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45화 (745/956)

시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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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저씨를 집에 데려다 드릴게요.”

타리슬의 아버지는 낯선 이의 호의를 무작정 받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런 거절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와준다는 건 고맙네만 난 신경 쓰지 말게. 빨리 물을 가져다줘야 할 곳이 많아.”

“그래도 아버지···.”

“항아리가 하나뿐이라, 왔다갔다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말을 잇는 타리슬의 아버지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유는 타리슬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성 내에 혹시 의사는 없어요?”

“의사요?”

“그러니까, 다친 곳을 돌봐주는, 치료사라고 해야 하나요?”

“아, 계시긴 한데···지금 이 시간에는···.”

새벽 안개가 아직 다 걷히지 않은 시점이기도 하니, 타리슬이 머뭇거리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길에서 마냥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터라 단유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우선 집으로 갈 것을 다시 한번 권유했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건 더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일이에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만약 아저씨의 몸이 더 안 좋아지면 앞으로가 더 문제가 될 테니까, 지금은 일단 집으로 가서 몸을 돌보세요.”

“그렇지만···.”

“그리고 나중에 그 치료사란 분께 가서 몸을 살피도록 하시고요. 아저씨가 빨리 나으셔야 일을 계속 하실 수 있을 거잖아요.”

진땀을 흘리면서도 발을 쉬이 떼지 못하는 건 역시 당장 지금의 상황이 눈에 밟혀서일 것이다. 단유는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받쳐주려는 의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통증을 느끼는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무는 모습이었다.

“안 돼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업히세요.”

“시간이···.”

“그건 걱정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탈이 없도록 도와드리죠.”

“그래요, 아버지. 일단 집에 가요.”

단유의 등에 업히는 것도 힘들어하는 아버지였지만, 그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저 조금만 참으라고 할 수밖에.

겨우 그를 그의 집으로 모셔다드린 후, 단유는 수레를 지키고 있던 타리슬에게로 돌아왔다.

“어떡하죠?”

타리슬은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배달 일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색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받으면 좋아지실 거예요.”

“정말이요?”

의학 쪽으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 확신은 못 하지만, 적어도 단유가 보기엔 근육 긴장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만약 디스크에 문제가 생겼다면 조금 전처럼 일어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리하지 않고 며칠간 쉬기만 해도 낫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

“우선 여기 좀 볼게요.”

만약 수레축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타리슬이 억지로라도 수레를 끌면서 배달을 시작했을 것이지만, 부러진 수레 축을 고치지 못해 결국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돌아온 단유가 수레 아래를 보기 위해 몸을 숙이는 걸 보면서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장 수리를 위해 필요한 자재와 도구가 없는 상황에서 그라고 별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보다는 근처의 누구에게라도 사정을 말하고 수레를 빌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고, 그래서 어느 집엘 찾아가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됐어요.”

단유가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주변을 돌아보며 이 집 저 집을 물색하던 눈동자가 홱 돌아갔다.

“네?”

“제가 뒤에서 밀 테니 앞에서 길을 안내해 주실래요?”

단유가 수레 뒤에 서며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타리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제가 길을 몰라서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그러니까 지금 이거 부러져서 움직이지 않을 텐데···.”

“고쳤어요, 수레는.”

멍한 얼굴로 단유와 수레를 바라보던 타리슬이 겨우 물었다.

“···어떻게요?”

그러나 단유가 뒤에서 힘을 주어 밀자 웅덩이에 빠졌던 바퀴가 스르르 굴러가며 빠져나오는 상황이 연출되니 타리슬은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더 많은 질문들이 속에서 폭풍같이 쏟아져 나오려는 찰나에, 단유가 ‘시간 없다면서요’라고 재촉하니 나오려던 질문들이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놀람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우선 여기를 먼저 가야 돼요.”

커다란 저택의 뒷문 근처에 수레를 세운 타리슬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우선은 일이 먼저였다.

“성주님이 계시는 저택이에요.”

타리슬은 뒷문을 규칙성 있게 두드렸고, 곧 타리슬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가 조용히 문을 열며 인사를 건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눈을 흘기는 소녀의 말에 타리슬은 다급했던 사정을 설명할 틈도 없이 사과와 함께 수레에서 물동이를 집어 들었다. 단유가 항아리 옆의 손잡이를 잡고 항아리를 기울여주자 물이 흘러나와 물동이를 채웠고, 채워진 물동이를 타리슬이 짊어지고 저택 안으로 힘겹게 들고 들어갔다. 이 같은 작업은 네다섯 번 정도 반복을 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오늘 아침 식사 준비가 늦어지면 니네 탓이었다고 이를 거야.”

“미안해.”

여자아이는 낯선 얼굴의 단유를 힐끔거리다 물었다.

“아버지는? 저 사람은 누구?”

“나중에 설명할게. 지금은 바빠서.”

“알았어.”

타리슬이 다시 수레 앞에 섰다. 수레가 멀어질 때까지 소녀의 시선이 타리슬과 단유를 쫓았지만, 누구도 그녀의 시선에 화답하지 않았다.

다음에 도착한 집도 성주의 주택보다는 작지만 꽤 큰 규모의 집이었다. 단유가 항아리를 기울이며 물었다.

“혼자 들고 나르려면 힘들지 않아요?”

“괜찮아요. 원래 이건 제가 하던 일인데요.”

“시간이 부족하니 같이 하죠.”

“···고맙습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아버지랑 할 때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준 탓도 있고 단유가 워낙 적극적으로 도운 탓에 항아리 하나 분량을 모두 비울 때쯤엔 평소와 거의 비슷한 시간에 배달이 가능해졌다.

“이제 항아리 다 비웠죠? 다시 돌아가서 물 퍼오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서둘러야겠어요.”

“괜찮아요, 아직은. 다음 집으로 가요.”

“물이 모자랄 텐데?”

안에 얼마나 들었는지 가늠해보려고 항아리를 슬쩍 밀어본 타리슬은 꿈쩍도 하지 않는 항아리에 깜짝 놀랐다.

“어?”

두 손으로 밀어도 겨우 흔들릴까 말까 하는 항아리에 놀란 타리슬이 수레 위로 올라가 항아리 안을 살피니, 주둥이까지 찰랑거리는 물결 위로 일렁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우선 서두르죠. 집에 부모님도 기다리실 테니”

놀란 타리슬이 입을 벙긋거렸지만, 단유는 태연히 그를 재촉했고, 그는 물음을 속으로 삼키며 수레를 끌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호숫가로 가는 일 없이 일을 마칠 수 있었고, 그렇게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항아리는 평소와 같이 텅 비어 있었다.

묵묵히 수레를 끌던 타리슬은 집 뒤에 수레를 세우자마자 입을 열고 참아왔던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단유는 두 손을 들어 그의 질문을 막았다.

“우선, 안에 들어가서 아버지부터 살피세요.”

“···같이 들어가요.”

“전 여기 있을게요.”

들어가 봐야 부담스러운 인사만 오고 갈 상황이라 단유는 타리슬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네.”

타리슬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밖으로 뛰어나왔다. 혹시 단유가 말만 그렇게 하고 떠나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던 모양이다.

“저기요. 아까···.”

“그 전에, 아저씨를 먼저 그 치료사에게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

“움직이기 힘드실 수도 있으니, 수레에 아저씨를 타게 하고 수레를 끌면 아버지가 덜 불편하실 거예요.”

타리슬은 괜찮다는 아버지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와 수레에 올라타게 도왔다. 어머니가 뒤따라나와 단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단유에게 살가운 한마디 건네지 않고 대신 신음을 참으려 얼굴을 찡그릴 뿐이었다.

이번에도 타리슬이 앞에서 수레를 끌었고, 단유는 뒤를 밀어주었다. 그리고 수레에 올라탄 아버지는 수레가 구르며 느껴지는 진동에 인상을 쓰면서도 단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땀을 흘렸던 탓에 제멋대로 뻗친, 하얗게 센 머리의 아버지의 이마에는 굵은 주름살이 깊게 패어있었고, 눈 주위는 건조한 탓에 마른 나뭇잎의 그것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또 오랜 세월을 담은 흐린 눈동자는 복잡한 심경을 반영하는 듯, 끊임없이 흔들리며 단유를 살피고 있었다. 단유는 별 반응 없이 그 시선을 마주하며 수레를 밀었다.

“이보시오.”

“네.”

겨우 결심했는지 아버지가 물었다.

“난 마스토라 하오.”

“루치드입니다.”

“내 비록 아는 것이 많지도 않거니와, 태어나 지금까지 이 성에서만 자랐기에 많은 사람들을 겪지도 않았소. 하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살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 있소.”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왜 우릴 도운 것이오?”

“······.”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편이지만, 예전부터 이 성에는 뜨내기처럼 왔다가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소. 그리고 그중에는 별 조건 없이, 그냥 사람을 돕는 이도 없진 않았소. 나도 그런 도움을 적잖게 받아보았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그런 쪽에 속하는 인물은 아닌 듯 하오.”

“왜 그렇게 보셨나요?”

마스토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표정이 다르니까.”

“표정이요?”

“사람은 누구나 표정을 가지고 살아가오. 표정이란 것은 일부러 꾸밀 수도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표정이란 것도 있소. 그리고 그때의 표정은 일부러 감추기 어렵다오.”

“그렇군요.”

“타인을 돕는다는 행위는 단순하지 않소. 그 근간에는 자기만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남을 돕는 행위를 하는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이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 ‘남을 돕는 형태의 행동’을 하는 것이기에, 그 행동을 하는 순간에는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기에 가릴 수가 없는 것이오. 가릴 이유도 없고. 그런데 그쪽은 그런 표정이 없더란 말이오. 그렇다면 이 경우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오.”

“어떻게 말인가요?”

“본래의 목적을 감추고 일부러 접근한 것이 아닐까 싶은 거지.”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아니란 말이오? 아니라면 사과하겠소.”

“아뇨,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유의 대답에 마스토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대화를 엿듣던 타리슬도 단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수레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어제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우연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새벽 산책을 나온 터라 우연히 뵀던 것이죠. 하지만 오늘은 일부러 뵐 수 있을까 싶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고요.”

마스토가 침음을 흘렸다.

“이유가 무엇이오?”

“어제, 호라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호라엘이 마스토 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군요.”

“······.”

수레가 멈췄다.

“타리슬.”

“···예?”

“치료실 문이 열렸는지 보고 오거라.”

“···같이 가시면 되잖아요.”

“······.”

타리슬은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아버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지 느린 걸음으로 치료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멀어진 뒤, 마스토가 물었다.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함부로 옮기지 않을 이인데.”

“저에 관한 이야기였고, 거기에 마스토 씨에 관한 일이 얽혀 있었을 뿐입니다.”

“무엇이오, 그게.”

물음을 던지는 마스토의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마스토 씨에게 배움을 청하라더군요.”

“내게? 아까도 말했지만···난 배운 게 없는 몸이오.”

“없다면 타리슬에게 자리를 피해달라 부탁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

“저는 마법사입니다.”

부릅뜬 마스토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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