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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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라.”
앞에서 수레를 끌던 타리슬의 아버지가 묵직한 목소리로 타리슬의 입은 굳게 닫혔다.
“보시오. 도와준 건 고마운데 우리도 일이 바쁘니 그쪽도 이만 갈 길 가보시오.”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힘주어 수레를 끌자 좀 전보다 수레가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을린 팔뚝에 불룩 솟아오른 혈관이 아들을 재촉하는 신호였던지, 타리슬은 단유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그들을 잠깐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 여관으로 돌아갔다.
“늦었네요.”
단유가 여관에 들어서자 여주인이 뱉은 말이었다.
“늦었나요?”
여주인은 팔짱을 끼고 침음을 내더니 턱으로 식당을 가리켰다.
“들어가요. 남은 음식이 있을 테니 준비해 드릴게.”
“고맙습니다.”
어제 저녁 먹었던 음식이 꽤 입에 맞았던 터라 아침을 거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남편이 들고 온 아침 식사는 역시 입에 잘 맞았다.
“잘 잤는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제 한참 수다를 떨던 테로스였다.
“네.”
말이 길어지지 않을까 우려되어 단답형으로 대답하곤 다시 식사를 이어나가는데, 테로스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아침부터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봐, 여기. 입가심하게 와인 한 잔만 부탁해.”
이제부터 마실 요량이었나보다.
검붉은 와인이 담긴 나무잔을 홀짝이며 입을 축이던 테로스는 단유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말이 많으면 많은 대로 불편했고 말이 없으면 그것 또한 거북했다.
“무슨 하실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자네 오늘 새벽에 성 안을 돌아다녔다면서?”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문제라기보단···. 뭐 특별히 찾는 거라도 있나?”
“아뇨. 그냥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냥 궁금해서 돌아다녀 봤어요.”
“만약 경비대원들이 방금 그 대답을 들었다면 자네를 취조하기 위해 끌고 갔을 거야.”
“왜요?”
“새벽에,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 그 시간에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돌아다녀 봤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유는 고개를 돌려 여관 입구 카운터에서 어떤 마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주인을 쳐다보았다.
“마가렛이 자네의 새벽 산책을 막지 않은 게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라네.”
단유는 테로스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말했듯이 별로 할 말은 없네. 해주고 싶었던 말은 어제 저녁에 다 했으니까. 그러니 이제 자네 이야기를 해 보시게.”
“어떤 이야기요?”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
“어제의 이야기에 비춰보면, 제가 그 예언자란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것도 있지.”
“그것 말고 이 성에 올 이유가 또 있는 건가요?”
“그건 자네가 알지.”
“저는 그저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이곳에 대한 정보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한 채 우연히 들린 거예요.”
단유의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은지 단유의 눈을 가만히 지켜보던 테로스는 와인을 마시는 와중에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듣다 보니 정말 궁금해지네요. 그 예언자란 분. 한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로.”
“만나기 힘들다니까.”
“그분은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나 봐요?”
“나오셔도 주위에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에워싸고 있으니 접근이 쉽지 않지.”
“그럼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는 있겠네요.”
“굳이 멀리서 보겠다면 말리지는 않지. 하지만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하니까?”
테로스가 씩 웃었다. 붉은 와인이 묻은 입술이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한 번 보면 아마 이 성을 떠나는 게 쉽지 않을 거야.”
단유는 뭔가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테로스가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어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단유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맞은 편에서 술을 홀짝이며 기다렸다. 결국 불편한 식사를 끝낸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테로스도 덩달아 일어났다.
“방까지 따라오실 생각이신가요?”
“아니. 밖에 나갈 건데.”
그러고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먼저 여관을 나서는 테로스였다.
방에 올라갔던 단유는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바닥에 놓인 배낭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숨을 내쉰 뒤 배낭을 짊어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실 거요?”
여주인의 물음에 단유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녁에 다시 올 겁니다.”
“말은?”
“여기 두고 갈게요.”
“여물을 많이 먹던데.”
“값을 더 치르면 되나요?”
“다녀오세요.”
여관 문을 열고 나서니 이제 막 중천을 향해 달려가던 오전의 따가운 햇살이 눈을 찔렀다. 단유는 눈을 가볍게 찌푸리며 마당에 나섰다가 마당 가운데 세워져 있던 늙은 나무 근처에서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바라보던 테로스를 발견했다. 테로스 역시 단유를 보았는지 끙 소리를 내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절 기다리신 건가요?”
“아니, 딱히.”
“원래 이 마을에 오는 사람들에게 다 이렇게 대하시나요?”
“그럴 리가.”
“그럼 저한테만 그러시는 건가요? 왜요?”
“글쎄···. 그런데 어디 가려고? 예언자님을 만나려고?”
“여기에도 잡화점이 있나요?”
“잡화점? 있지.”
“어딘데요?”
“같이 갈까?”
“그냥 위치만 알려줘요.”
“처음 와서 지리를 잘 모를 텐데?”
“새벽에 돌아다녀서 대충 길은 알아요.”
“오호.”
단유의 의사와 상관없이, 테로스는 단유를 따라, 아니 테로스가 단유를 끌고 길을 안내했다.
잡화점은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여관도 그랬지만 이 마을에는 제대로 된 간판을 단 가게가 별로 없었다. 여관이야 원래 있었는데 부서졌다는 이유를 들었으나 다른 가게들은 왜 없는 것인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아무튼 적당히 발품을 팔아 찾으면 될 일이라 생각하여 테로스의 안내를 거절했지만, 테로스는 괜찮다며 앞장섰다.
“이봐, 여기 손님 왔어.”
테로스의 큰 목소리에 가게 안쪽에서 늙은 사내가 느린 걸음으로 등장했다.
“뭔가?”
단유는 배낭을 풀며 대답했다.
“여기 물건 좀 팔고 싶은데, 매입도 하나요?”
“어떤 물건이냐에 따라 다르지.”
단유가 배낭에서 꺼내 든 것은 어떤 짐승의 송곳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테로스가 의아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사이, 노인이 송곳니를 받아들고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단유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못 받아.”
“왜요.”
“비싼 물건인데, 값을 치르기가 어려우니까.”
“그럼 이 성 내에서는 이걸 처분할 곳이 없는 건가요?”
“슈우에게 가봐. 대장장인데 아마 거기라면 값을 제대로 치러줄 거야.”
“고맙습니다.”
지켜보던 테로스가 끼어들어 노인에게 물었다.
“아니, 그게 뭔데 그래요?”
“벤가레니스의 송곳니.”
“벤···네?”
노인은 다시 안으로 돌아가고 단유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진 테로스만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뒤늦게 단유의 뒤를 쫓았다.
“자네, 그거 어디서 난 건가? 설마 벤가레니스를 만난 건가? 그 사나운 몬스터를 만났다고? 어디서 만난 건가? 아니, 만났다면 살아 있을리 없잖아? 혹시 어디서 그놈의 시체라도 본 거야? 그런 거야?”
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딴 건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그래도 이것만을 말해보게. 도대체 어디서 벤가레니스의 송곳니를 얻은 건가? 자네 벤가레니스가 뭔지는 아는가? 작은 창고 만한 덩치에 빠르기로는 번개처럼 빨라서 그 녀석 눈에 띄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이름난 몬스터가 벤가레니스네.”
호들갑을 떠는 테로스의 말을 무시하고 단유는 새벽에 돌아다니다 보았던 대장간을 향해 걸어갔다.
“항상 요맘때, 아니지. 아직은 이른가? 아무튼 가을이 오기 시작하면 갑자기 나타나 이 근처에서 난동을 부리는 몬스터인데 말이야. 나도 한 번 그 녀석을 봤는데···.”
두서없이 이어지는 목격담과 그 몬스터에 대한 살벌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단유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여기 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고, 마법으로 단숨에 잡았던 몬스터였을 뿐이었다. 예전에도 몬스터의 부산물이 돈이 되었기에 혹시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며 배낭에 조금 챙겨두었던 것을 처분하려 할 뿐이었다. 그 녀석이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는지 알 바가 아니다.
“정말 우연히?”
대장장이는 손에 든 송곳니를 바라보며 물었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행운의 사내로군. 살아남은 기념으로 그냥 보관하는 게 어때?”
“사실 마음이 없으신가요?”
“아니, 마음이야 굴뚝같지. 이런 귀한 재료는 쉽게 만나기 힘드니까. 가끔 우연히 벤가레니스를 잡으면 얻을 수 있던 부산물인데, 이렇게 성한 물건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거거든.”
단유의 배낭에서 꺼내든 것은 무두질을 하지 않은 생가죽과 송곳니, 그리고 발톱 몇 개였다.
“벤가레니스는 가죽도 좋지만, 사실 그 힘줄이 되게 좋아. 만약 그 힘줄을 가져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건 몰랐네요.”
알았다면 가져왔겠지만, 배낭의 크기에도 한계가 있고, 뼈를 발골하거나 힘줄을 뜯어내는 일은 배운 바가 없었다.
단유의 손에 금빛 동전이 떨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테로스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물론이다.
“자네 정말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로군.”
테로스가 단유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단유는 대꾸하지 않은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피스토피를 모른다지 않나, 아무도 없는 새벽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나, 난데없이 벤가레니스의 송곳니를 꺼내 들지 않나.”
대장간에서 부산물을 팔고 얻은 돈이면 한동안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마침 입고 있던 옷도 많이 해졌는데 이참에 새 옷도 사고, 비상용을 먹을 장기 보관용 음식들을 사놓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래서 예언자님이 자네를 눈여겨 보라 했던 것일까?”
여행을 이어가는 동안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 있었던가를 짚어보던 단유는 테로스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무슨 말이시죠?”
테로스는 의미 없이 웃던 표정을 없애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예언자님께서 자네를 만나고자 하시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고 어제 저녁에 말씀하셨네.”
“그걸 왜 지금 말씀하시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수상한 사람을 그분께 데려갈 순 없으니까.”
“아침에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잖아요?”
“그분께서는 해가 중천을 지날 때 자네를 데려오라 하셨거든.”
테로스가 손가락으로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말하자면, 예언자란 이가 테로스에게 단유를 데려와 달라고 말을 전했는데, 그게 다음 날 점심때였다는 말이고, 그리고 이를 위해 단유를 찾아온 테로스는 단유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떠봤다는 상황이다.
“제가 가고 싶지 않으면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지.”
테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다는 거네요.”
“그래. 하지만 난 자네가 그분께 갈 거라고 생각하네.”
“왜요?”
“그분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이거 참. 만약 명수라면 괜히 오기를 부려서라도 그 예언이 틀렸음을 증명했을 것이지만, 단유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만 여쭤보죠.”
“그래, 진작 이런 대화를 나눴어야지. 서로에게 궁금한 게 있으면 묻고 답하는. 이런 대화가 필요했다고.”
다시 싱긋 웃어 보이는 테로스에게 단유가 물었다.
“본인을 구도자라고 하셨는데, 정말 구도자인가요?”
“왜? 내가 구도자처럼 보이지 않나?”
“제가 아는 구도자랑은 많이 달라 보이시네요.”
“자네가 아는 구도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나 역시 진리를 찾기 위해 공부하는 구도자이네.”
“테로스가 찾는 진리는 무엇인데요?”
테로스는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는 어떤 운명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
“인간이 각자 저마다의 운명대로 살아간다면, 난 어떤 운명을 부여받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게 궁금하더란 말이지. 어떤 이는 운명론을 부정하지. 나 역시 한때는 그런 운명 따위가 있겠냐고 생각했었고. 지금 자네가 날 쳐다보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이 성에 오게 된 게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예언자님을 만나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예언자님은 모든 운명을 지켜보시네.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볼 수도 없을 테지 않은가? 그래서 운명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네만, 문제는 그 운명이 날 어디로 이끄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 그래서 그걸 찾고자 한다네. 이 정도면 구도자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어디로 가면 되나요?”
“따라오게. 아, 그 동전은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게. 만약 어두운 골목에 숨어 있던 소매치기가 몰래 자네를 뒤따라와 동전이 든 주머니를 훔쳐 달아나는 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과연 소매치기가 무사히 달아날 수 있을지 테로스는 전혀 짐작 못 하겠지만, 단유는 대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