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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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유를 중심으로 술잔이 오가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네들끼리 웃고 즐기는 시간으로 변했다. 단유는 조용히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틈에 사울른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곳, 에강위에 가서 나쁜 대우를 받으신 건 아닌가 해서.”
에토신스의 사령관은 이곳에 대해 꽤 우호적이었고, 특히 단유와 가까웠던 사울른에게도 적당한 대우를 해주었기에 단유가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울른이 에토신스의 수도로 향했던 단유를 걱정했다.
“별일은 없었습니다.”
“사령관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머물 집을 받고 지위도 보장받았다며.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사령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기까지 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더군요.”
“사실이었어요, 그건.”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뭐가요?”
“그곳에 도착한 후, 간단한 소식 정도는 알려주지 않을까 했거든요.”
“그랬나요?”
“뭐, 저보다 에밀리아가 더 섭섭했을 겁니다만.”
두 사람이 시선을 돌리니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에밀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취했네요.”
“에밀리아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네요.”
“에밀리아가 마을을 위해 꽤 헌신적이었어요. 특히 토론회 등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요. 나이답지 않게 현명한 모습에 사람들이 다들 에밀리아를 좋게 보기 시작했죠.”
단유의 도움이 없잖아 있었지만, 에밀리아 본인도 꽤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이 마을 사람들에게 통한 것일 테다.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에밀리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사울른이 물었다.
“다시, 떠나실 겁니까?”
단유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밀리아가 많이 실망할 겁니다. 지금 그녀는 루치드가 완전히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전 돌아갈 곳이 있어요.”
“네. 그리고 그곳이 여기가 아니란 것을, 저나 에밀리아나 알고 있습니다. 알지만 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하진 않군요.”
사울른도 단유가 이곳에 머무르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단순히 그가 가진 힘에 의해 안전이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여느 현자 못지 않은 지식과 지혜는 마을의 발전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니까. 그러나 말했듯, 그가 머물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뭐해요?”
밝은 톤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호라엘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구경 잘 했어요?”
“네! 너무 신기한 거 있죠? 어떻게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냥 레버만 조작했는데 물이 콸콸 쏟아지는 광경이라니. 아마 돌아가서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믿지 못할 거에요. 게다가.”
호라엘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그렇게 밝을 줄은 몰랐어요. 아까는 정말 눈이 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지금은 저녁이 되어 어두워진 지하 공동의 천장을 가리켜 보이며 호들갑을 떠는 호라엘의 목소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음에 들면 여기서 살아도 됩니다. 빈집은 많거든요.”
애초 지하도시를 만들 때 넓게 만들기도 했었고, 마을에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도 많아 지금도 계속 굴을 넓히고 있는 중이기도 했기에 호라엘이 마음만 먹는다면 작은 집 하나를 주는 건 별 문제가 안되었다. 더구나 단유가 직접 데리고 온 손님인데, 특혜가 좀 더 주어진들 누구도 불만을 말하진 않을 테다.
사울른의 제안에 호라엘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안 되겠네요. 아마 좀 더 나이가 들고 제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없어지게 되면 올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때 부탁드려도 될까요?”
호라엘은 이곳에서 자신이 예언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도 단유가 데리고 왔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뿐, 특별히 그녀의 직업 따위를 묻지 않았고, 겉보기에도 아직 앳된 얼굴이라 에밀리아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넘겨짚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점점 유입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아마 나중에 오시면 머물 곳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길에서 노숙이라도 하죠, 뭐. 여기는 길에서 자더라도 춥거나 비 맞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노숙자 문제도 생길지 모르겠군요. 이거 마을 사람들이랑 의논을 해 봐야겠는데요?”
농담처럼 주고 받은 말이었지만, 사울른은 정말로 그 문제를 의논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문제를 인지하고 의논을 해놔야 혼란이 적을 테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같이 어울리지 않고 왜 여기 있어요?”
호라엘의 질문에 단유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무 생각이 많은 것 아니에요?”
“루치드는 원래 생각이 많았습니다.”
사울른의 대답에 호라엘이 고개를 쭉 내밀며 단유의 얼굴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지금은···그냥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두려워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시선을 피했던 단유가 호라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호라엘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없어도 다들 잘 살 테니까.”
“···그럴 겁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요.”
이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걱정하는 거라고 단유는 말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그리고 그 흐름을 좌우할 자신의 의지와 선택, 결정을 걱정하는 거지만, 그것은 입밖으로 낼 수 없는 고민이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빨리 이 해후를 털어내고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계속 이곳에 머무르며 이 사람들을 눈에 담을수록 이들에 대한 책임감, 이 세계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늦어버렸는지도.’
답을 하지 못하는 단유의 곤란함을 읽었는지, 호라엘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사울른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는 그쪽 집에서 묵을 수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에밀리아 바로 옆방에 빈방이 하나 있는데 거길 쓰시면 돼요.”
암묵적으로 빈방의 주인이었던 단유는 2층 사울른의 방에서 함께 묵기로 했다.
그날 밤. 사울른과 단유가 방에서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릴 듯 말 듯, 얌전한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은 대화를 멈췄다. 문밖에 서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울른이 일어나려는데, 단유가 말렸다.
“제가 나갈게요. 사울른은 쉬어요.”
사울른은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침대에 붙이며 앉았고, 단유가 문을 열었다. 역시나 그곳에는 얼굴을 붉힌 채로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던 에밀리아가 서 있었다.
“내려가서 이야기해요.”
에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에밀리아가 단유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에, 환영파티를 벌이는 동안 에밀리아가 단유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을 보였더라도 별로 흉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단유에게 가서 말을 붙여 보라며, 은근히 에밀리아를 부추겼던 이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일부러 단유 곁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환영회의 분위기가 원체 밝고 유쾌해서, 자신이 단유 곁에 서면 그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탓이었다. 처음 단유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겼을 때도 사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던 것을 많이 참았던 에밀리아였다.
그래서 이 시간을 기다렸다. 단둘이서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올 거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태 꾹 참으며 환영회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즐거운 척을 했었던 에밀리아였다.
그러나 막상 단유와 단둘이 있게 되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거실 가운데 놓인 탁자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 좀 마실래요?”
힘겹게 꺼낸 한 마디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단유는 차를 즐겼는데, 그것을 떠올린 에밀리아는 얼른 부엌으로 가서 보관해둔 찻잎을 꺼내 물을 끓이고 차를 내왔다. 단유가 즐겨 마시던 찻잎이었다.
거실에 차향이 은은히 퍼지니 어색했던 분위기도 물러가는 것 같았다.
“좋네요.”
“혹시 몰라서 계속 찻잎을 모으고 있었거든요.”
루치드가 좋아하던 허브만을 골라서. 단유는 에밀리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단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공부는 계속 하고 있어요?”
“네. 루치드가 준 책 가지고 계속 공부 중이에요.”
읽고 또 읽으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을 머릿속에 꼭꼭 담으려 애썼던 에밀리아다.
“생각하는 법,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절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부담스럽나요? 칭찬이?”
“조금은요.”
“사울른한테 듣기로는 굉장히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실 아직도 많이 모자란걸요. 다행히 마을 분들이 좋게 봐주시고 또 잘 들어 주셨기 때문인 거죠.”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하니까 들어주는 걸 거예요.”
바꿔 말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만 한다면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들이라도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것이다.
“루치드 덕분이에요.”
“에밀리아가 계속 노력하니까 가능한 일이에요.”
계속되는 칭찬에 에밀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이런 칭찬을 듣고 싶어서 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 한 것은 아닌데.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말을 꺼낸 후 에밀리아는 탁자 아래 놓여 있던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걸 물으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원래 하고 싶었던 말 대신 제일 묻기 싫었던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불상사에 에밀리아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오래는 못 있어요.”
“그럼 또 떠날 거예요?”
“예.”
“이번에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 거예요?”
“···글쎄요.”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꺼냈다간 램프의 흔들리는 불빛을 담은 저 눈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그녀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루치드.”
“에밀리아.”
단유가 먼저 입을 열어 에밀리아의 입을 막았다.
“부디, 행복하게 지내요.”
해줄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유가 본인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가 그녀에게 했던 약속은 유효하고, 그것은 다른 어떤 고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제였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그리고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
그러나 단유의 그 한 마디는 에밀리아를 슬프게 했다.
“···그럴게요.”
이전처럼 조를 수 없었다. 에밀리아도 이제는 그의 눈빛과 그의 말 속에 숨은 진심과 진실을 엿볼 만큼 자랐다. 그리고 그녀의 간절함이 그에게 곤혹스러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에, 에밀리아는 끝내 속을 털어놓지 않기로 했다. 먼 훗날, 어쩌면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이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때로는 자신의 욕심을 먼저 버려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웠기에 그녀는 진심을 드러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마워요.”
거기에 대해 단유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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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며칠간 마을에 머무르며 마을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조언을 해주거나 마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주며 지냈다. 그동안 호라엘은 에밀리아와 함께 지내며 마을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고, 에밀리아는 호라엘이 예언자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지만 그뿐이었다.
“전 지금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카르페디엠’을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에밀리아는 스스로 그것을 터득하고 살아가는 중이었다. 사실은 간절히 원하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꿀 수 없기에 현재에 집중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며 살 순 없는 법이니까.
‘어쩌면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 그런 의식이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닐까?’
라고 자문하게도 되지만, ‘원하는 것은 반드시 쟁취해야 돼’라고 되뇐들, 그것이 이 세계의 암묵적 규칙으로서 자리 잡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있어서도 안 되고.
만약 그런 규칙이 자리 잡게 되면 이 세계는 온통 분쟁과 갈등으로 가득 찰 것인데, 그건 단유가 결코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단유가 마지막 A/S의 차원에서 마을을 돌아본 뒤, 더이상 자신이 해줄 것이 없다고 판단이 들자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가나요?”
“네.”
올 때는 거창한 환영식을 벌였으나, 갈 때는 조용히 가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에게만 인사를 남긴 단유는 사울른과 에밀리아의 배웅을 받으며 호라엘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아 준 에밀리아에게 고마움을 담아 손을 흔들어 보이며.
호라엘도 피스토피 성으로 데려다 준 후, 단유는 피스토피 성의 호수를 눈에 담은 뒤,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단유가 다시 눈에 담은 것은 회색빛 하늘 아래 뿌옇게만 보이는 서울 시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