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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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자 골목을 돌아다니며 대충 배를 채운 두 사람은 더 돌아다니기보다는 내일을 기약하며 호텔로 돌아가는 것을 결정했다. 골목 내의 작은 분식점들도 떨이로 남은 것들을 팔며 문을 닫던 시간이었기에 더 돌아 다녀봐야 볼 것은 없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걸어갈까?”
택시로 15분 정도 걸린 길이었으니, 느긋하게 걸으면 1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하지 않을까?”
“위험하긴. 싸움에서 단 한번도 져본 적이 없다는 무패 김단유 선생께서 함께 하시는데 두려울 게 어디 있겠어?”
“싸움이 무서운 게 아니라,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그러지. 괜히 취객들이랑 사소한 시비라도 붙었다가 그게 언론에서 터지면 너한테 피해가 갈 거 아냐?”
“말 나온 김에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갈까?”
“안 피곤해?”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술이 당기네. 밤바람도 시원하니, 얼큰한 국물에 소주 한잔하면 딱 좋겠다. 안 그래?”
말 그대로 명수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그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짐작한 단유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신 만일에 대비해 호텔 근처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명수는 술을 마신단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히죽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먹자 골목을 벗어나 가로등 밝혀진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걷고 있던 중이었다. 쌀쌀한 늦가을 밤공기의 여운을 즐기는데 어디선가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명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흥얼거림을 멈췄다.
“무슨 소리 들었지?”
대답은 또 다른 통통거리는 소리가 대신했다. 명수가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축구공 소리 같은데.”
워낙에 자주 듣던 소리라 그런지, 명수는 단번에 축구공 소리라 확신했다. 명수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먼저 앞장서서 소리를 쫓았고, 그 뒤를 단유가 따랐다. 방향이 대충 맞았는지 갈수록 통통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밤늦게까지 공을 차보는 게 소원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8시 이후로는 보육원 내 운동장을 쓸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고, 학교에서 공을 찰 때도, 조명이 지원되지 않는 학교 운동장에서는 어두워지기 전에 철수해야 하는 룰이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통통.
주택이 밀집된 지역의 어느 어두운 골목. 몇 안 되는 가로등이 밝힌 아래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축구공으로 트래핑을 하고 있었다. 축구화도 아니고, 일반 운동화를 신은 아이의 발 위에서 축구공이 튕겨 올랐다가 내려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바로 옆 담벼락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고, 착지 지점을 잘못 잡아 굴러가는 공을 쫓아가기도 했다. 공을 주워 다시 가로등 아래로 돌아온 뒤에는 발 안쪽과 바깥쪽을 써가며 요령껏 공을 굴려보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명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열심히네.”
단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 어린아이라 근육이 제대로 붙지 않아 가는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길쭉길쭉한 다리는 유연하게 움직이며 공을 컨트롤했다.
그때, 아이가 공을 차던 골목에 접한 집의 창문이 열리더니 한 아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수야! 밤중에 시끄럽잖니! 얼른 집에 들어가!”
아이는 공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네.”
“밤마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신경질적으로 창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적막한 골목. 태수라 불린 아이가 집에 들어가나 싶어 바라보는데, 아이는 공을 바닥에 두고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했다. 공을 차는 대신, 공을 가운데 두고 그 옆으로 오른발과 왼발을 교차 시켜가며 뛰는 순발력 연습이었다. 그마저도 바닥을 딛는 소리를 최소화시키려는 건지 고양이 걸음처럼 발끝으로 사뿐사뿐 딛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명수를 힐끗 바라보니, 과연 명수는 울컥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저 아이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단유가 명수의 어깨를 짚으니, 명수가 돌아보았다. 그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더니 명수도 단유와 닮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아이에게로 향했다.
“꼬마야.”
“어? 네?”
갑자기 어둠 속에 다가온 성인 남성의 등장에 아이는 놀란 얼굴을 지어 보였다.
“축구 좋아하냐?”
“어, 죄송합니다.”
대답 대신 사과부터 나오는 모습을 보건대 아마도 이 시간에 공을 차다가 많이 혼났던 모양이다.
“괜찮아. 난 그냥 지나가다 보여서 온 거야. 근데 축구 좋아해?”
“···네.”
“몇 살이야?”
“12살이요.”
“12살이면 5학년인가?”
“네.”
“축구부야?”
“네.”
“그럼 학교에서 공을 차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학교에서도 하는 걸로는 모자라서요.”
“뭐가 모자란데?”
“더 축구 잘하고 싶은데, 학교에서만 하는 걸로는 부족해서요.”
“축구를 잘하고 싶어?”
“네.”
“왜?”
“···축구가 좋으니까요.”
“장래 희망이 축구 선수야?”
“네.”
“그래? 근데 지금은 너무 시간이 늦지 않았어? 집이 어딘데?”
아이는 계속 이상한 질문만 던지는 명수가 수상하다는 듯 보면서도 대답은 곧잘 했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편을 가리키는 아이의 모습에 명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습하는 건 좋은데, 이런 데서 연습하면 근육이랑 무릎이 상할 수 있어. 잘못해서 발목이라도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이 잘 시간이잖아? 이런 시간에 공을 차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겠지? 안 그래? 근처에 운동장이나 공원 같은데는 없니?”
“멀리 있어요.”
“그래? 형이 충고하나 하자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연습을 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무리하면 결과가 좋지 않을 거야. 잘못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오히려 너한테 마이너스잖아. 그렇지?”
“그래도 연습 많이 해야 돼요. 그래야 축구부 있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요.”
명수는 아이의 말에서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계속 연상되었다. 자신도 유소년 클럽 출신 아이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공만 차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무리했던 게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오히려 규칙적인 운동과 관리가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때는 그걸 몰랐기에 무식하게 공만 찼었다.
“형이 공 좀 차봐서 아는데, 공을 많이 차는 게 무조건 도움은 되지 않아.”
명수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나름 필요한 충고를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대뜸 다가와서는 이상한 것만 묻다가 진지한 얼굴로 충고하는 명수의 태도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딱히 반발하지 않고 명수의 말을 끝까지 듣는 모습을 보면, 성격도 나쁘지 않은 아이처럼 보였다. 그보다 단유는 그런 아이에게 충고를 할 정도로 성장한 명수의 모습이 더 기특해 보였다.
명수는 뻘줌한 얼굴로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이 너무 나섰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적당히 이야기를 끊었다.
“축구를 사랑하는 네 모습이 대견해보여서 나도 모르게 참견했다. 기분 나빴니?”
“아니요.”
“다행이네.”
명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허리를 폈다.
“아, 근데 말이야.”
“네.”
“혹시 좋아하는 축구 선수는 있니?”
“호날도요.”
“아, 그렇구나. 국내 선수 중에는 없니?”
“이동국 선수요.”
“응. 그렇구나.”
단유는 입술을 말아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명수의 실망감이 처진 어깨에서 완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이를 뒤로하고 돌아선 두 사람은 술집을 찾는 대신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혹시 어려운 사정에도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처음에는 다들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까? 축구 불모지‘였던’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축구 스타가 나오기 위해선 유소년기부터 전문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선배 축구인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이름을 건 유소년 클럽을 만들고 재능있는 아이들을 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에 이르러 전국에 수많은 유소년 클럽들이 생겨나게 된 원인일 테고. 어떤 클럽에서는 자체적으로 다양한 복지 지원 정책에 따라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돕기도 할 테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험난한 환경 속에서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고, 조금 전에 봤던 아이 역시 그런 아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를 도울 순 없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들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여기 인평시에 유소년 클럽을 하나 만든다든지 말이야.”
보육원과 학교만을 오가는 어린 시절이었다. 아네스 보육원이 소속된 복지재단의 지원과 몇몇 독지가들의 후원에 덕을 입었으니, 그것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돌려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나쁘진 않네. 그럼 내일 돌아다니는 김에 한 번 적당한 곳이 있는지도 볼까?”
단순히 땅만 알아본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적당한 크기의 토지도 필요하겠지만, 클럽을 운영할 인력과 훈련을 시킬 코치진이 필요하다. 그리고 설립 허가 문제로 시의 관계자와 협의를 해야 할 일도 있을 테고.
“아우, 머리 아파.”
그냥 마음만 먹는다고, 돈이 넘쳐난다고 그냥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해야지. 우리가 이렇게 뭔가를 돌려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그래. 그건 단유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그래도 머리 아파.”
“서두르지 말자. 천천히 해도 되니까.”
빠르게 일을 진행하는 것보다, 제대로, 순서대로 일을 진행하여 탈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단유는 강조했다.
“오케이. 그래도 네 덕분에 뭔가 뿌듯하네.”
“그게 무슨 내 덕분이야? 네가 먼저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데.”
“근데 이 정도면 우리도 이제 ‘어른’이 된 거 아닐까?”
“어른은 무슨.”
얼큰한 국물과 소주 대신 근처 편의점에서 사 들고 온 캔맥주로 건배를 한 두 사람은 피곤했던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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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을 뜬 단유는 어쩐지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호텔방을 나섰다.
“같이 가자.”
부스스한 머리 위로 비니캡을 눌러쓰고 단유를 따라나선 명수가 눈을 비비며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늦가을이라 해야 할지, 초겨울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심호흡 속에 폐를 가득 채우며 남아있던 잠을 떨쳐냈다.
“오랜만에 여기 공기 마시면서 뛰어보네.”
“여기나 거기나 다 비슷비슷하지 뭐.”
“단유 넌 감성이 부족해.”
“넌 너무 감성적이어서 문제고.”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한두 사람은 호텔 주변의 한산한 거리를 적당한 속도로 뛰었다. 서울에서도 가끔 명수가 집에 있을 때면 같이 뛰어다니곤 했지만, 명수 말마따나 거기서 뛸 때와 여기서 뛸 때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물론 서울의 공기가 워낙 좋지 않아, 상대적으로 이곳의 공기가 쾌청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괜히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보아왔던 산과 하늘의 풍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새로운 건물들도 많이 들어선 데다, 원래 살던 동네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도 굽이진 산의 등성과 그에 맞닿는 하늘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가는 김에 어제 갔던 데까지 가 볼래?”
명수의 돌발적인 제안에 단유가 물었다.
“왜? 설마 걔가 나와 있을까 봐?”
“혹시 모르잖아? 만약 이 시간에 나와서 체력 훈련을 할 정도라면 진짜 인연인지도 모르고.”
“인연?”
“응.”
잠깐 본 것 뿐인데도 명수는 그 아이에게 깊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만큼 어렸을 적의 자신을 많이 투사시킨 탓이겠지만, 뭐 그게 큰 문제가 될 것도 아니어서 단유는 명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새벽 안개를 뚫고 그 골목까지 힘들게 뛰어간 두 사람은 혹시나 했던 장면은 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슨 드라마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상했던 자신이 우습기도 해서 두 사람은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오래 오래 자야지.”
“그래야 무럭무럭 자라겠지. 돌아가자.”
“응. 그래도 덕분에 운동은 꽤 됐어. 그치?”
“힘들어?”
“야, 나 인명수야. 이 정도로 힘들 거 같아? 안 그래도 힘이 넘치는 판인데? 내가 말이야, 응? 상미가 응?”
“거기까지 해라.”
“훗.”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명수는 다시 호텔을 향해 뛰기 시작했고, 그 뒤를 단유가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