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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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발화가 이루어지며 여자들은 불길 속에 버둥대다 쓰러졌다.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빌 틈도 없었다. 화장실 바닥과 벽의 타일, 천장까지 시커멓게 그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끔찍한 참상 속에서 온전한 것은 오직 사내 뿐이었다.
“쳇.”
더럽고 역한 기분을 느끼며 사내는 침을 뱉었다. 어쩐지 이곳에서 인내심을 발휘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충동적으로 힘을 쓰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오늘처럼 큰 화재를 일으킨 후엔 조심하느라고 힘을 쓰는 경우가 드문데 말이다.
“뭐지? 이 느낌은?”
사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개를 젓다가 문득 위를 쳐다보았다. 검게 그을린 천장일 뿐인데, 어쩐지 그 너머로 자신을 경계하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계?’
경찰들이나 CCTV에 걸리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경계심이었다. 조금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의미랄까?
그러나 사내는 그 의미를 끝까지 추적할 정도의 자제심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걸 추궁할 시간에 화끈하게 모든 걸 불태워 없애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충동만이 점점 커질 뿐이었다.
“그래, 어차피 저지른 일.”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한번 꺾으며 돌아섰다.
화장실을 빠져나오니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었고, 화장실 입구에도 몇몇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가 등장하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물론 사내는 친절하게 답을 줄 생각이 없었다. 거칠게 어깨를 밀치며 나온 사내는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바로 왼쪽에 친절하게도 층별 안내도가 붙어 있었다.
‘극장?’
사내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복합 상영관은 여러 스크린을 복합적으로 운영하고 주차장, 식당, 카페, 쇼핑몰 등 다양한 부대시설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원스톱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의미한다.
사내가 있는 건물의 경우에도 6개의 스크린과 카페, 게임룸, 캐릭터 샵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건물의 경우, 소방법에 의거, 다양한 소방시설과 대피로를 갖추는 게 보통이다. 더구나 상영관은 창이 없어 환기가 어렵고, 내부 카펫과 객석의자, 커텐 등 탈 것이 많은 데다 연소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주는 공간이기에 화재 예방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이 그리 이상적이지만은 않은 법. 설령 불에 잘 타지 않는 내장재를 사용하고 스프링클러와 같이 화재를 조기 진화시킬 수 있는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다고 해도 대형 화재가 발생하게 되면 진화가 어려울 수 있고, 혼란은 불가피하다.
사실 사내의 입장에서는 진화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저 불을 피우고, 키우면 그만이니까. 그저 그에게 중요한 정보는 이 건물에 탈 것이 많다는 것 뿐이었다.
‘테스트해볼까?’
각종 화재 사고들, 그리고 이와 같이 사람들이 밀집되는 건물의 경우 화재방지를 위해 엄격한 관리를 받는다고 하던데, 과연 말처럼 잘 되고 있을까?
여자 화장실에도 화재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우연히도 이곳만 고장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내는 그것만으로도 이 건물의 소화 시스템을 비웃을 수 있었다.
‘사람이라고 다를까?’
직원들이 화재 교육이나 제대로 받고 있을까? 팝콘 몇 개 더 팔고, 예매 손님에게 빠른 발권이나 도우며, 진상 손님에게도 친절하게, 대신 단호하게 대하라는 교육이나 받으면 모를까, 피난로를 따라 손님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요령 따위를 배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배웠다고 한들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또 설령 기억한다고 한들, 사이렌이 울리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처할 직원은 몇이나 될까.
‘사이렌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군.’
시각적으로도 확실히 자각을 시켜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내는 손가락을 튕겼다.
****
“어디서 불이 난 거야!”
유리창 밖으로 붉은 불길이 넘실거리고 아래부터 검은 그을음이 빠르게 뒤덮기 시작했다. 창가 근처에 있던 사람들부터 사태를 파악하고 혼란해 하기 시작했다. 패닉은 곧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단유는 더 이상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다시 상영관으로 발을 돌리려는 그때, 극장 전체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화재경보음에 그때까지도 영문을 모르고 매대 위 메뉴판을 보며 뭘 먹을지 고민하던 커플이나 게임룸 안에서 게임에 열중하던 이들은 어리둥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진짜 불난 거야? 아니면 고장 난 건가?”
진위를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허둥댈 때, 창가 근처의 사람들이 질러대는 비명이 정보를 전달했다.
“불이야!”
비명과 고함이 뒤섞인 장내는 혼란의 절정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 어딨는지 모르는 비상구를 찾아 헤매는 사람. 비상구를 찾은 사람들은 좁은 문을 서로 먼저 통과하려 어깨로 밀치고 당기며 욕을 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유는 여유를 부릴 틈이 없음을 깨닫고 곧장 상영관 쪽으로 이동했다. 상영관 쪽도 상황은 비슷했다. 분명 화재시 대피로라고 상영 전에도 안내를 해주지만 겁에 질린 사람들은 앞문, 뒷문 가리지 않고 뛰쳐나왔고, 그래서 상영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도망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뛰쳐나온 까닭에 그들 사이를 비집고 거슬러 올라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 상미야!”
소리를 질러보아도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욕설에 뒤섞여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단유가 확인한 불길은 건물 외벽에서만 보였고, 내부에는 아직 화재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그때 후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가까운 상영관 입구에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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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자신의 능력으로 건물을 불로 감쌌다.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도록 불로서 건물을 봉쇄한 것이었다. 자신도 그 불에 타들어 갈 수 있다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자신은 불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층 로비와 카페에서 패닉에 빠져 허둥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손가락을 튕겼다. 일단 확실하게 이곳을 정리한 다음 위로 올라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멀쩡한 카페에서 불이 붙더니, 불은 곧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입을 벌리고 주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화재경보기가 정상 작동했다. 사이렌이 울리고 그 소리에 맞춰 불이 넘실거리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잡아먹기 시작했다. 높은 천장과 낮은 바닥을 모두 집어삼킨 불구덩이 사이로 사내가 천천히 걸어가자 그가 지나는 길만 불길이 사그라들며 길을 내주었다.
“어째 오늘따라 불이 잘 붙는 거 같은데?”
자제력을 잃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유난히 불이 거세고 저돌적인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빠르게 주위를 삼켜가는 불꽃과 잿더미가 되어가는 현장을 감상하는데, 마침 그때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며 천장에서 물줄기가 쏟아졌다.
사내는 혀를 차며 스프링클러를 바라보았고, 곧이어 스프링클러 주위로 불꽃이 튀고 연기가 치솟더니 곧 물을 뿜던 스프링클러가 고장 나며 침묵하기 시작했다.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던 사람들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검고 매캐한 연기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밀지 마요!”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에 밀려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제발 밀지 마요! 밀지 말라고! 밀지 마, 새끼야!”
처절한 외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빨리 위로 치솟은 연기 덕분에 사람들은 더 이상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아래가 아닌 위쪽으로 달아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 그러나 쉽지 않은 길이었다. 구르고, 넘어지고, 밀치는 가운데에서 질서정연한 모습 따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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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급상황이라 단유는 힘을 숨기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하은과 상미와 함께 있었던 상영관으로 순간 이동한 단유는 그곳에서도 바깥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무질서한 광경을 목격했다. 좁은 문으로 서로 먼저 나가려 혈안이 된 사람들 속에서 단유는 상미와 하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때 상영관 한쪽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나 싶더니 순식간에 카펫을 태우며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목격한 현장이었지만, 단유는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
어떤 이유로든 불이 나기 위해선 선행 조건이 필요한데, 지금 목격한 곳에는 그런 조건 없이 불꽃이 피어올랐다. 허투루보면 그저 미스테리한 광경이었을 테지만, 단유는 그것이 자신이 사용하는 힘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감상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불꽃은 금방 객석 의자를 집어삼키며 몸을 키우고 있었다. 단유가 손을 털자 난데없이 공중에서 나타난 물이 불꽃을 향해 덮치듯 날아갔다. 한 번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 연달아 두세 번 더 손을 저었고, 그 손짓에 맞춰 마치 예능프로에서나 볼법한 물싸대기처럼 불꽃을 향해 날아갔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상영관을 채우자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보아하니 상미와 하은은 무리에 섞여 이미 상영관을 빠져나간 듯 보였다. 저 사람들을 뚫고 대피로로 달려가 두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위험요소를 제거해서 건물 전체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흰 연기 속에 몸을 가리고 있던 단유가 다시 순간 이동 능력을 펼쳤다.
****
“음?”
사내는 상황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깥을 바라보니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었는데, 그 위로 엄청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방차가 다가오는 소리도 아직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어디서 저런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걸까? 사내는 밖으로 달아나는 사람들 속에 섞여 나가보았다.
‘뭐?’
그것은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다. 건물 옥상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물에 건물 주위를 감싸며 타오르던 불들이 순식간에 힘을 잃고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옥상에 설치된 거대한 물탱크를 터뜨리고 그 탱크 속에 비치되어 있던 물이 건물 외벽을 감싸며 쏟아져 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물탱크이기에 저렇게 끝도 없이 쏟아질 수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나왔던 건물 내부에서도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디 수도관이 터져 실실 새는 것처럼 물이 나오나 싶었는데, 이내 바닥 전체를 적실 정도의 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계단에서도 물이 쏟아졌는데, 위에서부터 계단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로비 전체를 적시며 흘러나와 건물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사내는 직감했다. 저건 이 건물 자체의 소화 시스템이 아니라고. 누군가의 인위적인 힘이 작용했다고.
멀리서 소방차 여러 대가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몰린 사람들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지 안내방송을 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그때 건물 내부에서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땀과 물에 젖어 엉망이 된 몰골이었지만, 목숨만을 살렸다는 안도감이 그들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소방차가 자리를 잡고 호스를 연결할 때쯤에는 이미 건물 외벽은 물론 내부의 불길도 모두 잡힌 상황이었다. 피난 중 다친 사람들은 응급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 외 사람들도 현장 주변에서 소방대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되었다.
“단유는 괜찮을까요?”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인파에 떠밀려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던 하은과 상미는 건물 주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상미가 손을 뻗었다.
“저기요!”
“단유야!”
시끄러운 현장이었지만, 단유는 용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단유에게 달려들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선생님은요?”
“난 괜찮아.”
“상미, 너는?”
“나도 괜찮아. 넌? 다친데 없어?”
“응. 다행이다, 무사해서.”
단유는 자신을 붙잡은 하은의 등을 두드려 그녀를 진정시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가슴 졸이던 하은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보였다. 단유는 안쓰러운 얼굴로 하은을 진정시키며 상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상대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찌릿한 무언가가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너였구나.”
상대의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단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음침한 냄새를 풍기는 사내의 시선을 받았다.
“어쩐지 기분이 더럽더라니. 너 때문이었구나. 하하하.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사내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날 알아?”
단유 역시 그에게 물었다.
“널? 내가 널 어떻게 알아? 아, 하나는 알지. 네가 나랑 같은 힘을 가진 놈이라는 거. 우습군. 나 같은 놈은 이 세상에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나 같은 놈이 또 있었어.”
사내의 강렬한 악의가 담긴 눈빛이 단유를 찌를 듯 다가왔다. 단유는 하은을 상미에게 부탁하고, 걸음을 뗐다. 천천히 사내에게로 향하니, 사내는 입꼬리를 올리며 단유의 접근을 관망했다.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사내의 코앞까지 다가간 단유가 나직하게 물었다.
“왜냐고? 왜냐고? 그런 멍청한 질문이라니. 그럼 내가 묻지. 넌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