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friend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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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노을이 한강 위에 드리우니 서울 전역에 별들이 생겨났다. 그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별빛이 서울을 밝히니 과연 ‘야근 왕국’이라 불릴 만한 광경이었다. 물론 고층 빌딩에 몰린 불빛만큼이나 화려한 네온 사인의 향연이 거리 곳곳에서 이어졌다.
별빛만큼이나 소란스러운 거리는 다양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늦은 시간까지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노변 매장의 노랫소리와 자동차 배기음, 술 취한 사람의 넋두리와 사소한 시비로 불붙은 고함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1년 내내 소란스러운 도시가 바로 서울이었다.
단유는 묵묵히 그 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을 그리워하긴 했었지만, 이리도 소란스럽고 정신 사나운 도시 풍경은 전혀 그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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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힘없이 비탈을 걸어 올라와 잠시 숨을 고른 뒤, 철문 옆의 비밀 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전자음과 함께 문의 걸쇠가 열렸다. 느릿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가볍게 툭 밀어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작은 마당을 지나 현관문 앞에서 다시 비밀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현관 위의 작은 등이 켜졌다.
―킁.
―월월.
호빵과 패티가 작은 다리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왔다. 주인이 왔다고 반가운 척 하는 개들이지만, 몸과 마음이 지친 하은은 녀석들의 환영인사에 응대할 기운이 없었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하이힐을 벗어 던진 하은은 부엌 쪽에 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라면 냄새도 느껴졌다.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었나?’
돌이켜보면 한동안 라면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 같긴 했다. 정확히는 집에서 먹은 기억이 없었다. 단유가 사라진 후, 하은은 학원에 휴직계를 내고 단유를 찾기 위해 경찰서와 변호사 사무실, 그리고 강남의 PB센터 등을 돌아다니느라 바빴다. 집에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며 명수와 상미가 하은을 말렸지만, 하은은 그럴 수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집에 있기보단 경찰서를 찾게 되고, 단유의 개인 자산을 관리하던 택윤과 만나 그의 인맥을 이용하여 단유를 찾을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다. 오늘도 하은은 택윤을 만나 흥신소에 의뢰했던 일의 진행 사항을 듣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다가 늦어지게 되었다.
“상미니?”
명수나 상미도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명수의 경우, 강원도 일대와 그 주위 산을 돌아다니며 단유를 찾으려 했다.
“예전에도 단유가 산에서 한 번 기절한 적이 있었거든요.”
아주 어릴 적의 일이긴 했지만, 단유의 과거를 기억하는 명수로선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았을까 염려되는 마음에 주변을 탐색키로 했다. 처음 며칠은 경찰 측에서도 인력을 내어 주변 탐사에 도움을 줬지만, 딱 3일이 지난 후 인력은 모두 철수했다. 골든 타임이 지났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명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이렇게라도 찾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주변 산들을 오르고 또 올랐다.
상미는 그런 명수를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괜찮다는 명수였지만, 상미가 곁에 있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고 산만 오르내리다가 탈진해서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런 명수임을 알기에 하은이 상미에게 부탁했고, 상미는 이를 받아들였다.
“너마저 잃어버리면 난 콱 죽어버릴 거야.”
그래서 두 사람은 강원도에 있다, 고 생각했는데, 라면 냄새가 풍기는 거실에 들어서니 하은은 상미가 집에 온 게 아닐까 싶었다.
“거실에 불이라도 켜지 그랬어.”
들어서며 현관 옆 스위치를 누르니 2층에 매달린 조명이 켜지며 1층을 밝혔다.
얼마나 고생했으면 집에 오자마자 라면을 먹을까. 생각해보니 한동안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없었기에 집에는 밥도 없고 반찬도 없었을 것이다.
―후루룩
라면을 먹는 소리가 들려오니, 가슴이 찡했다. 밖에서 고생하고 돌아와 허기라도 채우려 했는데 라면밖에 없는 형편이라니. 괜히 미안했다.
“많이 고생했지?”
부엌으로 들어서며 묻는 하은의 질문에 답이 들렸다.
“괜찮아요.”
하은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집에 저밖에 없는 것 같아서 거실 불은 안 켰어요.”
후루룩 라면 국물을 들이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눈치 없는 호빵이 쪼르르 달려가 킁킁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아, 얘네들 밥그릇이 비웠길래 제가 줬거든요. 조금전에요. 그러니까 얘들 밥 안 주셔도 돼요.”
쇠젓가락이 컵라면의 밑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라면을 먹으니까 이것도 맛이 꽤 좋네요. 예전엔 솔직히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빈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으며 단유가 태연스럽게 라면에 대한 소회를 밝히니 하은의 턱이 덜덜 떨려 왔다.
“너, 너···.”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하은의 어깨에 걸려있던 핸드백 끈이 떨어져 내렸다.
“너···.”
하은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단유가 놀라 뛰어와 하은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하은은 잠시 현기증이 나나 싶다가 단유의 말을 듣자, 마치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피가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식이!”
누구는 저 때문에 걱정이 돼서 잠도 못 자고 그 고생을 했는데, 감히 태연하게 집에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괜찮냐고?
단유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는 순간, 여태 가슴을 바작바작 졸이게 만들었던 주제에 태연하게 라면을 먹고 있다가 되레 괜찮냐고 묻는 단유의 태도가 하은을 폭발시켰다.
“야!”
하은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백을 세게 움켜쥐는 사이, 눈치 없이 근처에서 맴돌던 호빵과 패티가 호령에 놀라 거실로 달아났다.
****
하은의 연락을 받자마자 명수와 상미가 서울로 돌아왔다. 새벽 고속도로를 위험하리만치 내달린 끝에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명수는, 집 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큰 소리로 단유를 찾았다.
“김단유!”
“어.”
거실 소파에 앉아 잠든 호빵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던 단유가 태연히 대답하자, 명수 역시 현기증을 느꼈다.
“이 개 같은···.”
명수가 쾅쾅 바닥을 부술 듯이 거친 걸음으로 다가서자, 단유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입에 붙였다.
“선생님, 방금 막 잠들었어.”
그제야 단유 옆에 누워 있는 게 호빵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얇은 담요를 걸친 채 소파 위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있는 하은을 발견한 명수는 씩씩거리며 단유를 노려보았다.
“야!”
뒤따라 들어온 상미가 소리를 지르려는데, 역시 단유가 손가락을 들어 보인 뒤, 옆을 가리켰고 상미도 결국 볼을 부풀린 채로 침묵을 지켰다.
“너 나랑 이야기 좀 해. 따라와.”
명수가 2층을 가리켰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미야, 넌···.”
“나도 가.”
“······.”
결국 2층의 단유 방에 모인 세 사람. 방에 들어서서 문을 닫자마자 명수는 단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시원하게 욕이 쏟아지는데, 내용은 결국 자기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는 푸념과 그동안 별일 없었냐고 묻는 안부의 물음이었다. 단유는 별로 기분 나쁘다는 것도 없이 웃으며 하은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잠깐 돌아다녔다고?”
“응.”
“왜?”
“어, 뭐 좀 찾을 게 있어서.”
“뭘?”
“그건 이야기하기가 좀 그런데.”
“아니, 도대체 뭘 찾으려고 했기에 강원도까지 가서는 행방불명이 되냐고. 게다가 차랑 핸드폰도 다 놔두고 말이니?”
상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자,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사과했다.
“그건 좀 미안하게 됐어.”
“우리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들었어. 그 점은 정말 미안해.”
욕을 쏟아낸 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명수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해. 도대체 뭣 때문에 이 사달을 벌였는지. 네가 큰 사고를 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네가 우리 모르게 고민을 하고 있고, 그걸 너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건 정말 실망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우린 서로에게 감추는 게 없어야 했다고. 그런데 나한테도 말 못할 일이 있었어? 그리고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잠적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있으면 내가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줄 알았어?”
단유는 난감한 표정으로 성이 난 두 친구를 번갈아 보았다. 고마운 친구들이고, 보고 싶었던 가족이었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참 난감했다.
“미안해.”
“미안하면 말해. 아니면, 상미가 들으면 곤란한 거야?”
명수의 말에 상미가 벌떡 일어섰다.
“니들만 친구냐?”
“너랑 나는 다르지.”
명수의 대답이 상미의 화를 돋웠다.
“달라? 아, 너는 불알친구고, 난 어쩌다 빌붙어 사는 식충이다 이거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렇게 들리잖아!”
단유가 사이에 끼어들어 두 사람 사이를 말렸다.
“왜 그래? 그런 거 아니니까, 둘 다 진정해.”
“말을 이상하게 하잖아?”
“네가 이상하게 받아들인 거지.”
“이상해? 내가 이상하다고? 하, 참, 나. 야, 인명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오늘 되게 실망이다?”
“실망은. 야, 너 걸핏하면 실망이다, 실망이다 하는데, 툭 까놓고 말해봐라. 뭐가 그렇게 실망인데? 응? 솔직히 나도 너한테 실망하거든?”
“뭐? 와···와···진짜 어이가 없네.”
“야, 야, 니들 좀···.”
“야, 됐고, 너 나와 봐. 말 나온 김에 오늘 끝장을 보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응?”
어쩌다 갑자기 대화가 이렇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급변해서, 이제 상미와 명수 두 사람은 단유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로를 노려보며 핏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너 강원도에 있을 때 말이야···.”
“너는 어떻고? 너 지난 번에 말이야···.”
“와,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웃기시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처음엔 두 사람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어찌나 기가 드센지 어지간해서는 말릴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단유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들의 말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끔 상미가 손가락으로 명수의 가슴을 쿡쿡 찔렀지만, 명수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오로지 입으로만 상미를 공격했다. 본투비(Born to be) 공격수여서인지 말싸움으로도 지지 않으려 애쓰는 명수의 분투가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싸움에서 상미가 좀 더 우위를 차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단유도 말리지 않으니 두 사람의 설전은 오래 지속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새벽 고속도로를 마음졸이며 달렸던 터라 체력이 그리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전날 점심을 챙겨 먹은 이후로 먹은 게 없던 두 사람은 결국 체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니, 그제야 단유가 입을 열었다.
“끝났어?”
상미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끝났어! 그리고 너 뭐야!”
명수도 미간을 잔득 좁힌 채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 임마, 넌 친구가 싸우는 데 말리지도 않냐! 임마!”
“말릴 틈이라도 주고 그런 말을 해.”
“이 새끼가···.”
“나 있잖아. 솔직히 욕먹을 각오하고 말해도 돼?”
“뭐가?”
“나 지금 기분이 좋아.”
“뭐? 친구가 지금 파혼 위기에 처했는데, 기분이 좋아? 너 미쳤냐?”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아까까지는 별로 와 닿지 않았는데, 니들 보니까 진짜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드네.”
“뭐?”
단유의 대답에 상미와 명수가 얼이 빠진 표정이 되었다. 상미가 단유를 빤히 바라보다 명수를 보며 물었다.
“쟤, 이렇게 된 거 아냐?”
상미의 손가락이 관자놀이 옆에서 빙글빙글 돌아가자, 명수도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야, 너 미쳤냐?”
명수의 물음에 단유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멀쩡히 제정신이고, 진짜로, 거짓말 안 보태고 너희 보니까 너무 행복해서 좋아.”
“이거 미쳤네, 미쳤어.”
명수도 곧 상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도 단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진심으로 말하는데, 나한테 가족은 오로지 너희뿐이야. 진짜 가족. 평생 함께 할 사람들. 그래서, 기분이 좋아.”
진정성이 담긴 단유의 고백에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왜 ‘가족’이란 말을 쓰나 싶었지만, 상미는 문득 그게 지난 행방불명의 ‘키워드’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래서 단유가 쉽게 말을 하지 못했던 이유가 아닐까, 라고 짐작했다.
“야, 너 혹시···.”
눈치 없는 명수가 입을 열려 할 때, 상미가 먼저 명수의 발등을 콱 찧어 그의 입을 막아버릴 정도로 그 생각을 확신하게 된 것은, 단유의 눈에 담긴 그 복잡한 시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너희 파혼해도, 난 두 사람 모두 평생 함께 할 거니까 걱정마.”
상미가 명수의 옆구리를 찔렀고, 명수는 단유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