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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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늘어졌던 그림자가 짧아지고, 숲 속에 피어올랐던 안개가 걷혀도 단유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밤새 디애티티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으며 정리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큰 기복을 보이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수 년, 아니 수십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토록 거친 감정의 파도가 몰아치는 경험은 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디애티티의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그림자가 짧아졌다 다시 길어지기 시작할 때쯤 단유는 긴 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쳐들었다. 하늘, 구름, 그리고 푸른 숲과 산, 넓은 강과 마른 땅.
‘이 모든 게 내가 만들어낸 세계라고?’
가만히 서 있던 단유를 바라보다 가지 사이를 뛰어넘는 다람쥐와 이끼 낀 바위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도마뱀, 잎들을 헤치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작은 새와 잡풀 사이에서 가만히 눈치를 살피는 사마귀들이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니.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단유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몸을 움직였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휘둘릴 순 없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모습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디애티티가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듯, 단유도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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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산책길에 딴 허브를 우려낸 차를 마시며 쉬고 있던 호라엘은 갑작스런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깜짝이야!”
“···놀랬나요?”
“···네. 어쩐···, 아니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혹시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에요.”
“그럼···설마! 벌써 그걸 하실 수 있으신 건가요?”
“네.”
“우와, 그게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네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던가요?”
“네.”
“축하해요!”
박수를 치며 단유의 성취(?)를 축하하던 호라엘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그리고 굳어있는 단유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단유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사실 혼란스러웠다. 애써 추스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폭풍이 다시 살아나 속을 뒤집고 있었다.
‘창조의 능력도 없이 어떻게 세계를 만들었냐고? 세계는 만든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야. 자동차를 예로 들었지만, 영화 같은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기획사에 의해 미리 기획이 된 작품 같은 거지. 너는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규칙들에 의해 마련된 대본에 따라 하나의 작품을 완성 시켜 가는 거지.’
그리고 호라엘은 그 작품 속의 등장인물 쯤이 되겠다. 살아서 숨 쉬는 캐릭터. 물론 감독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변형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캐릭터이다. 호라엘 뿐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캐릭터이다. ‘능동적’이며 ‘주체적’이며 때로는 단유를 위협할 정도로 무섭고, 안타까울 정도로 불쌍하고, 섬찟할 정도로 뛰어난 캐릭터들이다.
“왜 그렇게 보세요?”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요?”
심지어는 단유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능가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들. 과연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까? 만약 알아낸다면 어떤 생각을 가질까?
단유는 자신이 지난밤 알아낸 충격적인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내가 당신을, 이 세계를 지금에 이르도록 한 존재래요. 놀랍지 않나요?
“···아직 그 생각은 변함이 없으신가요? 그, 지하 도시에 방문하고 싶다던.”
“아, 물론이죠. 가보고 싶어요. 갈 수 있나요?”
“네.”
“혹시 뭐라도 준비해야 하는 게 있나요? 오래 걸리나요? 만약 오래 걸리면 밖에 계신 분들한테 미리 언질을 줘야 할까요? 혹시 집을 오래 비우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거죠? 그것까지 부탁드려도 되는 거죠?”
에강위에서 겪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이 대륙의 역사와 과거를 궁금해했던 게 단순히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함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게 된 것은 네 공이 컸어. 너와 함께 이 세계의 진화를 담당했던 이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포기했거든. 그러니 지금 이곳은 오롯이 너에게 기대고 있는 실정이지.’
‘책임감을 느끼라고 하는 말인가요?’
‘아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야. 다만 너 같은 경우엔 너무 이쪽 세계와 밀착되는 바람에 자의식의 성장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좋았어. 너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이 세계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고, 그 미래를 위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기까지 했거든. 너무 직접적인 간섭은 문제가 되겠지만, 넌 그 경계선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적당한 수준으로 조율하기까지 했지. 그건 매우 훌륭했어. 다른 세계의 성장에 네 사례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봐.’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네.”
호라엘이 미소를 지은 채 단유를 바라보았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나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서로를 지켜보던 중 단유가 손을 내밀자, 호라엘은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렸다.
****
“루치드!”
단유의 등장을 눈치챈 한 마을 사람의 목소리가 마을을 흔들었다. 지상으로 나간 사람을 제외하고,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와 단유를 반겼다.
“어서 오시오! 언제, 어떻게 온 것이오?”
“루치드가 떠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부재를 아쉬워했다오.”
“식사는 하셨어요? 예전에는 여유가 없어 그런 생각도 못 했는데 그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다시 한번 루치드를 보게 되면 꼭 식사를 대접해서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어요.”
“루치드!”
“루치드!”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마치 연예인이라도 본 듯, 극진한 환대가 이어졌다. 이전에는 단유를 조금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난 탓일까? 단유를 무서운 사람으로 기억하기보다,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가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루치드!”
광장에서부터 소식을 듣고 뛰어온 한 여인의 목소리가 모두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들은 얼른 길을 터주었고, 그 길을 따라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오던 앳된 얼굴의 여자가 달려와 단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신발 하나가 벗겨져 나뒹굴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엉겁결에 그녀를 안은 단유는 조금 당황하긴 해도, 그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었기에 굳은 표정을 억지로 펴며 물었다.
“잘 지냈어요?”
눈시울을 붉혔던 에밀리아도, 꾹꾹 참으려 얼굴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들어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요?”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에밀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관없어요. 아무튼 돌아와서 기뻐요. 아, 혹시 사울른은 봤어요?”
“아니요. 어디 있는데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마을 바깥쪽에 심은 과수밭을 돌보고 있어요.”
“과수밭이요?”
지하 공동의 안쪽을 가리켜 보이며 에밀리아가 설명하길, 요즘은 공동 안에서도 작물을 심어 기를 수 있는지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실험하는 중이라고 했다. 예전에 내부에서 생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토론과정에서 나온 제안 중 하나로, 지하 공동 내에서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확보하여 안전을 보장하자는 뜻으로 추진 중인 프로젝트라는 설명이었다.
“근데, 에밀리아.”
“네?”
“일단 자리를 좀 옮겨서 이야기하죠?”
“아.”
어느새 두 사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위가 꽤 번잡했다. 사람들은 에밀리아의 반가움을 이해하기에 그녀의 수다를 꿋꿋이 들어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서 회포를 풀기엔 적당치 않아 보였다.
“광장으로 가요. 오랜만에 은인이 왔는데, 광장에서 잔치를 하는 게 어때요?”
역시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얼굴이라 단유는 가볍게 목례로 화답했다.
“피비 아주머니, 오랜만이네요.”
피비는 예의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단유의 팔을 툭툭 쳐 보인 뒤, 에밀리아를 잡아끌었다. 사울른을 데려와, 라고 일러주니 에밀리아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금방 데려올게요!”
그 모습을 보던 단유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전보다 밝아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니 심중의 짐을 더는 느낌이 든 까닭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당했었던 일들이 어쩐지 본인의 탓인 것만 같다는 생각에 미치며 표정은 급속히 굳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단유의 표정을 살피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애인이에요?”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밀려났던 호라엘이 단유의 뒤로 슬쩍 다가와 물었다.
“아니요.”
“예쁜데요?”
단유가 고개를 틀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예의 생글 웃는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이내 볼을 부풀리며 심술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는 완전히 잊혀진 거 같아요?”
“자리를 옮긴 뒤 소개할게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냥 부러워서 심술부렸던 거예요.”
“부러워요?”
“전 그럴 수 없으니까요.”
존경과 경외를 받는 호라엘, 하지만 격의 없이 마을 사람들과 웃으며 지내지는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단유는 더욱 가슴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의 슬픔, 아픔, 외로움, 괴로움이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내 인생을 살아야 돼, 내 인생을 살 거야’라고 다짐하며 지난 밤 내내 누적됐던 혼돈을 떨쳐내느라 애썼는데, 사소한 말 한마디,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가 단유를 후벼 파며 무시하려 했던 진실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
사울른은 단유를 보고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역시 그는 천상 군인이라는 듯,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하고 절도있게 인사를 했다.
“오셨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사울른 외에도 바이언, 스토보 등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연을 맺었던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사울른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이도 있었고, 바이언처럼 호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이도 있었다. 가슴 한편에 저릿하게 남아있는 진실을 애써 무시하며, 단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려 노력했다.
피비와 그 외 몇 사람들의 노력이 더해져 금방 마을 잔치가 마련되었다. 곧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와도 같은 잔치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마을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돌아와 단유와 인사를 나눴고, 어린 아이들도 단유의 주위를 돌며 조금이라도 틈을 내서 그와 말을 섞어보려 했다.
술과 음식들이 속속 도착해 잔치의 흥이 올랐고, 그 와중에 단유는 함께 온 호라엘을 몇몇 사람에게 소개했다.
“반가워요!”
들뜬 에밀리아가 호라엘을 반겼고, 호라엘은 그녀의 인사에 고마워했다.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걸 보니 좋네요.”
“다 루치드 덕분이죠.”
사울른이 술잔을 기울이며 답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모두 노력한 덕분이겠죠. 저는 별로 한 게 없는 걸요.”
바이언이 든 술잔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왜 한 게 없는가? 저 하늘을 봐. 이 마을을 봐. 자네 없이 이런 곳이 가능이나 했겠는가?”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이 공동체가 평화와 화합을 이뤄냈다는 점이죠. 그리고 그건 모두 여러분들 스스로가 해낸 거예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소.”
스토보 역시 잔을 밀어 건배를 제의했다.
“사람이 많이 늘었네.”
“그렇네요.”
“자네가 떠난 후, 확실히 많은 변화가 있었지. 우리 마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도 있었고. 특히 교국에 점령당했던 곳에서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 많아.”
편입된 사람들과 기존의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뻔도 했지만, 이미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던 마을은 토론회나 분쟁 조정 위원회와 같은 자생 조직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그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이를 더 발전시켜 마을 전체의 안정과 발전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 또한 자네의 힘이 컸다고 난 보네.”
“그때 일은 제가 조금 지나쳤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아닐세. 결과적으로는 다 잘됐지 않은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잘 극복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자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렇지?”
“그렇죠.”
“그리고 여기 사울른이 참 고생했어.”
“제가 뭘요.”
“이 사람, 자네 몫까지 하겠다며 더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어. 자기가 잘해야 자네를 욕하는 이가 없을 거라고 말이야. 나 참. 이 마을에서 루치드를 욕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다고. 막말로 루치드 자네가 또 한 번 이 마을 입구를 막는다고 해도, 자네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을 걸세.”
“그럴 리가요.”
“그치? 농담이었어. 그러니 혹시라도 기분 나쁘다고 저길 막고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단유는 껄껄 웃는 바이언과 잔을 맞추고 싱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