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51화 (751/956)

귀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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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닮은 호수를 곁에 둔 성에 밤이 찾아왔다. 일터로 나갔던 이들은 이미 집으로 들어와 식사를 마쳤고, 부지런한 몇몇은 다음 날을 위해 이미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더러 몇몇은 성 내 유일한 주점에 모여 맛은 없지만 목은 축일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할 만한 술로 건배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또 몇몇은 호롱불을 곁에 피워두고 조잡하게 만들어진 주사위로 동전 몇 닢이 오가는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험난한 길을 선택했던 구도자들은 별빛에 담긴 신비를 감상하다 쌀쌀해진 날씨를 이기지 못해 한둘씩 자리를 떠났고, 그렇게 텅 빈 자리에는 길들지 않은 짐승들이 슬그머니 찾아와 먹을 것이 없는지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머물다가 떠났다.

사람이 내는 소음들이 잦아들고 대신 밤눈 밝은 짐승들이 내는 다양한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릴 때, 거실에서 천을 기우며 옷을 수선하던 호라엘은 얕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손에 붙들고 있던 옷을 천천히 개어 제자리에 돌려놓고 침실로 들어간 호라엘은 머리를 한 번 정리하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심란한 까닭은,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비록 그녀는 잘난 듯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떠들었지만 실상은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그가 이 마을에 오기 며칠 전까지, 그녀는 이제껏 겪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미래를 보았다. 마치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화려한 만찬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때를 가리지 않고 몰아치듯이 밀려드는 미래의 광경에 혼돈이 찾아올 정도였다.

잠에서 깨자마자 어느 특정한 순간의 미래를 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가, 아침을 먹던 중에 또 미래의 어느 순간을 겪으며 몸서리를 치다 보니 어느새 식탁에서 빵을 든 채로 정신을 잃었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미래와 현재를 넘나드는 스펙타클한 경험은 이전에도 종종 겪었지만, 이렇게 빈번하게 오가면서 어느 것이 진짜고 현실인지를 헷갈릴 정도였던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성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미래를 보는 빈도가 줄었다. 그녀는 그를 만나야 한다는 직감을 했고, 그를 불러 대면했다. 그녀가 보았던 그는 단지 마법사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겪는 일들과 그가 취하는 행동들로 인해 신비로웠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유형의 사람이었다.

냉정하고 이지적이지만,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잔인했다. 도덕적이며 바른 모습만을 보여주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너무 차가워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솔직히 그를 처음 만날 때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컸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실제로도 그녀가 봤던 어떤 광경에서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한 손속을 보이던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도,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며 바라봐야 했던 장면들이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에 관해 많은 것들을 봤던 그녀지만, 그래서 그가 더 두려웠다. 한 인간에 대해, 정확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생활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녀가 보는 것들은 그에 관한 극히 일부분의 모습들일 뿐이니, 그녀가 보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그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비슷한 이유로 그녀는 그녀 주위에서 그녀를 돕는 구도자들, 혹은 추종자들에 대해 100% 신뢰하지 못한다. 그녀가 보는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여러 가지 모습 중 극히 일부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녀라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 어쩌면 저 중 어떤 이는 이곳에 오기 전 끔찍한 죄를 짓고 처벌을 피해 도망쳐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가 봤던 미래 중 하나는 한 남자가 처형대에 올라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참수당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그 남자는 현재 그녀 주위를 맴도는 추종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이미 죄를 지었는지, 혹은 이후에 죄를 지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를 일부러 멀리하거나 차별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그런 이유로 그를 만날 때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기대되었다. 실제로 그가 지하도시를 건설하는 모습과 많은 사람들이 표하는 존경과 경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며, 그와의 만남을 기대했고 그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 관해 본 미래는 더 큰 것이었고, 그 속에서 그녀의 역할은 제한적이나마 존재했기에 그녀는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이 그녀가 이 성에서 태어나 미래를 보며 살아온 이유였다.

그녀를 만나러 온 구도자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난 내가 왜 사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삶의 이유를 찾아 헤매는 이는 상당히 많았다. 그저 배고플 때 배를 채우고, 졸릴 때 잠을 청하는 행동으로 삶을 규정할 순 없는 법이니까. 자신이 왜 살아있고, 살아있어야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자신이 엿본 미래의 어느 순간을 토대로 작은 힌트를 제공했다.

“어떤 남자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훌륭한 영웅이길 바라고 있어요.”

“굶주린 배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한 소녀는 따뜻한 손길을 기다려요.”

“커다란 전쟁에서 많은 친구들을 잃은 한 남자는 영웅을 기다려요.”

직접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모호한 표현을 섞은 미래의 한 모습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미래지향적 목표를 설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더러 당사자의 미래를 본 경우에는, 해당 미래를 직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들이 현재 겪는 방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특별한 목적지 없이 방랑중이었으나 방황하는 것은 아니었고, 드러낼 수 있는 목표는 없으나 굽힐 수 없는 신념과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그에게 해준 이야기는 그의 방랑을 끝낼 수 있게, 혹은 그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돕지 않았다. 그건 그저 정해진 미래였고, 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게끔 정해진 길이었다.

그에 관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와중에 드문드문 의식이 흐려지고 종국엔 잠인 든 호라엘. 그리고 그 시간.

성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산 중턱에서 단유는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야행성 조류의 울음소리만이 전부인 곳에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 채 감상에 빠져들었다.

결국 호라엘의 예언대로 단유는 예전의 그 마법을 되찾았다. 전에는 어떻게 가능했던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용했던 ‘이동’ 마법은 새로운 지식의 습득과 함께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단유는 이 세계의 비밀 하나를 깨우쳤다.

그것은 창세의 비밀이기도 했다.

수많은 선택과 선택의 결과로 삶이 결정되듯, 우주 또한 수많은 선택과 그 결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어쩌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현대 지구의 과학에서 여러 차례 증명되기도 했던 그것은 소위 ‘기적의 확률’이라는 이름으로 우주의 생성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 중 하나였다.

‘기적의 확률’은 ‘우연’이라는 말로 치환된다. 우연한 우주의 시작. 우연한 우주의 확장. 그리고 우연히 배치된 우주 내의 항성들. 은하계. 심우주와 외우주. 몇몇 과학자들이 내세우는, 이론적이지만 증명되지 않은 다중 우주에 관한 것들. 그 외에도 수많은 이론과 가설들이 ‘우연’과 ‘확률’의 비정형적 선택에 따라 우주를 구성한다.

그 속에 지구와 같은 환경이 발생하고, 이 세계와 같은 또 다른 문명이 태어난다. 인간이 태어나고, 동물이 진화한다.

그 모든 것들이 ‘선택’의 결과라고 한다면, 물음은 하나. 누구의 선택인가?

지구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질문이 여기서라고 명쾌하게 풀릴리 없다. 하지만, 지구에서 그랬듯 여기서도 그 답을 단호하게 정의하는 무리가 있다.

그 무리들, 혹은 단체, 혹은 국가인 그들은 말한다.

‘신의 선택.’

논리와 이성, 과학과 메커니즘을 우선하는 단유로서는 쉽게 수긍하기 힘든 답이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초현실적, 초과학적인 능력을 소유한 단유기에 그 답을 배척할 수도 없었다.

물론 종교가 내세우듯 특정 형태, 혹은 특정 교리를 강조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법이 그러하듯, 보편적 인간들의 지성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오롯이 절대적이면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감히 ‘불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 때문에 두루마리 속 내용을 받아들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만약 두루마리를 보기 전, 호라엘과의 대화가 없었다면, 그 대화에서 연상되는 사고과정이 없었다면 단유는 지금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다.

결과적으로 단유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했고, ‘신의 선택’을 받아들였으며, 나아가 선택의 결과로서 ‘우주’를 받아들였다.

‘이제 갈 수 있다.’

단유는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지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는 건 단지 호라엘의 예언 때문이 아니었다.

단유는 호수에서 시선을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막힌 곳 없이 탁 트인 반대편 시야에는 넓은 숲과 숲을 가로지르는 강이 보였다. 과연 호라엘은 자신이 보았던 이 광경이 고작 자신이 살던 피스토피 성으로부터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란 걸 알고 있었을까? 태어나 한 번도 성을 벗어난 적 없다던 그녀였기에 모를 수도 있을 테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를 이곳에 데리고 와 보여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나아가,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그녀와 함께 지하도시에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유가 저 강의 어느 지점으로 이동했던 것이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 마냥 설명했었다. 하지만 지금 단유는 저기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어쩌면, 여기 오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이유인데, 그녀의 예언 때문에 알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정을 따져보면, 그녀가 말한 것처럼 모든 선택의 누적으로 정해진 미래는 바뀌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유는 다시 마법을 사용하여 ‘이동’했다. 다시 단유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강 주변의 한 언덕 위. 한 발만 더 내딛으면 곧 강에 빠질 수도 있을 아슬아슬한 위치에 모습을 드러낸 단유는 강의 건너편 어두운 숲속을 바라보았다.

“크르릉.”

숲이 흔들렸다. 바로 앞에서 콧김을 내뿜는 것 같은 역한 공기가 강 위를 지나 단유에게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지면의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의 울림과 함께 숲이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커다란 덩치를 지닌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눈동자에 붉은 갈기를 지닌 몬스터. 뭐라고 불리는지 모르지만, 언뜻 지구의 불곰을 연상시키는 형태에 머리에는 숫사자의 것처럼 커다란 갈기를 드러내고 위로 들쳐진 축축한 코가 연신 들썩이며 냄새를 맡는 듯했다. 좁지 않은 강 위로 짓쳐 드는 강바람에도 불구하고 단유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정확하게 바라보는 몬스터의 붉은 눈동자가 단유 주변을 훑어내렸다. 혹시 모를 위험요소가 없는지 경계하는 그 모습에 단유는 저 몬스터가 본능적인 수준 이상의 지성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유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단유가 본 저 몬스터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단유가 등지고 있는 숲의 안쪽에는 다름 아닌 타리슬과 마스토가 있었다. 바로 전날 야반도주를 선택했던 두 사람이 향한 곳이 이곳이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었다. 마스토는 교국으로부터 좀 더 멀리 떨어지고 싶었을 것이고, 마침 이 숲속은 굉장히 넓어서 혹시 모를 추적자들로부터 숨기에도 적당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추측건대 이단심문관으로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리라 짐작되는 마스토였으니, 이런 지형을 지나는 것이 유용하리란 판단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타리슬과 함께 하루 만에 이곳까지 온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도 이 숲속 어딘가에 저런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저 큰 덩치가 움직이는데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가까이 있었기에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뜨거운 콧바람을 느낄 수 있었지, 인식하지 못한 채였다면 몬스터로부터 도망가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두 사람은 이 몬스터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저 몬스터는 이 강을 건널 수 없을 테니까.

단순한 동정심만으로 선택한 일은 아니었다. 이건 그가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비록 거절했던 두루마리였을지언정, 단유는 그 두루마리를 통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이것은 마스토에게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스토가 단유에게 두루마리를 내어줄 때, ‘부탁’한다고 했던 사정에 지금의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을 테지만, 단유는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지금 단유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였다.

이 역시, 오래전부터 ‘예언’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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