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friend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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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야, 밥 먹어!”
날카로운 상미의 목소리에 이어 상미 방의 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부스스한 머리를 한 명수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거실을 지나 부엌까지 오는 길이 그렇게 험난했는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핼쑥해진 명수의 얼굴이 볼만했다.
식탁에 앉아 있던 단유가 심드렁한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니 명수는 뻘쭘한 얼굴을 하고 손을 들었다.
“안녕.”
단유 맞은 편에 앉았던 하은이 한심하다는 듯 눈을 좁히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게 이 아침에 어울리는 인사니?”
“···잘 주무셨어요?”
“못 잤다. 다 큰 놈이 그렇게 펑펑 울어 재끼는데 너라면 잠이 오겠니?”
“제가 울었다고요?”
“기억 안나니?”
“그게···어제 제가 술을 조금 많이 마셨던 것 같긴 한데···.”
“상미야, 얘 큰일이다. 젊은데 벌써 저러면 어쩌니? 너 나중에 고생 좀 하겠다.”
상미는 빈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북어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여차하면 파혼해버리든지 하죠.”
“···너 파혼이란 말이 아주 입에 붙었다? 너 그렇게 나랑 헤어지고 싶냐?”
“헛소리하지 말고 앉아서 국이나 드셔.”
명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다 상미의 날카로운 시선에 움찔했다. 어깨를 움츠린 채로 단유의 옆자리로 조심스럽게 움직인 명수는 숟가락을 들다말고 단유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 물었다.
“나 어제 실수 많이 했어?”
단유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울었어?”
역시 고개를 끄덕이니 명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태어나서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내가 울었다고?”
명수가 하은을 바라보자, 하은이 입꼬리를 내리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명수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잡고 도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항변해보지만, 이어지는 것은 뒤통수를 후리는 상미의 손길뿐이었다.
“지랄하지 말고 국이나 먹고 해장해.”
한손으로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국을 한 입 떠먹은 명수는 나직하게 말했다.
“야, 어디가서 내가 울었다는 말 하면 안 된다.”
“내가 어디가서 그런 이야기를 해.”
“나중에 인터뷰 같은 거 올 수 있잖아.”
“무슨 인터뷰?”
“월드컵 같은 데서 최다 득점 공격수가 된다든지 하면 여러 곳에서 인터뷰하러 올 거 아냐? 그때 나에 관련된 에피소드 같은 걸 물을 수도 있잖아? 그럴 때 내가 술먹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은은 혀를 차며 명수를 바라보고 상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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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단유는 편안한 복장을 좋아해서 주로 맨투맨 티셔츠나 혹은 튀지 않는 무난한 패션의 옷들을 즐겨 입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슈트를 갖춰 입고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단유가 간 곳은 바로 명수가 속한 구단의 훈련장. 그리고 그곳에서 단유는 명수의 감독님을 만났다.
“왔는가?”
“이렇게 바로 만나뵐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단유의 공손한 인사에 감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근데 알기로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어느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처럼 보이는군.”
“아무래도 오늘은 좀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감독은 가볍게 어깨를 털며 업무를 보던 책상에서 벗어났다.
“일단은 나가지.”
단유는 감독의 말을 따르는 대신 물음을 던졌다.
“오늘 구단 프런트 사람들과 함께 보기로 한 것 아닌가요?”
“일단 나랑 먼저 이야기 좀 하자고.”
“여기서 하기 힘든 이야기입니까?”
감독은 단유를 가만히 지켜보다 단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나도 입장이 있단 말이지.”
“중간에 끼어서 중재를 하려는 것이라면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전 제 친구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알아. 알지만 일단은 늙은이의 이야기부터 들어주지 않을 텐가?”
단유는 감독의 눈에 담긴 진심을 읽은 뒤, 입을 다물었다. 괜히 억지를 부릴 타이밍은 아니라고 느껴 감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술 한 잔 괜찮은가?”
아직 해가 중천에서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일단 감독을 따르기로 했으니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 뒤를 쫓았다. 훈련장 근처의 상가 밀집 지역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꼬불꼬불한 골목을 따라 한참을 가다 실내가 어두운 작은 식당을 찾았다. 이런 식당을 찾으려면 어지간한 단골이 아니고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감독님, 오랜만이시네요.”
“이 시간에 문 여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왔어요.”
감독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가게 안에서 영업 준비를 하고 있던 노(老)주인 역시 익숙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내가 선수 시절 때부터 이용하던 식당이야. 분위기는 이래도 술맛은 괜찮아.”
“감독님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어차피 소주병에 든 술맛은 거기서 거기니까.”
감독은 농담이라며 손가락을 흔들었고, 그에 맞춰 주인은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 곧바로 마른 안주 한 접시와 두 잔의 소주 컵을 소주병 위에 덮어 올린 채로 가져다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랑은 2년 전 회식 때 이후로 처음 마시는군.”
사실 감독과 단유가 따로 만나서 술을 마실 일은 없었다. 명수가 굳이 회식자리에 단유를 불러내서 억지로 인사를 하고 술을 나눈 게 처음이었다.
“자네를 본 건 몇 번 되지 않았지만, 명수 그 녀석한테 워낙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말이야. 만약 그렇게 입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구단 내에서 자주 보는 사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을걸.”
“저도 명수한테서 감독님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그놈은 내 욕이나 하고 다녔을 거 같은데.”
“아니요. 감독님이 잘 챙겨주셔서 더 즐겁게 운동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존경한다고 하더군요.”
“확실히 자네는 명수랑 다르군. 받게.”
술 한잔을 받고 병을 건네 받아 감독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낮술을 즐기는 성격은 아닌 듯 한데, 괜찮지?”
“네.”
그대로 소주 한 잔은 입안에 털어 넣은 감독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접시 위의 땅콩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바로 깨물어 먹지 않고 혀 위에서 굴리듯 땅콩을 먹는 희한한 모습이 보였지만, 딱히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보다 신경쓸 문제는 이어질 이야기였으니까.
“명수, 그 녀석 참 밝고 활기차서 보기가 좋아. 요즘 아이들, 이란 표현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내가 본 중에 가장 밝고 긍정적인 녀석이란 말이지. 게다가 처음 본 순간부터 날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녀석은 그놈이 처음이었기도 하고. 내가 사실 좀 차가운 인상이지 않은가?”
“명수는 감독님이 따뜻하고 바르신 분이라 보는 순간부터 정이 가더라던데요?”
“지 성격이 그러니까 날 그리 본 거겠지.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인다지 않던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늘 주변을 경계하며 차갑게 벽을 세웠던 어린 시절, 아무런 격의 없이 다가와 말을 붙이고 친구 먹자던 이는 명수가 거의 유일했다.
“그런 친구가 어제 울었습니다.”
“울어? 걔가?”
“마음이 여리니까요.”
“그런가?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는 성격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가족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기도 하나보군.”
‘가족’이란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들렸다. 감독을 바라보니 감독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은가. 가족이니까 자네 앞에서 눈물도 보이고, 가족이니까 자네는 새벽부터 내게 전화해서 이렇게 찾아왔고 말이야. 자네 둘을 보면 친구 이상의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가족입니다, 명수는. 그런데 그 명수가 그렇게 상심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으면?”
감독이 잔을 채우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쉽게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무조건 명수의 편에 서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구단의 입장도 들어보고 난 뒤 조치를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치라.”
감독은 손에 든 소주잔을 다시 털어 넣고, 이번엔 진미채 하나를 집어 오물거렸다.
“도대체 명수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무기한 출전금지가 된 것이죠?”
다시 술잔을 채우고 입안에 털어 넣기를 반복할 뿐 대답이 없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단유는 가만히 기다렸다.
“우선은 내가 명수를 굉장히 아낀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주게.”
“알고 있습니다.”
감독은 얕게 한숨을 뱉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니 꺼끌꺼끌한 턱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난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그냥 운동만 하던 사람이었거든. 자네는 서울대 다닌다지? 난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았고, 내 주변에도 똑똑한 사람은 없었어. 다들, 그냥 흙바닥에서 뒹굴며 공이나 찰 줄 알았지. 그래도 운이 좋았어. 공 차는 기술 하나로 빌어먹고 살면서 이렇게 감독까지 됐으니까. 아마 그래서 명수 그 자식한테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아. 난 명수가 나보다 더 잘살았으면 했거든. 나도 자식이 있어. 지금 큰 딸이 고등학생이고 막내 아들 놈은 중2병인가 뭔가에 걸렸다는데, 집에 들어가면 날 본 척 만척 하지. 괘씸한 놈이다 싶지만, 그것도 내 부덕의 소치라 생각해야겠지. 아무튼 명수, 그 놈을 보면 솔직히 다른 녀석들보다 더 신경 쓰여. 큰 아들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그녀석이 꼭 성공하길 바라지. 그리고 다행히 그녀석은 충분히 성공할 재능이 있어. 굳이 내가 뭔가를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녀석은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까, 분명 성공할 수 있을거야. 축구선수로서 말이야. 그런데 말이지. 축구선수로서 성공하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더 솔직히 말하면 축구만 잘한다고 과연 성공할 수 있겠냐는 말이지. 이 바닥, 굉장히 추해. 더러워. 시궁창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관중석에서 앉아 보면 그저 화려한 기술과 투지로 경기에서 승리하려는 열망에 가득 찬 선수들만 보이지.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돈에 눈먼 자들과 성공에 목마른 이들의 이전투구가 판을 지배하는 곳이란 말이지. 재능있는 선수, 성격 좋고 착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 없는 곳이지. 사실 그런 공식은 여기 아니라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아. 어렸을 땐 몰랐던 그걸 이 나이에서야 겨우 깨달았지.”
또 다른 소주 한 병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명수는 좋은 선수야. 착한 선수고. 동료들에게 언제나 호의적이고 동료들 역시 명수를 좋아해. 하지만 모두가 명수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경기장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는 고작 11명이고, 더욱이 포지션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어야 하네. 이제 4년차인 명수의 위로는 수많은 선배들이 있어. 그들을 제치고 선발 출전하는 명수는 분명 뛰어난 능력 때문이긴 하지. 그리고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은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고. 인정하면 간단한 문제지만, 사람이란게 그리 너그럽지 않아. 너무 당연한 이유임에도 수긍하지 못하거나 혹은 질투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런 이들은 앞에서는 아무 말 못하면서 뒤에서는 험담을 하지. 내가 그 녀석보다 못한 게 뭔데?”
그 이야기는 명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구단도 마찬가지야. 비록 보호하고 투자의 대상인 선수들이지만, 때로는 구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소모품이기도 하지. 그런 소모품이 구단의 이익에 반한다면, 구단은 대체제를 찾아 나서지. 트레이드를 한다든지, 혹은 더 나은 선수 영입을 한다든지. 유일무이한 능력을 가진 선수가 아니고서야 얼마든지 대체제를 찾을 수 있다고 보니까. 그리고 그게 사실이고. 월등한 성적을 유지시켜 줄 훌륭한 선수도 좋지만, 때로는 적당한 성적과 함께 구단의 이익 투영에 협조해주는 선수가 구단 입장에선 다 반가운 법이니까 말이야.”
구단, 이란 이름을 다른 조직의 이름으로 바꿔도 그 의미는 능히 통할, 그런 현실에 관한 이야기라고 감독은 덧붙였다.
“명수가 비록 무기한 출전 금지라는 징계를 받았다지만, 사실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네. 지금 구단의 입장에서 명수 정도의 공격수는 구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여전히 잠재력이 풍부한 명수는 구단의 훌륭한 자산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명수가 몇 경기 뒤에 출전하게 될 거란 것은 구단도 알고 나도 알아. 오직 명수만 모를 뿐. 다시 말해서, 구단은 지금 명수를 길들이고 싶어하는 거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바꾸고 싶은 거야.”
많은 술잔이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했다. 감독의 얼굴은 붉은 조명을 받은 것처럼 타올랐고, 단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약 내가 떼를 쓰면, 어쩌면 구단도 곧바로 징계를 풀고 명수를 출전시켜 줄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생각이야. 왜냐고? 그 시간에 명수가 좀 더 이 사회와 현실을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거든. 이참에 좀 더 쉬면서 멘탈을 관리하는 것도 좋고. 어쨌든 이 시간을 이용해서 명수가 현실을 좀 더 깨달았으면 했어. 단순히 공 잘 차는 선수가 아니라, 그저 호인으로만 여겨질 게 아니라,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았으면 해서. 이상만 꿈꿀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현실을 이용하여 더 오래, 더 높은 자리에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이렇게 오래 말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늙은이의 술주정이 너무 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너무 두서없이 이야기했지만, 자네는 똑똑한 친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지? 그치? ···술잔이 비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