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49화 (749/956)

시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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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더는 마음 졸이며 살고 싶지 않소. 젊었을 적 품었던 정의와 기개는 이제 남아 있지 않거든.”

씁쓸함을 담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마스토.

“자네 말이 옳소. 내 힘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최상의 선택이겠지.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소.”

신실한 마음으로 사제가 되었고, 정의로움을 내세워 이단심문관 활동을 시작했지만, 교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는 동료들을 보며 이상과 유리된 현실을 자각하며 분노를 느꼈다.

분노는 마스토를 강제로 각성시켜 어둠의 마법을 사용케 했고, 그 힘은 동료들에 대한 살인으로 이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동료를 죽여야 했던 마스토는 스스로에게 모순을 느꼈다. 그리고 그 모순은 그의 힘을 봉인하게 만들었다.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오. 한때는 그 힘을 되찾으려 시도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아니오. 내가 그 힘을 써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소. 그저 내 아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픈 마음뿐이오. 신께 봉사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은 없소. 그저 내 주위 사람들이나 돌보며 살고플 뿐이오. 그러니 이건···이제 내게 필요도 없고,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오.”

다시 단유에게 두루마리를 들이밀었다.

“미안하오. 그리고 부탁하오. 부디 내 짐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내 업을 너그러이 받아주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리슬을 위해서라도.”

****

다음 날, 단유는 흐린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상에는 그리 많은 바람이 불지 않고 있지만, 저 높은 상공에는 꽤 거센 바람이 부는지 구름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단지 거대한 수증기의 집합체일 뿐인 구름이지만, 비정형의 그것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넓은 하늘 위를 꾸물꾸물 기어가고 있었다. 잠시라도 멈추면 큰일이라도 날까 조바심을 느끼는 양.

시선을 떨구니, 어제까지만 해도 온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던 항아리가 산산조각 난 채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항아리를 실었던 수레는 보이지 않았지만, 단유는 그 수레에 항아리 대신 다른 무언가를 가득 싣고 길 위에 흔적을 남기며 사라져 갔음을 알 수 있었다.

“하.”

마스토가 이리 빠르게 움직일 줄은 단유로서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간 떠맡았던 짐이 얼마나 무거웠던 건지, 그리고 그 짐을 벗는 순간 그렇게나 가벼워질 수 있었던 건지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결과는 이렇게 텅 빈 집으로 드러났다.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을 텐데도, 야반도주를 선택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끼이익.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끝까지 젖혀 열고 들어가니 텅 빈 실내가 단유를 맞이했다. 걸음을 옮겨 어제 마스토와 마주 앉았던 탁자로 다가갔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두루마리 때문이었다.

어제 그가 건넸던 두루마리를 단유는 끝내 받지 않았다. 그것을 받는 게 일종의 간섭이라 여긴 탓이었다. 마스토와 거래는 물론, 그의 부탁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단유였기에 그가 건네는 두루마리를 거절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덩그러니 ‘버려진’ 채로 놓인 두루마리였다.

그럴 거면 애초에 그냥 이렇게 버리고 도망가지 그랬냐는 물음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했는데, 바로 단유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비록 건네는 걸 받진 않아도 이렇게 던져두면 이 두루마리의 중요성을 아는 단유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걸 마스토는 알고 있었다. 마스토도 알고 있었고, 단유도 알고 있었다.

단유는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펼쳐보진 않았다. 품에 갈무리한 후, 단유는 몸을 돌렸다.

마스토의 집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호라엘의 집이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단유를 막아서는 일이 있었지만, 호라엘의 한 마디에 단유는 저지선을 손쉽게 통과했다.

“같이 식사할래요?”

“아니요. 별 생각이 없네요. 대신 물어볼 게 있어서요.”

“원하시는 걸 얻으신 것 같은데요?”

“원하는 걸 얻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얻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쨌든 결과는 같지 않나요?”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든, 예언대로만 되면 된다는 것처럼 들렸다. 꼭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어쩐지 단유는 그녀의 사고 매커니즘이 그런 귀납적인 추론 방식을 따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단유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호라엘은 두루마리를 보고 다시 단유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요?”

단유는 짧게 설명했다.

“교국 내 고위 성직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자료라더군요. 그리고 이 안에 제가 물어봤었던 그 글자에 대한 내용도 있고요.”

“열어보셨나요?”

“아니요.”

“왜요?”

“제 것이 아니니까요.”

호라엘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엄격하시네요.”

“마스토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간섭하고픈 마음이 없거든요.”

“의외네요. 제가 본 루치드는 이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는데. 루치드가 감당할 수 없는 게 있나요?”

“거꾸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답하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좋아요. 그럼 이걸 제게 주는 의미는?”

“당신은 마스토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죠?”

“네.”

“그를 제게 소개시켜 준 이유는요?”

“이것 때문이죠.”

“그렇다면 역시 호라엘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요?”

“네.”

“그럼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요? 처음 호라엘에게 이 문자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냥 답을 줄 수 있었잖아요? 굳이 마스토를 만나게 하고, 그가 이 성을 떠나게 된 지금의 상황이 모두 호라엘이 유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유도했다기보다는 원래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할 수 있죠.”

“운명, 같은 건가요?”

“아니요. 운명이란 건, 말하자면, 어떤 이유로든 본래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결과를 일컫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움직이는 세상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마스토 아저씨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은 그의 과거가, 그리고 현재가 종용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고 봐요. 전 그런 결과를 미리 보았을 뿐인 것이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루치드에게 그를 소개한 것에 대해 제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 하지만, 누군가의 의지를 뛰어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원인들과 선택들이 야기한 결과였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호라엘과 인과론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나누고픈 마음은 없어요. 전 그런 모호한 이야기보다는 정확하게 구분되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를 선호하니까요.”

“흠.”

호라엘은 볼을 부풀리며 귀여운 척을 해 보이더니 말릴 새도 없이 두루마리를 묶고 있던 끈을 잡아당겼다. 탁자 위에 펼쳐진 두루마리와 이를 보며 웃는 호라엘. 그녀는 장난이었어, 라고 말하는 듯한 눈웃음을 지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뭐가요?”

“원하는 답을 얻었나요?”

단유는 호라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약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예언을 하면 사람 마음도 읽을 수 있나요?”

호라엘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 어때요? 이 정도는. 간섭하지 않으려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왜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그건 이상한 질문이네요. 이렇게까지, 라니. 전 그저 루치드가 이걸 볼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한 거예요. 루치드, 스스로에게 한계선을 그어두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똑같은 말을 호라엘에게도 해보죠. 호라엘은 자기가 본 예언을 모두에게 하지 않잖아요.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예언의 대상자가 부득이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호라엘 역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는 걸 인지하고 스스로 한계선을 그어둔 것이잖아요. 그런데 누가 호라엘을 협박해서 그 선을 넘으라 하면, 호라엘은 그 협박에 넘어갈 건가요? 지금 호라엘이 한 행동은 그런 협박과 다르지 않아요.”

“협박이라뇨?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루치드가 제게 요청했던 질문에 답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혹시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나요?”

“다른 이유라.”

호라엘은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열려 있던 문을 닫으려 하니 바깥에서 지켜보던 몇몇 추종자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호라엘은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내며 문을 닫고, 창문을 닫았다. 이내 어둑해진 실내에서, 호라엘은 단유를 향해 돌아섰다.

“루치드, 전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몇 차례 당신이 했던, 그리고 할 예정인 일들에 대해 미리 보았던 사람으로서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어요.”

어디까지 보았는지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단유는 느꼈다.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어울리며 살아가죠. 저도 비록 소극적이긴 하지만 밖에서 절 걱정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하물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과 가장 현명한 지혜를 가진 당신이 늘 경계선에 선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는 모습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의미에선 그녀도 단유와 비슷했다. 단유가 지닌 힘이라면 세상 모든 일에 간섭해도 그를 막기 힘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예언이라면 세상을 한 번에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에 비유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예언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다. 그능력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세상 어느 권력자들보다 우위에 설 수도 있을 테다. 미래를 안다는 것. 정보의 가치가 현대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곳이지만, 그렇다고 ‘정보’라는 것의 가치를 폄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체감하지 못하는 그 정보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단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을 이해해요. 하지만 루치드, 누구도 당신에게 책임지라고 말하지 않아요.”

뒷짐을 지고 거실을 왔다갔다 돌아다니며 호라엘이 말했다.

“새벽에 마스토는 아들을 데리고 이 성을 떠났어요. 얼마 후, 교국에서 그를 찾을 거예요. 그는 아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게 될 거예요. 살기 위한 절박함 때문이죠. 그 절박함으로 인해 그는 당신을 배신함 셈이 되겠지만, 그 덕분에 그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죠.”

“······.”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한때 마스토가 손을 써서 몰살시켰던 귀족이 있어요. 그 귀족은 사실 테로스가 어렸을 적에 몸담았던 귀족가였어요. 그 귀족가가 몰살당하는 바람에 테로스는 한동안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죠. 하지만 그 전에 테로스는 저 때문에 귀족가를 떠나 있어야 했었고, 그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게 되었던 거죠.”

그런 식으로 얽히나?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단유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교국은 이 두루마리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사람을 보낼 거예요. 그리고 전 교국에게 두루마리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서 끌려갈 거고요.”

“음?”

“그런데 테로스와 몇몇 사람들은 저를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할 거예요. 절 불쌍히 여기는 탓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사람은 죽어요. 그리고 테로스는 저를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날 거고요.”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은 사건들 사이에 설명하지 않은 고통과 어려움이 뒤따르리란 걸 단유는 알 수 있었다.

“테로스는 그 여행 중,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요.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전 그저 죽어가는 그를 보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죠.”

“이해할 수 없네요. 그런 일들을 미리 알고 있다면, 미리 바꿀 수도 있잖아요?”

호라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제가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게끔 진행 중인 일이에요. 이 순간에도 그런 결과가 나오도록 원인들이 쌓이는 중이니까요. 하나 더 말씀드릴까요? 그 일로 인해 교국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돼요. 더 많은 원인들이 쌓인 결과지만, 이로 인해 교국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죠. 교국의 무자비한 포교로 고통받던 주변국들은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타락한 교국의 수뇌부들은 이어진 전쟁에 민심을 잃고 추락해요. 수십 년이 더 흐르고 교국은 일신하게 되며, 마침내 부정부패를 끊고 진정한 신의 가호를 받는 나라로 거듭나게 되죠.”

너무 먼 이야기라 감이 잘 오지 않는 미래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선택의 문제라는 건가요?”

“선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선택할 수 없는 문제기도 하죠. 과연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일까요? 테로스와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선택이 좋은 걸까요?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하는 게 좋은 걸까요?”

“둘 모두를 가능케 하는 길을 찾는 건 어때요?”

“그게 가능했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이유는 없겠죠?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루치드가 굳이 이것을 보든 안 보든 큰 의미는 없다는 거예요. 마스토가 선택했고, 제가 선택했고, 테로스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일이에요. 이미 선택한 일도 있고, 앞으로 선택해야 할 일도 있지만, 어느 경우든 루치드와는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 이걸 보고 안 보고는 자유라는 거죠. 어때요? 마음이 좀 가벼워졌나요?”

“전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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