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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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실에 물어보라며 대답을 피하는 두 학생을 보며 사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소롭기만 한 어린 두 학생의 대처가 우스워 지은 웃음이건만, 두 학생에게는 어떤 협박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3일 굶은 고양이 앞에 선 쥐 마냥 벌벌 떨어대는 두 학생을 다루는 건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두 학생을 통해 단유가 졸업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들이 조금 더 친절을 베풀길 바랐고, 그의 뜻대로 두 학생은 단유와 가깝게 지내는 학생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 형 전화번호는 저희도 잘 몰라요.”
초등학생 때도 당해보지 않았던, 뒷골목 불량배 형님을 만나 삥을 뜯기는 기분을 대학 졸업반이 되어서야 느껴보는, 순진하기만 한 두 학생을 잘 다독여 보낸 사내는 모처로 이동해 얻은 전화번호로 통화를 시도했다.
―여보세요?
“어, 그쪽이 강 새벽인가요?”
―네, 그런데 누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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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넘어갈 즈음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도 적어지고 주변 도로도 한산해져 가는데 그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사이 호텔을 옮긴 건가 싶었지만, 우선 좀 더 기다려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쩌면 새벽까지 유흥을 즐기다 늦게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 모르니 어쩌면 외박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단유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분명 위험한 사람이고, 극장에서의 일이 있기 전까지 단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고 해도 서로를 인식한 이후로 단유는 그가 자신을 적대한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니 어떻게든 그에게 경고 이상의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단유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야심한 밤, 인내심을 갖고 호텔을 지켜보던 단유의 호주머니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나왔다. 확인하니 새벽의 핸드폰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이 시간에 전화를 한 적이 거의 없던 동생이었기에 단유는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단유는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새벽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번호를 확인했다. 분명 수신 전화였고 단유의 주소록에 ‘새벽’으로 등록되어 있던 번호였다.
다시 물었다.
“여보세요?”
―김단유? 맞나?
“그쪽은 누구시죠?”
―널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면 되려나?
단유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단유는 굳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떻게 그 전화를 가지고 있는 거지? 새벽이는?”
―그렇게 다그치면 어떡하나? 혹시라도 내가 무서워서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새벽이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허, 또 그러네. 나도 웬만해선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렇게 무섭게 나오면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단유는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사내와 관련해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시뮬레이션했을 때, 이 같은 경우도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이 현실화되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마음의 동요가 컸다.
어떻게 자신의 지인을 찾아내 접근했는지는 현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으니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야 새벽이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니까.
“원하는 게 뭐지?”
―진작 그렇게 나왔으면 좋잖아.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건네는 사내의 목소리가 꽤 불쾌했지만 단유는 참았다. 곧 사내는 장소를 지정하고 30분 이내로 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굳이 단유의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전화를 끊는 사내였다.
여기서 단유는 한 가지 유리한 점을 발견했다. 사내가 단유의 능력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 시간은 이미 새벽 한 시를 지나 두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이 시간이면 도로에 차가 드물기 때문에 약간의 과속만 감수하면 서울 내 어느 지역이든 30분 정도면 빠듯하게 도착이 가능했다. 하지만 단유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야기. 마음만 먹으면 5분도 안 걸려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순간 이동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 요컨대, 사내는 단유의 순간 이동 능력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물론 단유도 상대의 능력 중에 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 알지, 그 외의 능력은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상대는 단유의 능력을 모르지만, 단유는 적어도 하나의 능력은 알고 있다는 것이 유리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능력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싶었던 것인지 사내가 지정한 장소는 다름 아닌 서울숲 공원이었다. 어디서든 불만 지르면 되니 단유를 협박하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곳은 단유에게도 유리한 장소였다.
단유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바로 능력을 사용했다.
****
새벽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해야 했다. 단유의 일이라고 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섰던 게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할 말이 없다.
―환자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으로 이송 중인데 마침 핸드폰 주소록을 보니 강 새벽씨 번호가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새벽은 부리나케 겉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그리고 사내가 이야기한 병원으로 향했는데, 병원에서는 단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병원을 착각하고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며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번호로 통화를 시도했다.
―상태가 위중해져서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방향을 바꿨습니다.
사내는 친절하게 다른 병원을 안내했고, 환자 이송에 관한 절차에 대해 무지했던 새벽은 그저 사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내가 말한 병원은 새벽이 도착한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택시를 잡으러 큰 도로로 나섰는데, 그때 자신의 뒤로 누군가가 접근했다.
“강 새벽?”
새벽이 돌아보았을 때,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보는 사냥꾼처럼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새벽을 바라보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서울숲 공원까지 끌려왔다.
“읍읍!”
재갈이 물린 새벽이 몸을 틀며 저항해보지만, 흙바닥에 뒹구는 굼벵이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라 의미가 없었다. 그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내의 비웃음만 살 뿐.
“어허. 얌전히 있으라니까. 다시 뜨거운 맛을 보고 싶어서 그래?”
이미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새벽이었지만, 사내의 위협적인 손짓에 또 눈물을 쏟아냈다. 이미 그의 오른쪽 어깨는 치료받지 못한 수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등 뒤로 케이블타이에 묶인 두 팔에도 어깨의 그것보단 덜 심한 화상 자국이 남았는데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조금만 참아. 단윤가 뭔가 하는 놈만 오면 끝날 테니까.”
사내는 히죽 웃으며 새벽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일어서서 주위를 살폈다. 서울 생태숲의 개방은 저녁 9시까지기에 주변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와 가까운 숲속 나무 그림자에 숨어 간간이 지저귀는 밤새 소리, 그리고 정체가 불분명한 벌레 우는 소리가 전부인 공간이라 누군가가 접근한다면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설령 몰래 접근하더라도 사내의 발밑에 인질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하리라.
사내도 단유가 생각한 것과 비슷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아는 것에 반해 자신은 그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인질을 잡아두지 않았다면 무조건 당했을 것이다.
사내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서울 숲 전체가 금연 지역이라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고, 알더라도 지킬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담배 연기를 내뱉을 때 발아래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거 참, 사내 녀석이 그거 하나도 못 참나? 하여튼 머리에 든 게 많은 놈들이 이래. 하나부터 열까지 손만 많이 간다니까.”
사내는 조용히 시키려는 듯 구두 끝으로 새벽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새벽은 아무런 반항도 못 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유는 속에서 열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마음이 가는 대로 섣불리 움직였다간 새벽의 안전은 결코 지킬 수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떨어뜨리고 있어 상대는 단유가 이미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림자에 숨어 한참을 지켜보던 단유는 혹시 공범자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코자 조금 더 새벽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으나, 새벽이 당하는 모습을 보니 참기가 어려웠다.
지금 상황에서 단유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사내를 제압하거나 혹은 새벽을 빼돌리는 방법. 해체마법을 이용해 폭발을 일으키도록 하게 되면 자칫 새벽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니 바람마법을 사용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거리가 떨어져 있기에 사내가 당하기 전에 먼저 눈치챌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순간 이동으로 새벽에게로 이동한 뒤, 곧바로 새벽과 함께 이 자리를 뜨는 방법이 있겠다. 사내가 대응하기 전에 움직인다면 별 피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몸을 뺄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일 이동을 했다가 상상도 못 했던 능력에 당하게 되면 작전은 실패일 것이다.
또 설령 새벽을 빼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기에 향후 그와 다시 대면하게 되면 불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새벽이 아직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서, 단유가 먼저 움직이게 되면 새벽이 단유의 능력을 알게 된다. 물론 새벽은 소중한 동생이고 앞으로도 지금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유의 비밀이 드러나길 바라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단유의 편이 아니었고,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했다. 선택이 늦을수록 새벽의 고통과 상처는 더 길어질 테다.
‘무엇이 중요한가?’
만일 그때 사내가 새벽을 발로 차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그래서 바닥에 엎어져 있던 새벽이 얼굴을 돌리게 되고, 밝은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이 퍼렇게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단유는 좀 더 시간을 들여 선택을 고민했을 것이었다.
단유는 새벽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저쪽 세상과 이곳은 다르다. 그리고 그간 새벽이 보여줬던 신의와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음?”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사내는 갑자기 온몸을 관통하는 감각을 인지했다. 그 순간에 사내가 고개를 홱 돌리며 등 뒤를 확인했고, 무언가의 잔상이 시야에 어리는 순간 지체하지 않고 불꽃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그의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던 새벽은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사라졌고,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에 피어올랐던 불꽃만이 자신을 놀리듯 일렁이며 사내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잠깐의 당황스러움은 곧 사라지고 사내는 입꼬리를 올렸다.
“오호라?”
****
가까운 병원의 주차장으로 새벽과 함께 이동한 단유는 새벽의 입에서 재갈을 벗겨내고 손목을 묶고 있던 케이블 타이를 풀었다. 화상의 고통에 신음하던 새벽은 갑자기 나타난 단유와 바뀐 주변에 적응하지 못했다.
“혀, 형!”
“미안하다.”
“여, 여긴 어디예요?”
“잠시만.”
새벽을 품에 안아 든 단유는 그대로 병원 응급실을 향해 달렸다.
“여기 환자 좀 봐주세요!”
“어쩌다 이런 화상을 입었습니까?”
의사는 환자에게 물었지만, 환자나 그를 데리고 온 보호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한가요?”
“여기 팔목은 그나마 치료를 하면 괜찮겠지만, 어깨는 심재성 2도 화상이라 흉터가 깊이 남을 겁니다. 게다가···.”
의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는 옷과 머리를 보니 데리고 온 보호자가 의심스러웠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그러나 그 전에 치료가 먼저였다.
“보호자는 대기실에 나가 계세요.”
단유는 새벽을 쳐다보았다.
“조금만 참아, 새벽아.”
“으윽.”
통증이 더 심해진 것인지 새벽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새벽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단유를 울컥하게 만들었으나, 의사의 거듭된 요구에 단유는 뒷걸음질로 물러서야 했다.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
물러서는 단유를 향한 의사의 경고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다시 그 사내에게 돌아가 봐야 그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리 만무하고, 일단은 이곳을 지키며 경계해야 할 때였다.
대기실로 나온 단유는 얼굴을 감싸고 생각에 잠겼다. 밀려드는 죄책감을 억지로 눌렀다. 앞으로 전개될 여러 가지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며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리고 새벽이 당한 것 이상의 복수를 해줄 방법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