켜진 채로 병원을 나섰다. 주위의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피해를 입은 이가 명수나 하은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 이기심이 얼굴로 드러날까 봐 더 새벽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새벽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지만, 결국 단유는 그를 상대함에 있어 평범한 방식은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초월적인 힘을 가진 이를 평범하게 처벌할 수 없을뿐더러 새벽이 그런 일을 당한 마당이라 그냥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일으킨 화재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거니와, 피해를 본 사람도 많을 테다. 반대로 이를 이용해 이득을 본 이들도 있다 하니 그 불합리를 단유는 참을 수 없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아, 저예요. 네. 다름 아니라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지난 번에 신화파에 대해 알려주신 거요, 그거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이런 방식을 선호하진 않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그 사내에게 두려움을 주고 싶었다.

****

흥신소에 부탁한 정보가 올 때까지, 단유는 하은과 상미에게 외출을 삼갈 것을 부탁했다.

“무슨 일인데?”

“이유는, 나중에 해 드릴게요. 우선은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하은은 단유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단유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하은 본인도 맡아서 강의를 하는 수업이 있으니 더더욱 허락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부탁을 한 이가 무려 단유였다.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섣부른 말은 거의 하지 않는 이가 하은이 아는 단유였다. 그런데 그런 단유가 심각한 얼굴로 저리 말하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설명해 줄 거지?”

“네.”

“그래. 그럼 언제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하은은 소파에 발을 뻗고 누웠다.

“잘 됐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했는데 쉴 때도 됐어.”

“나야 뭐, 원래 집순이니까.”

상미도 흔쾌히 단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제가 구해다 드릴게요.”

“상미야.”

“네?”

“우리 생리대 필요하지 않나?”

“아, 그렇네요?”

단유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인터넷으로 사면 되지 않아요?”

“필요한 거 있으면 구해다 준다고 하지 않았니?”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건 필요한 거 없어요?”

“생각나면 말할게.”

단유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두 사람이 고마웠다.

명수는, 다행히도 현재 국제 대회 때문에 해외로 나가 있던 참이었다. 며칠 안에 돌아오겠지만 그 전에 일을 모두 끝낼 생각이라 따로 연락을 하진 않았다.

조사를 의뢰한 후 이틀이 지났을 때, 연락이 왔다. 그동안 병실에서 새벽이를 간호하던 단유는 곧바로 흥신소로 향했다. 신화파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받아든 단유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

“예, 예. 알겠습니다. 네.”

통화를 마친 검은 얼굴의 덩치가 가래침을 퉤 뱉은 후, 바로 옆에 있던 이에게 차를 빼 오라며 열쇠를 던졌다. 열쇠를 받아든 깍뚝머리의 덩치가 뱃살을 출렁이며 주차장으로 뛰어가고, 그 사이 담배 한 대를 피우며 기다리려던 검은 얼굴이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곽 표지에 그려진 흉측한 사진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손아귀에서 찰칵거리며 뒹굴던 라이터를 들어 올려 불을 붙인 후, 내가 건달이다, 라는 얼굴로 주위를 향해 날선 시선을 던졌다. 굳이 그 시선이 아니더라도 일반인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가 노려보면 누구나 피해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덩치는 자신을 피해 멀리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우월감을 만끽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델 출신이 아닐까 의심되는 잘생긴 얼굴의 몸 좋은 사내 한 명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다 피하는데 저놈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니, 괜히 신경질이 났다.

“뭘 봐, 존만한 새끼가.”

그저 습관적이며 상투적일 뿐인 대사를 입에 올리며 거들먹거리는 덩치에게로, 사내는 묵묵히 다가갔다.

“여기가 신화파인가?”

“···뭐? 너 뭔데?”

단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보았다. 들은 바로는 여기가 본거지긴 하지만, 신화파가 관리하는 건물이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업소도 여럿이라 조직원들이 뿔뿔히 흩어져 있다고 했다. 그래도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금방 몰려들 테다.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오면 올수록 좋을 것이다.

“이 새끼 뭐야? 안 꺼져?”

한쪽 눈을 찡그리며 위협적인 인상을 지어 보이는 사내를 무시하고 단유는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향해 걸었다. 덩치는 짧고 강렬한 욕을 입에 담으며, 등을 보인 단유의 뒤통수를 목표로 힘차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뒤에도 눈이 달린 것마냥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손찌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만 고개를 숙여 상대의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허공을 가르는 덩치의 손바닥, 그리고 가볍지 않게 휘둘렀던 탓에 하마터면 휘청거리다 넘어지는 추태를 보일 뻔했다. 다행히 운동신경이 그리 나쁘지 않아 못난 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피하는 녀석이 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가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니 사내는 더욱 열이 받았다.

“이 새끼가!”

잰걸음으로 쫓아와 단유의 어깨를 붙잡는 덩치. 하지만 단유는 그마저도 수월하게 피해냈다. 그리고 앞서와 달리, 그냥 피하지 않고 사내의 손목을 붙잡아냈다. 누군가는 손목에 입은 화상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 누구는 그저 상대를 위협할 목적으로 기괴한 그림을 그려 놓았다. 단유는 있는 힘껏 사내의 손목을 비틀었다.

“아악!”

근육 대신 지방이 대부분인 손목이라 비틀린 손목에서 금방이라도 육즙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는데, 정작 나오는 건 그저 비명뿐이었다.

“놔, 이 새끼야!”

단유는, 친절하게도, 상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가볍게 밀기만 했는데 사내는 중심을 잃고 계단 아래로 떨어져 굴렀다. 짧은 비명을 내지르는 사내를 무시하고 단유는 낡고 더러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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