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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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싶어 디애티티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디애티티가 손을 내저었다.
“아, 오해는 마. 아직 온전한 창조의 권능을 얻지 못한 네가 이걸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오해할 말을 마시고, 정확히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지구의 문명에서 예로 들면,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하나의 제품을 생산하는데 더 많은 인력이 소요되는 건 기본이야, 그치? 자동차를 보면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만든다고 할 수 있잖아? 그 경우에 디자인을 맡은 사람도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고, 엔진제작 공정에 참여한 엔지니어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말하자면, 이 세계를 만드는데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그중 하나가 저란 이야기죠?”
“그렇지.”
“···저도 모르게 말이죠.”
디애티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렇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 그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진짜 실존하는 세계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거죠?”
하나에서 시작된 세계는 어느새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더구나 세계는 한 명의 신이 여러 세계를 한꺼번에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획기적인 시스템 도입이 필요한 때. 여기서 지성체의 가능성을 빌리기로 했다. 모든 지성체에게 그들만의 세계를 부여하고, 그 세계의 관리를 맡겨 가장 효율적인 관리 능력을 보이는 이에게 디애티티로서 승진, 아니 승화(昇華)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지성체의 수준에 따라 세계의 발전이나 진화의 방향이 달라지곤 했지. 어떤 세계는 새로운 생명체를 낳기도 전에 멸망해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 하지만 어떤 세계는 높은 수준의 문명과 지성체를 재탄생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했으니, 결국 우주 전체로 보면 꽤 효과적인 시스템임은 틀림없어.”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지는 이야기라 단유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후, 입을 열었다.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이야기네요.”
“그렇지? 나도 솔직히 난감해. 원래 이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설명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세워 올리며 손 부채질 하는 시늉을 해 보이는 디애티티였다.
“어쨌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하나의 세계를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맡게 돼. 세계의 시작은 태초에서부터고. 그리고 그 세계를 맡은 지성체의 지성과 능력이 발달하는 속도에 맞춰 세계의 발전도 좌우되지. 그래서 보통 상위 세계와 하위 세계 간에는 시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거야. 하위 세계를 맡은 인간의 능력과 지성이 좋을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는 법이고. 이 부분은 경험해 봐서 알 거야. 그리고··· 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은 너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 함께 참여 하기에 다양한 요소들이 개별적이며 개성적으로 작용하지.”
어때, 놀랍지, 라고 묻는 디애티티의 말을 흘려들으며 단유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을 요약하면, 웬 절대자라는 존재가 이유는 몰라도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장되어가는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다른 존재의 도움을 빌었다는 이야기였다. 도움의 방식은 철저히 무보수 도급 형태인데다, 우습게도 청부인은 하도급자의 의사를 전혀 묻지도 않는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맡겨 놓은 뒤 나 몰라라 하다가 더러 능력 좋은 하도급자가 발견되면 접근해서 승진(?) 시켜 주고 부려먹는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맞나요?”
“과격한 표현이지만 비슷해.”
“그래서, 제 가족은요?”
“그래, 이제 그 이야기를 해야겠어. 사실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지만, 하도급자가, 아니, 그게 아니고···그러니까 하위 세계를 담당하는 상위 세계의 존재가 하위 세계로 가서 생활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 왜냐하면 두 세계는 철저히 분리된 세계이며 물리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니까. 그런데 너의 경우엔 예외적으로 그 접근에 성공한 거야. 다시 말해, 넌 이곳 세계의 사람이 아닌 거지.”
“그 말은?”
“네가 이곳에서 본 부모라는 사람들은 사실 너의 부모가 아니었단 말씀. 너의 진짜 부모, 진짜 가족은 이곳이 아닌 지구에 있다는 말씀.”
너무나도 충격적인 진실이라 단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구보다 오히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단유였다. 단유라는 이름보다 ‘루치드’란 이름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법사로서의 능력을 얻었고, 많은 은인과 연을 맺었고, 많은 적들과 싸웠다. 경험으로서 실존하는 과거들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거짓이라니? 여기 사람들도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야. 물론 무의식적으로 너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막말로, 난 당신이 말한 책임감 따위는 느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이 세계가 지금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래서 제 진짜 가족은 어디 있다는 거죠?”
돌이켜보면 험난한 과거와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며 살아오는 중에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지난 날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의 시작은 결국 빈촌, 그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그리고 이웃들과 맺었던 관계들이 모두 허구였다고?
가슴 속에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는 걸 억지로 참아내며 물었더니, 디애티티가 답했다.
“그건···.”
****
날이 밝았다. 넓은 숲 위로 아침 햇살과 함께 이슬을 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불어와 단유의 옷깃을 흔들고 지나갔다. 지난 밤의 소란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그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잠에서 깨어난 모든 생명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아침을 알렸다. 그들에겐 세계의 운명이라든가, 우주의 비밀이라든가, 재하청의 비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또 하루를 힘내어 살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비록 마법이란 힘을 얻었지만, 단유는 그 힘을 사용하여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었던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어느 히어로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불복하여 분노로 가슴을 채운 채로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세계에 떨어져 모험을 하며 두근거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부당한 현실에 맞서 투쟁을 벌이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냥 남들처럼, 하루를 충실하게 살며, 그날의 행복을 내일도 꿈꾸는, 그 정도의 삶을 희망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과연 모르고 살았을 때가 차라리 행복했다. 이딴 세계에 어떻게 왔는지 알게 뭔가. 이제 와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이 이런 처지에 처하게 된 게 누구 탓이라고 한들, 그 대상에게 복수를 하거나 보상을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무책임하게도, 모든 일은 그냥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선택이었어.”
지구인, 이라고 부르는 지성체, 즉 인간들 중에서 단유가 ‘선택’되었고, 단유의 의사는 전혀 존중받지 못한 채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왜 너냐고 물어도, 대답해 줄 말은 없어.”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누구는 잘 사는 부모의 집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산동네 판자촌에서 태어나는 게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서 벌어지는 일인가? 과연 누가 미혼모의 손에서 태어나 베이비박스에 맡겨질 운명을 선택했겠는가?
누가 인종을 선택하여 태어나며, 누가 나라를 선택하여 태어나는가? 갓 태어난 지성체에게 그것은 그냥 주어진 것일 뿐.
“그것도 일종의 규칙이지.”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태어난 이들이 다스리는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쇠퇴하는지를 관찰하는 것. 관찰자는 그것을 기억하여 더 나은 세계의 발전에 이용할 뿐이다.
“모두가 삶의 목적이 없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모두에게 목적이 주어져 있어. 바로 자신의 세계를 바르게 키워가는 것.”
동이 트는 하늘을 게슴츠레 바라보며 디애티티는 말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이를 깨달은 현인들이 세계를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정신의 고양을 외쳤지.”
온전한 세계를 키워내는 것은 인간의 삶의 목적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한 차원 높은 존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차원이 오르고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존재의 불완전성을 벗어던질 수 있게 돼. 또 그가 맡은 세계 역시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되고.”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단유는 그저 불편하고 불쾌할 뿐이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언뜻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단 하나의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누구의 희망도 아닌 자기 자신의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존재가 세운 규칙에 끌려가야만 한다는데, 단유는 내키지가 않았다.
“그것도 좋은 반응이야. 싫어? 싫으면 네가 좋아하는 규칙을 세워. 절대자? 절대자는 독재자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독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돼. 절대자는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 해도 막지 않으니까. 절대자의 위치에 선 후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네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을 만들고 세계를 만들어. 그러면 되잖아?”
“지금껏 제가 가진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한 명도 없진 않았겠죠?”
“···그렇지.”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겠죠?”
“노코멘트.”
단유는 또 다른 비밀을 하나 알았다.
“절대자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군요.”
디애티티가 웃었다.
빌어먹을.
설명은 번지르르하게 시작되었다. 절대자. 유일한 존재. 그러나 아무도 그를 완벽한 존재라 칭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치기 위해 창조의 권능을 사용했다. 창조의 권능으로 빈틈을 메우려 했고, 그것이 곧 세계의 시작. 그러나 그 세계마저도 불완전하니, 결국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리라.
“누군가에겐 비극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지.”
햇빛이 밝아질수록 점점 흐릿해지던 디애티티는 해에게서 눈을 돌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파란 하늘을 닮아있었다.
“난 너를 보며 꽤 즐거웠어. 너의 비극은, 그래. 너에겐 슬픔이었겠지만, 그런 슬픔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너를 보며 난 즐거웠어.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줘. 너의 슬픔과 고통마저 즐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밤새 놓여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모두 사라졌다. 마주 선 두 사람. 디애티티는 손을 뻗어 단유의 어깨를 짚었다. 단유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난 네가 훌륭한 디애티티의 후보가 될 거라는 직감을 받았어. 안타깝게도 현실의 넌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었지만, 거기서 널 도울 방법은 많지 않았어. 최소한의 각성은 필요했거든. 난 네가 각성하는 순간을 기다려 널 돕겠다고 다짐했고, 넌 내 생각보다 빠르게 각성을 했지. 난 다양한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널 도왔어.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어깨를 짚은 디애티티의 손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사실 넌 내가 말하기 전에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 어렴풋이 깨달았을 거야.”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단유는 분명 이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네가 가진 힘이 이 세계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본능적으로 그 힘을 조절하기 시작한 거지. 그게 바로 ‘균형자’로서의 시작이야. 이제는 내가 너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그리고 너도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이기에 이렇게 알려주는 거야. 물론 극히 일부분인 진실이지만.”
천천히 손을 뗀 디애티티가 한발 물러섰다.
“강요하진 않을 거야. 이제부턴 너의 선택이 될 테니까. 균형자에서 조율자로, 디애티티로, 그리고 더 높은 존재로 승화할 것인지는 너의 선택에 달렸어. 그리고 그때마다 넌 더 많은 진실과 마주하게 될 테고.”
디애티티가 멀찍이 물러서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넓은 강이 흐르는 곳까지 물러섰다. 그러나 강에 빠지진 않고 그저 그 위를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까지 잘 자라줘서 고마워.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어. 이제는 네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거야.”
“잠시만요. 마지막이라면, 저도 하나만 더 물을게요.”
“뭔데?”
“저를 통해서 당신은 무슨 이득을 얻었죠?”
“헉.”
그는 과장되게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보였다가 금방 웃음을 지었다.
“뻔히 짐작할 이야기를 묻다니. 아마도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지금껏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으니 이번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이득? 말했듯이, 우리는 다양한 복제 세계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 세계가 더 완벽해지기를 희망하지. 그리고 그렇게 완벽해질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찾는 거고. 네가 자라고 성장하는 방식은 내가 관리하는 세계가 더욱 완벽해질 수 있는 힌트가 되었어. 이제 내 세계에서 네 방식, 네가 선택한 방식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거지. 그게 내가 너를 통해 얻은 이득이야.”
잠깐 진지했던 그는 다시 과장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안녕.”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