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50화 (750/956)

시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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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대답에 호라엘은 비음이 섞인 한숨을 짧게 뱉고는 돌아섰다.

“어쨌든 제가 드릴 이야기는 그게 다였어요.”

닫혀 있던 창의 덧문이 하나씩 열리고 따뜻한 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무거웠던 공기를 밀어냈다. 현관문을 열자 초조해하며 기다리던 추종자들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호라엘을 바라보았고 호라엘은 그들에게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네요.”

호라엘이 나간 후, 집 안에 홀로 남은 단유는 펼쳐진 두루마리로 시선을 옮겼다.

“후.”

긴 숨을 토해낸 단유는 머리를 쳐들었다.

도킨즈는 ‘누적선택의 결과’라는 말로 진화론을 설명했다. 전체론적인 시각의 도킨즈식 진화론은 비단 생물학적인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이어진 생물의 진화는 물론이고 인간이 이룩한 문명과 역사에 관한 근본적인 시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삶은 선택의 연속, 이라는 철학적 명제 역시 전체론적인 시각에서 발견된다. 이 명제는 특히 동양적 사고관에 익숙한 이들에게 유효하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격언도 유사한 발상에서 출발한다.

이런 방식의 발상과 사고에 대해, 단유는 딱히 반론을 펼칠 생각이 없었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하는 부분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쉽게 수긍하며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어떤 선택이 이끄는 결과에 대해, 단선적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령 수학에 비교하면, 삶은 수많은 다항식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다항식인 데다, 복합 연산과 가변성을 내재한 변수들의 실시간 변화는 답을 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여기서 삶과 수학의 차이가 존재한다. 둘 다 어떤 답이 나올지 모른다는 건 같지만, 삶은 수학과 달리 희망하는 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 꿈은···.”

“내 목표는···.”

삶은 희망하는 답을 정해놓고 앞에 놓인 문제를 숙제 풀 듯 풀어나간다. 물론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일 테다. 왜냐하면 문제를 통제하기 위한 변수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태어난 환경이란 변수, 부모라는 변수, 친구라는 변수, 그 외 경제적·문화적·사회적 수많은 변수들이 문제에 작용하여 복잡하게 얽히니 쉽게 답을 끌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복잡하고 어렵다고 해서 문제 풀기를 포기할 순 없는 법이니, 정통한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복잡한 수식을 대할 때, 변수를 통제하여 문제를 간략하게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듯, 삶이란 문제에 있어서도 가능한 변수들을 통제하여 처리해야 할 문제를 간소하게 바꾸려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변수를 통제하는 행위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선택은 변수들을 제어하게 만들고 원하는 결과가 이어지도록 하는 것, 이 단유가 생각하는 삶의 통제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어떤 선택이 어떤 값을 도출하게 될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점일 테다. 모두가 긍정적인 값을 예상하고 선택을 하지만, 실제로 기대했던 값이 나오지 않는 건 그 선택 하나에도 수많은 변수와 연산이 끼어들어 있는 탓이다.

때때로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변수가 실제로는 밀접한 관련을 지녀 자신의 계산에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사실 너무나 많다.

정당 내의 복잡한 정치적 계산으로 추천된 교육감이 대입 입시 정책을 바꿔 학생들의 미래를 바꾸게 되는 일은 한국에서 빈번하게 있었던 사례다. 어느 나라의 가뭄이 야기한 경제적 변화가 미국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전 세계적 경제 위기를 부르며, 이로 인해 몇 년간 어렵게 모았던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보고 좌절하게 되는 일은 그리 흔치는 않아도 없진 않은 이야기일 테다.

이런 경우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과 통제는 별로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지도 않다. 어떤 입시 정책의 변화가 있더라도 유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평소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면 된다. 어떤 손실을 보게 될지 모르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분산투자를 한다거나 혹은 아예 주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재테크를 한다거나 하는 선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이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격언대로 나무가 아닌 숲을,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비록 삶이 희망하는 답을 두고 그 답이 나오도록 문제를 조정, 조율하는 방식이라지만,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시간의 영향을 받는 답을 미리 구할 수 없는 법이니 ‘전체’를 온전히 본다는 것은 사실 일반인에겐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더욱 ‘선택’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 하나의 오류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잘못된 계산을 하게 만들고, 잘못된 계산은 잘못된 값을 도출하게 만드니까.

그런데 호라엘은 다르다. 그녀는 원하는 값을 유도하지 않는다. 그녀는, 본인 말로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나, 단유가 보기엔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증명하는 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물론 증명의 방식도 어떤 방정식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가 되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일반인들의 다항풀이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에 접근한다. 그러니 그녀의 선택 역시 일반인의 선택과 다르다.

그리고 단유는, 비록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넓은 면을 고려하여, 더 빠르게 계산할 수 있다고 해도, 일반인의 범주이기에 그녀와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의미가 없는 선택이라고?’

그 어떤 선택도, 그 어떤 변수도 의미가 없는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소한 변수가 계산의 오류를 만든다. 그리고 단유는 그런 오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진실됨을 추구해야만 하는 마법사로서, 말 한마디도 신중해야 할 단유는 사소한 언행에도 늘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신중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꽤 낯설고 난감하다.

선택은 두 가지. 그녀가 한 제안대로 따르는 것과 무시하는 것. 타인의 조언을 무시한 적은 없지만, 다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따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펼쳐진 두루마리의 내용을 보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도 껄끄럽다. 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것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한 결과값을 기대할 수도 없으니까.

‘솔직히 답은 나와 있잖아.’

이렇게 길게 생각할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처음 이 세계로 오면서 분노했던 그 상황과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 까닭이었다. 다만 그때는 불특정한 대상을 향해 분노를 드러냈다면, 지금은 대상은 특정되어 있지만 그 대상에게 분노를 토할 수 없다는 것이 다를 뿐.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단유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앞에는 호라엘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고 있었고, 덧문을 반쯤 내려 닫은 창가에는 촛불이 흔들리며 빛나고 있었다. 바깥은 어두웠고, 선선한 저녁 공기가 단유를 감싸고 지나갔다.

“대단하네요.”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었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집중력 말이에요. 루치드를 보니 다른 사람들이 날 그렇게 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 제가 미래를 볼 때 말이죠. 조금 전 루치드가 그랬던 것처럼 불러도 듣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거든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돼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걱정을 많이 해주죠. 제가 미래를 보고 있을 때 누가 해코지를 하면 꼼짝없이 당해야 하니까. 제 입장에서는 솔직히 그렇게 위험할까, 싶은 의문도 있었는데 루치드를 보니 알겠네요.”

엄격하게 따지자면 단유는 그녀와 달리 집중을 하더라도 외부에 무방비인 것은 아니었다. 외부의 위험에 대해서는 본능적이라 할 만큼 민감하게 반응하는 단유였기에, 실제로 위협이 있었다면 아무리 정신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곧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단유는 대신 호라엘에게 사과를 했다.

“제가 너무 오래 있었나 보군요. 저 때문에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뇨, 아뇨. 별로 불편할 일은 없었어요. 오후에 화단을 가꾸느라 계속 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배고프진 않으세요? 꽤 오랫동안 식사도 하지 않고 계셨는데?”

“허기가 느껴지진 않네요.”

“그래도 뭐 좀 드릴까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괜찮아요. 그보단 빨리 일어나야 할 것 같군요. 저 때문에 밖에 계신 분들 심기가 꽤 불편한 것 같으니.”

호라엘 때문인지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진 않고 있었으나, 의식하니 꽤나 불편한, 아니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는 추종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충분히 보셨어요?”

“···네.”

“부디 도움이 되었길 바랄게요.”

“네.”

호라엘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니, 무리 속에 섞여 있던 테로스가 사람들을 밀치고 나와 단유에게 말을 붙였다.

“끝났는가?”

“네.”

“만약 시간을 더 끌었다면 아마도 저 중의 반 이상은 억지로 집 안으로 들어가 자넬 끌어냈을걸? 어쩌면 호라엘도 못 말렸을 거야.”

“다행이네요.”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자넬 대단하다고 여겼네.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도대체 뭘 보고 있었길래 앉은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있었던 거지? 난 자네가 무슨 석화 마법에라도 걸린 줄 알았네.”

“석화 마법이요?”

“거, 돌로 변하는 마법 있잖은가? 이야기책에 나오는. 너무 유치했나?”

“아니요. 그런 마법도 있나 궁금해서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이야기 속에는 별의 별 마법들이 다 나오지 않나?”

말을 건네며 분위기를 풀어내 보려는 의도가 보였다. 그때 호라엘이 테로스에 관해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단유는 그를 슬쩍 바라보았지만, 그 일을 알고 있었던지 물어보진 않았다.

“왜 그러나?”

“아뇨.”

“뭐지?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테로스. 테로스는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흐를지 궁금하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이 성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거지.”

“혹시 이 성을 나가 세상을 돌아보며 찾아볼 생각은 안 했나요?”

“왜 안 했겠어. 그런데 이미 오랫동안 떠돌다 머무른 참이니, 딱히 바깥 세상에 미련이 있진 않아. 언젠가는 다시 나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왜? 같이 나가자고?”

“아니, 그런 말은 아니지만···제가 나갈 것 같나요?”

“호라엘이 그러던걸? 자네는 곧 이곳을 떠날 거라고. 그러니 우리들 보고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될 거라고.”

이런 식으로 자신의 여정이 결정되니, 또 어색함이 느껴진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다시 돌아가 그녀에게 과연 이것이 자신의 운명인지, 만약 그렇다면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인지 물어봐야 할까 싶었다. 물론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그가 곧 이 마을을 떠날 것도 사실이었다.

“언제 떠날 셈인가?”

“내일이라도 떠날 참입니다.”

“그런가? 아쉽군. 그동안 늘 보던 사람들과만 이야기를 나누다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니 꽤 신선하고 좋았는데 말이야.”

“전 재미없는 사람인데요.”

“재미는 모르겠지만,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네, 자네는.”

테로스의 후한 평가에 단유는 가볍게 목례로 대응하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다 돌아섰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단유는 고민했다. 그녀의 예언대로라면 곧 이곳에 교국의 사람들이 찾아올 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녀가 가진 두루마리를 빼앗고 그녀에게 해코지를 가할 것이다. 그녀가 말하진 않았지만, 추정컨대 그 과정에서 그녀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녀가 그들을 걱정해 미리 도망가게 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과 같은 선택을 하는 그녀라면 그것 또한 어떤 미래를 위해 저들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단유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만약 단유가 그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면, 그것이 이미 반영된 미래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합리해.’

누군가의 죽음은 방관했으면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선택의 문제로 여기는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이거 참. 그렇게 쳐다보지 말게. 내가 멋있는 사람이긴 해도, 남자에게 관심을 받는 걸 즐기는 사람은 아니니까.”

“오해세요.”

“알고 있네. 오해겠지. 오해가 아니더라도 오해라고 말해야겠지.”

단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손을 저었다.

“들어가시게나.”

복잡해진 머릿속을 채 다스리지 못해 단유는 한참을 여관 입구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겨 성문 밖으로 나갔다.

“늦은 시간인데 어딜 가나?”

경비병들에게 성 주위를 돌아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너무 늦지 말라는 말만 던지고 단유를 내보냈다. 이 시간에 성 밖으로 나서는 이가 단유만은 아니어서, 구도자들 중에도 어떤 이는 이 시간에 호수 주변 산책을 즐기는 이가 있었고, 낚시꾼 중에도 이 시간에만 잡히는 어종이 있어 성 밖으로 낚시대를 메고 나서는 이가 있었다.

평온한 호수 근처에 세워진 성. 지금껏 지나왔던 어떤 성과 마을보다 평화롭고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을과 사람들이었다. 호수 위를 내달린 바람을 맞으며 저녁 노을을 보고 있자니, 명상에 잠겨 자신을 돌아보기에 참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복잡하고 풀기 힘든 문제가 있어도 이 잔잔한 호수 앞에 서서 마음을 갈고 닦으면 절로 침착해지며 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오늘 보고 깨달은 것들을 정리해 나갔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단유는 별빛이 차오른 호수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늘을 그대로 본떠 박아놓은 듯한 검은 호수와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단유는 생각했다.

‘이동.’

생각과 동시에,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단유는 사라지고 발아래 눕혀있던 풀들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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