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69화 (769/956)

대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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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야.”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하은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니?”

단유가 고개를 젓고 다시 돌아보자, 사내가 손을 살짝 들어 보인 뒤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단유를 보며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다음에 보자고.”

단유는 멀어져가는 사내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날, 이날의 화재는 당연히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다. 무엇보다 화재로 인한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위층과 달리 1층의 카페와 로비는 완전히 불에 타서 새까맣게 숯이 되었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 역시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고 아나운서가 비통한 어조로 뉴스를 전달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위층의 극장가까지 희생이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시 휴일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고, 그래서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3층의 매표소와 4, 5층의 상영관에 있었는데, 몇몇 상영관에서 불길이 일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소방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면서 불길을 조기에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큰일 날 뻔했어. 그쵸?”

거실에서 뉴스를 보던 상미는 주먹을 꽉 쥔 채로 화면상에 나오는 영상을 지켜보았다.

“난 아직도 정신이 없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영상을 보니 다시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하은의 얼굴에도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극장의 매니저였던 이가 나와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자신들은 평소에도 화재 사건과 같은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경우를 상정해서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그 덕분에 큰 혼란 없이 손님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었다고 밝혔다.

“누구 안내해 주는 사람 있었나?”

“전 그냥 앞사람만 따라갔었는데요?”

“···어쩌면 앞에서 누가 안내를 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이 없었으면 어떻게 사람들이 움직였겠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해당 지역 소방서의 안전 점검이 없을 때도 자체적으로 소방시설을 점검하여 언제라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예방을 했었다는 말로 매니저는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기자 역시 해당 극장에서 소방시설이 정상적으로 가동한 덕분에 더 큰 화재를 막을 수 있었다며, 다른 시설에서도 평시 화재방지 시설물에 대한 점검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로 리포트를 끝냈다.

―그런데 건물 외벽에 물이 쏟아져 불길을 잡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해당 소방서 측에서 조사 중인 상황이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부의 누군가가 건물 옥상에 비치된 물탱크를 강제로 열어 물을 쏟아낸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현재 옥상으로의 접근은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경찰과 소방서의 합동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층의 경우에는 위층과 달리 피해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네, 해당 건물 1층에는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극장이나 쇼핑몰을 찾기 위해 몰려든 상황이었는데요, 안타깝게도 당시 화재로 인해 희생자가 생존자보다 많았습니다. 생존자의 경우 비상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1층 로비에 남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희생당한 것으로 나옵니다만, 더 자세한 상황은 조사 결과가 발표되어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생존자들은 어떻게 조치 되고 잇나요?

―생존자들의 경우에도 유독 가스에 심하게 노출되어 모두 인근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중 몇몇은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어휴, 세상에. 무슨 저런 일이 다 있대?”

“이제 무서워서 영화 보러 가지도 못하겠네요.”

“정말. 요즘 애들 말처럼 이불 밖은 위험하다더니, 딱 그 말이 맞는 상황이네.”

“단유야, 넌 정말 괜찮아?”

여태 침묵을 지킨 채로 두 사람 곁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던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하는 단유를 보며 두 사람은 단유가 꽤나 충격이 컸나보다 생각했다. 자신들도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 있었기에 단유보단 괜찮았다, 고 판단했다. 혼자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는데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은이 단유의 어깨를 다독였다.

“올라가서 조금 쉬던지 그래.”

단유는 하은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대답했다.

“그럴게요.”

2층으로 올라가는 단유를 지켜보던 상미가 하은에게 말했다.

“어째 바뀐 것 같네요.”

하은은 단유가 보이지 않는데도 2층을 바라보다 상미의 말에 대꾸했다.

“단유가 책임감이 강한 아이잖아? 그리고 누구보다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아이고. 그런 아이가 우리를 잃을 뻔했다고 생각했을 테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충격이 컸을 거야. 단유가 실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를 생각해봐. 우리도 쟤 못지않았잖아? 아마 단유도 그때 우리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하은의 말에 상미가 2층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언뜻 이해가 갈 것도 같긴 한데···. 에이, 잘 됐네요.”

“뭐가?”

“쟤도 고생 좀 해야 돼요. 우리가 그때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발을 동동 굴렀는데, 태연하게 돌아와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구니까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잖아요? 역지사지라고, 자기도 한 번 당해봐야 안다니까요.”

“너 참 못된 애구나?”

“그럼요. 저 얼마나 못 됐는데요. 말 나온 김에 명수한테도 전화해서 우리 죽을 뻔 했다고 말해줄까요?”

“···그건 괜찮은 생각이네. 아, 올 때 맛있는 거 좀 사오라고 말하고.”

“네.”

얼마 후,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괜찮은 거냐고 안부를 묻는 명수의 손에는 치킨 박스가 들려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극장 화재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당일 새벽에 있었던 빌라 화재 사건과 맞물려, 빌라의 경우 건물의 80%가 전소되다시피 한 것에 반해, 극장 건물은 1층 카페테리아의 전소를 제외하곤 큰 피해가 없었던 탓이었다. 반면 빌라 화재의 희생자보다 극장 화재 사건의 희생자가 더 많이 발생한 것 역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단유는 그런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그 사내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저 우연히 자신과 같은 힘을 사용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는 사실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그런 힘을 가진 이가 힘을 이용해 화재 사건을 일으키고 희생자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적대감을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가 어느 날 또다시 나타나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단유만을 노린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이번 일에서 보았듯 다른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였기에 단유는 당연히 가족들의 희생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유는 또 다른 위기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위기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 예방 조치를 하는 것이 안전하고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일을 도모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천만 이상이 사는 서울에서 어떠한 정보도 없는 한 사내를 특정하기란 확률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유는 어느 정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화재 사건을 알아봐 달라고요?”

“직접 하실 필요는 없어요. 단지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제가 가서 이야기를 해볼게요.”

“사람이야, 흥신소를 이용하면 되는 일이긴 한데··· 왜 알아보시려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입니다.”

“글쎄요. 그 정도라면 뉴스에서도 대충 다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뉴스에서 얻기 힘든 정보도 있으니까요.”

“요컨대, 공개되지 않은 정보가 필요하단 건가요?”

“공개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해당 화재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니 이를 전담해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난 번에 단유 씨가 실종···아니, 아무튼 그때 단유 씨를 찾기 위해 고용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그때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능력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한 번 연락해 보시죠.”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말씀하신 금액만큼 기부 진행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택윤이 내민 손을 잡아 악수한 후, 단유는 사무실을 나왔다.

****

낡은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던 사내에게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덩치 둘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계시지?”

덩치들은 대답 대신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사내는 대충 손을 젓고 덩치가 비켜선 문으로 들어갔다. 낡은 건물의 외형과 달리 사무실 안은 꽤 고급스러운 사무용 가구들과 소파가 배치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대리석 패널을 깔아 놓았다.

‘허영심이란.’

속으로 혀를 차며 안으로 더 들어가니 넓은 책상 뒤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중년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네.”

윗머리가 살짝 벗겨지는 중인 중년인은 턱과 볼에 잔뜩 살이 올랐는데 욕심 많은 놀부 인상과 같다고 평소 생각했었다. 어느 부대찌개 집 간판에 나오는 그 얼굴과 다를 게 없어 보였으니, 만약 그 캐리커쳐와 같은 종류의 정자관을 씌우면 영락없이 놀부라 칭송받을 것이다.

소파에 털썩 앉아 그렇게 속으로 이미지를 덧씌우며 웃음을 지을 때, 놀부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며 인상을 썼다.

“넌 예의 좀 배워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하냐?”

“여기가 무슨 서당이요? 예의 따위나 챙기고 있게.”

“임마, 내가 앉으란 말이나 했냐?”

사내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대꾸했다.

“새삼스럽기는. 마음대로 앉지도 못하면 소파는 왜 사두셨소? 관상용이요? 눈이 심심하면 화초나 키워보시던가.”

“아우, 너 언젠가는 그 입 때문에 고생할 거다.”

“고생은 무슨. 누가 날 고생시키겠소?”

사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불꽃이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새끼야, 여기서 그거 하지 말랬지?”

버럭 소리 지르는 놀부의 고함에도 사내는 태연히 웃으며 손가락을 저었다.

“종종 이렇게 알려줘야 형님이 적당히 긴장하고 사시지 않겠소?”

“···에이, 씨발. 말만 형님이지? 응?”

“그래도 형님 시키는 건 잘 하지 않소?”

이맛살을 찌푸린 놀부는 가래침을 재떨이에 모아 뱉은 뒤, 사내의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다. 허벅지에도 살이 찐 탓에 쫙 벌린 가랑이 사이가 터지려는 중이었다.

‘저 살들이 다 내가 이권을 챙겨다 준 덕택이지.’

“숨어 있으라니까 왜 나왔어?”

“내가 뭐가 무서워서 숨는답니까?”

“새끼야. 그리 무서울 게 없으면 드러내고 다니지 왜?”

“······.”

대답해서 무엇하리. 애초에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이러는 것을. 사내는 입을 모아 담배 연기를 위로 뱉어냈다.

“너 극장에 불낸 것도 네가 한 짓이냐?”

“······.”

“하아. 거긴 왜 그랬어?”

“···그냥 홧김에 그랬소.”

“홧김에?”

“누가 짜증나게 만들어서.”

담배 한 대 물었다고 짜증나게 굴던 그 여직원 때문이었다.

“너 임마, 대낮에 그렇게 큰 사고를 내면 어떡해?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본 사람들은 다 숯덩이가 됐으니 들킬 일은 없소.”

사내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담뱃재를 털었다.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 새끼네. 뒷감당은 누가 하라고?”

“형님보고 뒷감당하란 적 없으니 형님이야말로 신경끄쇼.”

“새끼야, 그럼 왜 왔어!”

“돈 좀 주쇼.”

“돈? 받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돈은 그 돈이고, 그냥 좀 필요하니까 좀 줘요.”

놀부는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길게 토했다. 사내를 힐끗 본 뒤, 일어나 책상 뒤편에 놓여있던 금고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런 돈뭉치를 몇 개 꺼내 들어 사내에게 던졌다.

“이게 다요?”

“거덜낼 일 있냐?”

“요즘 돈 없소? 일 좀 봐 드릴까?”

“잡소리 그만하고 꺼져 새끼야. 그리고 제발 일 좀 내지 마라. 누가 조사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어.”

“조사요? 누가요? 경찰이?”

“정확히 몰라. 형산지, 아니면 다른 조직인지. 아무튼 누가 화재 건들만 모아서 조사를 한다니까 당분간 잠수 좀 타고 있어라.”

단순 화재처럼 보이는 일이지만, 화재와 얽혀있는 이권들을 추적하게 되면 조직의 실체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누가 조사를 하는 건지 알아봐요.”

“됐어. 넌 아무것도 하지 마. 한두 번은 우연히라 해도 연거푸 일어나면 누구라도 의심하게 돼 있어.”

“증거는 안 남긴다니까 그러네.”

겁쟁이 놀부는 사내의 제안을 거절했다. 뭐 상관없었다. 사내는 돈을 챙겨 품에 쑤셔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걱정마쇼. 당분간은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나오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

“알아서 무엇하게? 아무튼 일 필요하면 연락하쇼. 형님 연락은 제가 잘 받지 않소?”

“사고나 치지 마라.”

사내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인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활동비도 생겼으니 이제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기분 더럽게 만들던 그 녀석을 찾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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