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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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호라엘과 만남을 가졌을 때였다. 호라엘이 단유에 관한 예언을 언급하며 싱긋 웃을 때, 단유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참으며 말했다.
“그 말은, 후일 제가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겠죠?”
“이렇게 묻는 게 불쾌하실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예언은 항상 맞나요?”
“그런 편이죠.”
“그런 편이란 말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건가요?”
“맞지 않는 경우도 없진 않겠죠.”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경우가 없었어요.”
호라엘은 빈 찻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제가 무슨 신도 아니고, 고작 미래를 조금 본다는 건데, 그것도 사람의 일이니, 틀릴 수도 있겠죠.”
마치 고기를 굽다가 조금 태웠네요, 라고 하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혹시 미래를 바꾸려 한 적도 있나요?”
호라엘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미래는 바꿀 수 없어요.”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정반대예요.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니까, 바꾸고 자시고 할 게 아니란 이야기죠.”
“무슨 말이죠?”
“인간은 고유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노력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인간의 행동과 생각은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 흐름에 통제를 받는 것 같아요.”
“그 흐름이 뭔가요?”
“그건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해요. 하지만 미래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그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에요.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에요. 하지만 바뀌지도 않아요. 어떤 사람은 제 예언을 듣고 미래를 바꿀 수 있지 않냐고 하지만, 결국 미래는 제가 예언한 것과 똑같이 진행되죠.”
“그럼 미래가 정해진 것이란 말과 같은 거 아닌가요?”
“아니요. 제가 본 미래는 언제나 선명하지만 전 알 수 있어요. 그 미래는 단지 제가 보는 미래일 뿐이란 것을. 또 다른 미래가 발현할 가능성도 있음을 전 알아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 같은 흐름을 벗어나야 하죠.”
“굴레라.”
“어떤 이는 그것을 신념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운명이라 부르는 그 굴레를 벗어나야만 해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저 역시도요.”
“왜죠?”
“인간이니까요. 인간은 존재 자체로 모순적이죠.”
“전 동의하기 어렵네요.”
“루치드는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떤 미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이 의지를 가진다면 얼마든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미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꿈꾼다. 그리고 그 희망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만든다’는 그 생각 자체가 바로 ‘미래를 바꾼다’는 의미와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단유에게 호라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희망’의 정체죠.”
그러나 호라엘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에 깃든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녀가 했던 말에서 추측해보자면, 어쩌면 그녀도 그런 ‘희망’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희망’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과 맞닥뜨리는 경험을 수차례 겪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단유는 그녀와 말싸움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녀의 능력을 부정하고자 온 것도 아니기에 생각을 속으로만 삼켰고, 호라엘도 화제를 바꾸려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튼, 루치드가 아직 그 마법을 구사하지 못하니 제 소원은 이룰 수 없겠네요. 아쉽게도 말이죠.”
“제가 죄송해야 할 일은 아니죠?”
“물론이죠. 하지만 언젠가는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될 테니 그날이 되면 부디 제 부탁을 기억해 두셨다가 내키시면 들어주시길 바랄게요.”
“혹시 거기에 대해서는 예지하지 못하시나요?”
“제가 원하는 시점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원하는 걸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애초에 제가 원해서 얻은 능력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하려면 미래를 관장하는 신 정도나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다시피 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에 불과해요. 가끔은 제 능력이 저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그렇군요.”
“이것 역시 제게 주어진 굴레일 거에요. 제가 원하지도 않은 능력으로 미래를 보는 것. 그래서 한동안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더랬죠.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자, 그럼 이제 제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고. 혹시 루치드는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미래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라고 생각하고 답해 드릴게요.”
애초에 여기 온 것은 ‘예언자’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녀의 초빙에 응했다. 지금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 충족된 상황이라 단유는 딱히 물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자리를 파하고자 했으나, 문득 품에 넣어둔 ‘미스테리 문자’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이거 뭔지 아시나요?”
호라엘이 보더니 싱긋 웃었다.
“몰라요.”
“아, 역시.”
“그런데, 이거에 대해 답해줄 사람은 알아요.”
“네?”
뜻밖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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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러더군요. 마스토씨에게 제가 누군지를 밝히면 도움을 줄 것이라고.”
“······.”
“마스토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건 자기가 말해 줄 수 없다고요. 다만 제가 원하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만 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저를 탓하시고,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만약 불편하시다면 그냥 거절하셔도 됩니다.”
얼마 후, 침묵을 지키던 마스토의 굳게 닫힌 입술이 달싹거릴 때, 치료실로 향했던 타리슬이 헉헉대며 돌아왔다.
“아버지. 지금 봐주시겠다고 들어오시래요.”
마스토는 단유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나중에 했으면 하오.”
“그러겠습니다.”
“······.”
타리슬에게 몸을 기대고는 힘겨운 걸음으로 느릿느릿 치료실 안으로 들어가는 마스토를 단유는 뒤에서 바라보았다.
“아버지, 있잖아요.”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마스토에게 타리슬은 아침에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마스토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단유가 마법사라고 했으니, 아들이 보았던 것은 그의 마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들에게 섣불리 말해 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물었다면 루치드라는 이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물음 자체로 인해 마스토가 숨기려 했던 과거가 드러날 우려가 있고, 그것은 연쇄적으로 자신의 평온했던 일상이 일그러질 위험성을 야기한다.
속앓이로 인해 절로 나오는 한숨이 아들을 걱정케 만들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세요?”
“괜찮다. 그나저나 내일부터가 문제구나.”
“아까 그 형이 내일도 도와준댔어요.”
“······.”
“···거절했어야 했나요?”
“아니다. 도움을 준다는데, 이유 없이 거절할 도리가 없잖느냐. 거절할 처지도 아니고.”
“제가 잘할 테니까, 아버지는 너무 걱정 마시고 쉬세요.”
“···그러마.”
“그런데요, 그 형이 계속 도와주면 우리 일도 되게 편해질 것 같아요. 항아리 하나만 가지고도 아침 일을 모두 끝낼 수 있다니. 어떻게 한 건지 물어보면 가르쳐 줄까요? 어렵겠죠?”
마스토는 아들의 손등을 툭툭 두드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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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단유는 타리슬을 도왔다. 단유가 나무를 대체해서 끼워 넣은 탄소 소재의 바퀴 축은 그 특유의 탄성으로 쉽게 부러지지 않을뿐더러 공차(公差) 없이 끼워 맞춰진 덕에 미세하지만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힘을 전달하여 수레를 끌기 편해졌다.
또한 항아리 하나로도 충분히 물은 넘쳐나니 수레를 끄는 타리슬은 힘의 부담을 느낄 새가 없었다.
“너무 좋아요!”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해 준 타리슬의 호들갑을 보며 마냥 기뻐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마법사라는 건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더냐?”
“네! 아버지도 나중에 보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 거에요.”
“그럼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매일 인사하고 있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나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 네.”
“그래서 말인데, 그에게 물어보고 괜찮다면 내일 오후에 한 번 우리 집으로 와달라고 물어보거라.”
“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유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자리에 누워있던 마스토가 몸을 일으키려 하기에 괜찮다고 했으나, 마스토는 오히려 그 손을 물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새벽마다 도와줘서 고맙소.”
“아뇨. 어차피 그 시간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겸사겸사라 생각하면 딱히 감사를 받을 일도 아닌 걸요.”
“타리슬.”
옆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던 타리슬은 아버지의 무거운 목소리에 얼른 일어났다. 마스토는 머리맡에 두었던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건네며 심부름을 시켰다.
“세니에게 가서 술 좀 받아 오거라.”
타리슬은 단유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타리슬이 힘차게 달려나간 뒤, 집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마스토는 그동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한참 고민했었다. 이렇게 시작할까, 저렇게 시작할까. 쉽지 않은 일일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결심을 했기에 그를 불렀다. 그렇지만 막상 마주 앉게 되니 역시 생각처럼 이야기를 시작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단유는 그런 마스토의 고민을 안다는 듯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결국 마스토는 헛기침으로 정적을 깨뜨린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의도야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소. 덕분에 걱정을 들었소.”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 때문에 부담을 느끼실 필요도 없으시고요.”
정중하고 공손한 단유의 태도는 마스토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말했지만 난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몸이라오. 더구나 마법사를 상대로 뭔가를 알려줄 지식도 없고.”
“이것 좀 봐주실래요?”
종이를 붙든 마스토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것만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어디서 난 것이오?”
단유는 필사한 종이를 보여주며 그것을 얻게 된 경위를 간략히 설명했다.
“···그렇게 얻은 것입니다만, 혹시 알아보시겠습니까?”
몇 장 되지 않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단유가 필사한 그 문자들을 살피던 마스토는 미간을 좁힌 채 눈을 감고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려 노력해야 했다.
“루치드.”
“네.”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일이 있소. 타인에게는 물론 아들에게도 숨기고 싶은 일 같은 것 말이오.”
“이해합니다.”
누구보다 많은 비밀을 지닌 채 살아야 했던 단유였다.
“어쩌면 별거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숨긴 채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기에 오히려 밝히는 것이 두려워진 건지도 모르겠소. 차라리 처음부터 밝혔다면 모를까.”
“하지만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하는 비밀도 있을 수 있겠죠.”
마스토가 단유를 응시하니, 단유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
“저도 그런 비밀이 있어요.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그래서 아저씨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전 아저씨께 어떤 희생이나 자백 같은 걸 강요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단유는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그러나 아저씨께서 나으실 때까지는 계속 일을 도울 테니 염려 마세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시만.”
손을 들어 단유의 말을 막은 마스토에게서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호라엘은 날 도우려는 뜻으로 자넬 내게 보낸 것일 테요. 그만 과거를 털어버리라고.”
도대체 어떤 과거가 있기에, 그리고 이 문자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 굳이 그의 과거를 들추려 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단유가 되려 부담스러워졌다.
“아무래도 호라엘이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나 보군.”
“그녀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단지 아저씨께서 그 답을 줄 거라고만 했죠.”
“난.”
마스토는 물속에 잠겨 있던 물고기를 힘겹게 끌어올리는 낚시꾼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교국의 사제였소. 그리고···.”
그가 끝내 숨기려 했던 그것은 단어만으로도 피비린내를 진동케 했다.
“이단심문관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