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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764화 (764/956)

플레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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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이 새롭게 운영하게 된 자신만의 학원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단유는 예영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그의 옆에는 새벽과 유영이 있었다.

“확실히 1학년 때랑 다르죠?”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미 1학기 때 전공수업의 급상승한 난이도를 경험했던 새벽이 단유에게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럭저럭.”

“역시. 형은 다르네요.”

“바보야, 너만 그래.”

“아, 그래. 너 잘났어.”

1학기 때 이미 전공에서 A를 두 개나 받아낸 유영의 기세등등한 발언에 새벽이 툴툴거렸다.

그때, 예영이 다가와 디저트 케익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주며 웃었다.

“시험 다 끝난 거야?”

“네, 언니. 오늘로 시험 끝.”

“그래서 오늘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요즘 장사 잘 돼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작년보다 사람이 많이 오긴 해.”

“누나 때문일 거예요.”

“나?”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지니까요. 이 카페에 연예인급 외모를 가진 매니저가 있다고.”

“에이. 뻥치지 마라. 난 이제 한물 갔는데 뭘.”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전 뭐가 되요?”

“왜? 유영이 너도 예쁘잖아? 젊고.”

“언니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거든요?”

“우리 나이 얘기는 그만하자. 슬퍼지니까.”

“그래요.”

이때 눈치 없이 새벽이 끼어들었다.

“근데 나는 그게 참 이해가 안 돼. 왜 여자들은 나이 얘기만 하면 그렇게 민감해지지?”

예영이 싱긋 웃으며 새벽을 바라보았다.

“어머, 너 아직 여기 있었네? 군대 안 가니?”

장난기 가득한 예영의 한 마디에 새벽이 시무룩해진 척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 카페에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는지, 아르바이트생이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영도 몸을 돌려 들어오는 손님을 확인하고는 곧 카운터로 돌아갔다.

“우와.”

새벽의 감탄사에 이어 유영이 손을 들었다.

“언니.”

나이 이야기가 나올 때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라 일부러 시선을 돌리고 있던 단유는 두 사람의 반응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이는 얼마 전 영국에 갔다가 돌아온 유진이었다. 모두에게 익숙한 그녀였지만, 새벽이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오늘의 유진은 유난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옷빨이야.”

허리에 손을 걸치며 포즈를 취하는 시늉에 새벽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촬영 가시는 길이에요?”

“아니. 오전에 광고 촬영이 있어서 거기 갔다가 오는 길이야.”

“우와, 연예인!”

“얘 뭐래니? 나 원래 연예인이거든?”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단유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스캔들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단유의 말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나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면, 성공이다. 스캔들은 무슨. 나 정도는 스캔들이 나도 아무도 관심 안 가져.”

“왜?”

“그렇게 물으면 또 눈물 나는데? 무명 연예인의 스캔들에 누가 관심이라도 갖겠니?”

“광고 찍었다며?”

“그냥 무슨 잡지에 나오는 지면 광고야. 단가도 싸고.”

유진은 들고 있던 핸드백을 내려놓으며 예영을 찾았다.

“언니, 저 커피 좀요.”

“알았어.”

예영이 손가락으로 오케이라고 신호를 보내는 걸 보며, 유진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 왜 온 거야?”

단유의 물음에 눈을 흘기는 유진.

“얘 뭐래니? 나 원래 여기 자주 와.”

“그래?”

“언니랑 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자주 하고 그러는데. 한동안은 영국에 촬영이 있어서 못 왔지만 말이야.”

“와, 누나 영국 갔었어요?”

처음 들었다는 듯 새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왜요? 영화 찍었어요?”

“응. 영화. 성공하면 무명 탈출이고, 못하면 또 다음 날 이 카페로 출근해서 수다나 떨다 갈 예정인 그런 영화.”

그때 예영이 갓 내린 커피를 들고 와 유진에게 건네며 면박을 줬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뭐가 되니? 여기가 무슨 실패자들이 모이는 아지트도 아니고.”

“실패자라뇨? 여기 실패자가 어디 있어요? 서울대까지 들어간 엘리트들이 모이는 자린데?”

“잘났다, 니들.”

“잘난 사람들의 모임이라 불러줘요.”

예영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고, 그 사이 새벽이 호기심을 못 이기고 영국에 간 사연에 대해 캐물었다.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유진은 자신의 영국 촬영썰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 거 말해도 돼?”

“홍보잖아, 홍보.”

“듣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니들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다녀. 이번에 개봉할 영화가 참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는 김에 인터넷에도 글 좀 올리고. 기대작이라고.”

“이게 지인 영업이라는 거구나.”

“맞아. 그러니까 다들 각자 할당량을 맡아서 반드시 목표치를 달성하도록. 그리고 이거 피라미드다? 인당 다섯 사람씩에게 전파해서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그리고 그 다섯 사람이 또 다른 다섯 사람을 구하도록 설득하고. 그렇게만 하면 우리 영화, 백만 관객 돌파 가능하다 이거야.”

“영화 개봉이 언젠데?”

“아마, 올해 겨울?”

“한참 남았네.”

“한참은 무슨!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열심히들 움직이라고!”

이후 유진은 이 영화를 위해 얼마나 어렵게 오디션을 봤었는지, 그리고 기적적으로 합격 후 최선을 다해 영화 촬영에 임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녀가 얼마나 이 영화의 성공을 기대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젊은 그녀였지만, 데뷔한 이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기에 조바심이 날만도 했다. 오죽하면 서울대 입학 동기가 특이한 이력을 만들어 주목을 받고자 했던 것일까.

****

마침내 명수가 K리그 단일 시즌 최다골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후반 라운드에서 명수에 대한 상대팀의 집요하리만큼 과도한 수비가 집중되어 골을 넣지 못한 경기도 나왔지만, 명수는 끝내 해내고 말았다. 그리하여 39골.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할 만한 기록이 나왔다. 더구나 시즌 중반부터 합류했음에도 얻어낸 기록이란 점에서 명수의 미친 듯한 득점력에 많은 구단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물론 명수는 이와 관련된 협상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 일은 그의 매니지먼트사에서 따로 처리할 문제였으니. 매니지먼트사에서 인력을 총동원하여 협상에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해, 그리고 이를 통해 좀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애쓰는 동안 명수는 집에서 게임패드를 붙잡고 살았다.

“이게 다 네 문신 덕인거 같다.”

“맞아.”

“맞긴 개뿔. 그런데 어쨌든 신기하긴 하더라. 몸이 지치질 않아. 아무리 뛰어도 숨이 덜 가쁜 것 같고.”

체력만 좋아진 게 아니었다. 원래 체력이 좋았던 명수였지만, 주력은 조금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이번 시즌에서 그러한 평가는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함께 달리면 뒷 선수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주력을 뽐냈을 뿐 아니라, 근접해서 공의 소유권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상대보다 빠른 민첩한 발놀림으로 공을 차지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혹자는 거의 ‘메시급’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게임만 하니 지겹다. 뭐 다른 거 없나?”

“상미는?”

“걔는 지금 자는 중. 나중에 새벽에 방송한다고.”

“TV 봐.”

“단유야, 바빠?”

“아니.”

엊그저께 수강했던 모든 학과 수업이 종강을 함으로써 단유도 방학이 된 상황.

“그럼 우리 어디 놀러 갈까?”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딱히 가고 싶은데는 없는데, 계속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해서.”

명수가 집 밖으로 나서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아무리 국내 리그가 다른 종목에 비해 인기가 없다 해도 하도 언론에서 떠들어댄 통에 명수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거의 스타급으로 주목을 받는 선수라 이전처럼 슬리퍼 질질 끌면서 밖을 나갈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의 화제거리가 잠잠하게 잦아들면 또 다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명수의 외출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반 강제로 집에만 있으니까, 아무리 좋아하는 게임을 붙잡고 있어도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라, 단유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안했다.

“내 차 타고 드라이브나 갈까?”

“콜!”

차에 시동을 걸고 골목을 빠져나가니 그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이 되는지 명수가 손바닥을 비비며 콧노래를 불렀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한참을 달릴 때,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르던 명수가 문득 아쉽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선생님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좀 여유롭게 살면 좋지 않겠냐는 뜻으로 학원 건물 하나를 매입했던 것인데, 오히려 전보다 더 바빠진 하은이었다. 만약 하은이 힘들고 괴로워했다면 도로 되팔 생각도 있었는데, 하은은 전보다 더 즐겁다면서 단유를 말렸다.

“선생님도 팔자가 그리 좋진 않아.”

“맞아. 우릴 만난 것만 봐도 좋은 팔자는 아니지.”

단유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주팔자를 믿는 건 아니지만, 만약 있다면 하은은 늙어서도 고생할 팔자이리라.

“좋은 남자 만나면 해결되지 않을까?”

단유가 문득 생각나 물었더니 명수는 손가락을 흔들었다.

“너나 내 눈에 맞는 남자가 그리 흔할까? 솔직히 말해서 너는 조금 물 탄 것처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잖아?”

“내가?”

단유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명수는 그에 아랑곳 않고 자기 말만 계속 이어나갔다.

“난 아니다. 진짜 아주 조그만 것까지 다 따져서 결정할 거야. 이 사람이 우리 선생님한테 어울릴 사람인지, 아닌지. 조금이라도 걸리면 무조건 반대야.”

“그러다 선생님 결혼도 못하는 거 아냐?”

“그건 선생님 팔자지. 좋은 남자 못 만날 팔자.”

“우리 한 이야기를 선생님이 들었으면 아무 그 날로 우리 초상 치를 거야.”

“없는 데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는데 뭐. 아, 좋다. 바람도 좋고.”

“먼지 들어와.”

“조금만 이렇게 가자. 속이 다 시원해지는데.”

한참을 더 달린 뒤, 마침내 다다른 곳은 인평시였다. 바로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도착하니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때라 당장은 어디를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여기 호텔은 없나?”

허리를 조금 숙이고 창밖을 살피는 명수를 곁눈질로 본 단유가 대꾸했다.

“핸드폰으로 찾아봐.”

“아.”

이윽고 명수가 찾아낸 호텔이라는 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우와, 여기도 많이 변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저기 원래 약국 있던 자리 아닌가?”

약국이 있던 자리에는 편의점이, 3층짜리 낡은 건물에 사금융 대출업체가 있던 곳에는 새롭게 지어진 빌딩과 병원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찾은 호텔은 생각보다 괜찮은 외형이었다.

“우리가 너무 옛날 생각만 하고 살았나보다.”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다보니 서울에 훨씬 못 미치는, 거의 시골 동네 정도로 인지하고 있던 명수였다. 그래서 이곳의 호텔이란 곳도 말만 호텔이지 여관 정도 수준이 아닐까, 라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찾은 곳은 꽤 깔끔한 객실과 모던한 디자인으로 꾸민 로비를 자랑하는 호텔이었다.

“벌써 들어가려고?”

“그럼?”

“일단 체크인만 하고 나가서 뭐 좀 먹자.”

“아, 그래.”

다시 거리로 나온 두 사람은 발렛파킹 해놓은 차를 굳이 빼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단유의 차는 사실 너무 고급스러워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뺏을 우려가 있었다.

이 근방까지는 자신들이 자주 다니던 곳이 아니라 낯설기만 했으나, 그래도 인평시가 그간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살펴보기엔 충분했다.

“근데 식당이 없네.”

“저쪽에 먹자 골목이 있던 걸로 아는데 저기 가볼까?”

“아, 맞다. 예전에 나 저기 가본 적 있다. 그때, 윤정 누나가 데리고 간 먹자 골목이 저기였을 거야.”

이름이 언급되니 그에 대한 기억들이 좌르르 이어진다.

“그 누나, 지금쯤이면 레스토랑 쉐프 쯤 되지 않았을까? 아직도 거기 스테이크 집에 있을까?”

“모르지. 내일 한 번 찾아가볼까?”

“그래.”

지금은 어지간한 레스토랑은 영업을 종료했을 시간이기에 애써 찾아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로변에 나가 택시를 잡아 탄 두 사람은 먹자 골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 먹자 골목 있죠?”

“외지에서 왔나 보네요?”

“아, 어릴 때 여기서 살다가 이사를 갔거든요. 거의 십 년만에 돌아온 거예요.”

“아, 네.”

택시 기사는 반갑다는 듯 룸미러로 단유와 명수를 살피며 뭔가를 말하려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먹자 골목으로 가는 동안 연신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입을 열진 않았다. 두 사람도 딱히 꺼낼 말이 없었기에 도착지까지 조용하게 이동했다. 그리고 내릴 때쯤 되어서야 택시기사는 조심스럽게 ‘인 명수 선수 아니냐’고 물었다.

“맞아요.”

“맞아요? 아이고, 나는 긴가민가 했네. 그럼 인 선수가 여기서 태어난 거요? 여기가 고향인 거였어요? 난 전혀 몰랐네.”

명수는 대답 대신 히죽 웃기만 했다.

“내리기 전에 거기 사인 좀 해줘요. 우리 아들이 인 선수 엄청 좋아하거든.”

“아, 네.”

“이야, 명수 너 출세했다.”

“내가 이 정도다, 임마.”

“출세해서 고향에 돌아오니 좋아?”

명수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뜸을 들이며 앞에 펼쳐진 먹자 골목을 바라보던 명수는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여기가 고향인 거지? 우리한테.”

명수의 물음에 단유 역시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렇지. 여기가, 우리 고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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