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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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에도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였던 에강위와 달리, 낮은 지대로 내려오니 깊어가는 여름의 더위가 온몸으로 체감되었다. 에강위에서 멀어질수록 텁텁한 공기의 압박이 심해졌는데, 말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도 못하고 그저 고생하는 것만 같아 보여 단유는 말에서 내렸다. 고삐를 잡고 천천히 끌어 가까운 그림자로 데려가니 말이 커다란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이제 겨우 살 것 같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왕에 정을 베푸는 거 좀 더 베풀자는 생각에 단유는 말의 등 위로 물을 소환했다.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에 말이 놀라며 앞 다리를 들었다.
“괜찮아.”
단유는 고삐를 거세게 잡아채는 대신 놀라지 말라고 말의 옆구리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시원해?”
말이 콧김을 뿜으며 머리를 털었다.
“내가 아직 조절이 잘 안 돼서 그래. 다시 해줄까?”
끔뻑거리며 단유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확인한 뒤, 다시 한번 물줄기를 소환했다. 좀 전처럼 막 쏟아내는 물이 아니라 바가지 하나를 떠서 천천히 들이붓는 것처럼 마법을 시전 했더니, 과연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얌전히 물을 즐기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인 말이었다.
말도 시원했겠지만, 바닥에 뿌려진 물이 주위의 온도를 조금 낮춰주는 효과를 발휘한 덕에 단유도 더위가 조금 가시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왕 쉰 김에 좀 더 쉬다가 가자는 생각으로 나무 밑둥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바람이 불며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싱그럽게 느껴졌다. 말이 천천히 다가와 단유 근처의 풀을 뜯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허기가 느껴진 단유는 메고 있던 배낭에서 마른 육포 하나를 꺼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아니면 염장을 잘 못 한 탓인지 맛이 조금 변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식가도 아니고 그다지 예민한 편도 아닌 단유였지만 그래도 상한 음식을 먹고 싶진 않았기에 가지고 있던 육포를 모두 먹어 치우기로 결정 했다.
사실 먹을 걸 찾고자 하면 못 찾을 것도 아니다. 사냥이 금지된 곳도 아니고, 과실 나무에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남은 육포도 그리 많지 않아 금방 빈손이 되어버린 단유는 갈증이 났다. 배낭에서 휴대용 컵을 꺼내 거기에 물을 한 컵 채워 마셨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마법이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주위가 건조해진 느낌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리아빈 늪지를 온통 물로 채울 정도의 양을 소환하지 않는 한, 일대가 사막처럼 변할 일도 없을 것이고.
푸르륵 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긴 속눈썹을 가진 말이 단유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달라고?”
단유는 물을 담기 위한 여물통도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땅을 파서 홈을 낸 뒤 거기에 물을 담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땅히 땅을 팔 도구가 없던 단유는 마법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체 마법에 의해 분해되었던 입자들을 조합해서 물 분자가 되게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러한 시도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해오던 것이지만, 정확한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적당한 위치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물질을 분해하고 또 분해하여, 최소 단위의 입자가 되면 가진 형태는 사라지고 에너지는 근원으로 회귀한다. 회귀된 에너지는 대부분 흩어지지만 우연한 규칙의 조합으로, 빛과 소리를 만들어내지. 여기서 조합을 인위적으로 이끌어 빛과 소리가 아닌 H2O라는 화학적 분자 형태를 만드는 거야. 전자와 핵이 조합되기 위한 에너지, 그 전자와 핵이 수소와 산소 원자를 구성할 수 있기 위한 에너지도 계산해서, 그만큼의 에너지를 투입해야지. 또, 각 원자들과 전자들이 정확한 규칙에 따라 정확히 결합하기 위해 유도해야 하고, 이 유도에 필요한 에너지도 계산해 내야 돼. 이를 위해서는 흩어지려는 에너지들을 포집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에너지들이 또 다른 결합에 쓰이지 않도록 붙잡을 필요도 있어.’
시작하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제약과 그 제약 속에서 완벽한 연산이 요구되는 일이었지만, 단유는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무한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마지막 결과 값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말이 크게 울어대는 소리에 단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별이 하늘에 가득했다. 달의 위치로 보아 한밤중인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를 때까지 단유는 집중력을 발휘하느라 주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구나 생각할 때, 다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말이 앞발로 땅을 가볍게 긁고 있었다.
“아, 미안하다.”
단유는 용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말을 쓰다듬어 준 뒤, 말이 서 있던 위치에 마법을 사용했다. 작은 빛이 번쩍인 뒤, 작은 바위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움푹 파인 땅이 드러났다.
“아직은 무리였던 일인데 괜히 욕심부리다 너한테만 피해가 갔네.”
그곳에 물을 소환해내니 금방 작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정말 목이 말랐던지 말은 코를 박고 물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유는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낮에 앉았었던 나무 둥치로 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배낭에서 다시 컵을 꺼내 본인도 물을 한 잔 마시며 갈증을 해결했다.
‘욕심내지 말자고 해놓고선.’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심으며 단유는 허벅지를 주물렀다. 가만히 선 채로 너무 오랜 시간 서 있었더니 근육이 많이 경직되어 있었다. 자각하고 나니 근육이 땅기고 통증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흘러가는 별빛들을 보던 중 어느새 자기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히며 쉴 준비를 하는 말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참 고맙네. 그리 오래 함께 하지도 않았는데 잘 따라주니 말이야.”
단유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얕게 콧김을 뿜더니 머리를 땅에 대는가 싶게 금방 눈을 감고 주인보다 먼저 잠을 청했다.
****
여름이라 주위에 길게 자란 목초는 단유가 딱히 말의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도왔다. 오래 걷다 더워서 힘들어 보이면 물을 뿌려 주거나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혀 주고, 목이 마르겠다 싶으면 땅을 파고 물을 담아 주었다. 그러다 진짜 물이 흐르는 시내라도 만나면 아예 물속에 몸을 담그고 쉴 수 있게 해주니, 태어나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있을까 싶겠지만, 그 덕에 단유도 큰 힘 들이지 않고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기에 서로가 윈윈인 동행이었다.
단유는 안장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길 수 있었고, 그가 딱히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말이 알아서 길을 벗어나지 않고 걸어가니 오히려 예전에 자전거를 몰며 가던 때보다 나았다.
마음 같아서는 가는 동안 품속에 넣어둔 ‘미스터리 문자’를 보며 해독하고 싶었지만, 천천히 걷는 말이라도 위아래로 흔들림이 작지 않았기에 그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가다 멈추고 쉴 때마다 꺼내서 살펴보고, 다시 이동할 때는 그 내용을 보는 대신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사고를 진전시켜 나갔다.
단유의 여정은 딱히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일단은 북쪽을 향했다. 에토신스보다 훨씬 작은 소국들이 교국과의 사이에 여럿 있었는데, 우선은 그 나라들을 지나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마을에 들러 필요한 것들도 구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주변 정세라든가 필요할지도 모를 정보를 얻고자 했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딱히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을에 들를 수 있으면 들리는 것이고,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냥 우회해서 갈 수도 있는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팔자 좋은 한량의 신선놀음이라 하겠지만, 단유 나름으로는 꽤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제껏 너무 많은(?) 사람과 엮이고 의도하지 않은 일들에 관련되면서 온전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했던 단유였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이 시간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있던 부모님이 고심해서 고른 선물처럼 단유에겐 꼭 필요했던 시간이고 여유였다.
‘크리스마스가 너무 덥다는 게 문제겠지만.’
에어컨은 없지만 그것을 대신할 만한 마법이 있으니, 단유는 슬쩍 고개를 들고 불어오는 맞바람에 땀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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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더웠던 여름이 한풀 꺾이는 느낌이 들 무렵, 몇 개의 마을을 지난 단유는 해가 질 무렵 넓은 평야 한가운데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빛나는 한 성을 발견했다.
녹스보다는 크지 않았지만 에강위를 떠난 뒤로 본 곳 중 가장 큰 규모의 성이었다. 옆으로 작은 호수를 끼고 있었는데, 사실 호수라고 해야 할지 큰 웅덩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크기였으나 석양 때문에 보랏빛으로 빛나는 잔잔한 수면 덕인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오늘은 저기 가서 쉬어야겠어. 너도 지붕 있는 곳에서 쉴 수 있겠네.”
푸르릉 콧김을 뿜으며 대답한 말이 단유의 의지를 읽은 듯 조금 전보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성의 주위로는 높고 푸른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꽤 촘촘하게 심어져 있어 이것만으로도 두 번째 방어선 역할을 하기에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오래 전 녹스에서도 겪은 바가 있었고, 오는 길에도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던 몬스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 않으려해도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지만, 만약 지구의 중세였다면 저런 숲은 경계병의 시야를 차단할 뿐이니 성 주위에 저렇게 높은 나무가 자라도록 하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있을지 모를 타국과의 전쟁보다 해마다 날뛰는 몬스터들에 대한 방어가 중요한 곳이다. 그 단순한 차이가 물이 부족한 곳을 수도로 지정케 만들고, 저런 숲을 방치하도록 만드는 것이리라.
성문 근처로 다가가니 우선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어 한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유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봤던 마을이 이곳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점을 상기하면 주변과 왕래가 많지 않은 곳이라는 판단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섣부르게 단정할 순 없는 일이다.
한산한 성문터였지만 그곳에도 경비병은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꽤 나른한 모습으로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단유를 보면서도 딱히 신경을 쓰는 모습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 모습만 보면 왕래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멈춰라.”
당연히 그러리라 예상했던 경비병의 명령에 단유는 말을 세웠다.
“어딜 가는 것인가?”
말에서 내린 단유는 지금껏 마을들을 지나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썼던 대사를 읊어댔다.
“진실을 찾아 유랑하는 방랑객입니다.”
두 경비병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서로를 바라보며 뭐 아는 거 있냐는 눈빛을 서로에게 보냈다. 콧수염을 기른 젊은 사내가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구도자(ziton)인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비슷합니다.”
“요즘 무슨 유행이라도 생긴 건가?”
가만히 서서 구경하던 배 나온 경비병의 혼잣말에 단유의 귀가 번쩍 뜨이며 고개가 돌아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응?”
“혹시 다른 구도자가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까?”
덩치가 작지도 않은 단유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으니 오히려 경비병이 놀라서 주춤거렸다.
“어, 어. 왔었소.”
“언제 말입니까?”
그때 콧수염을 기른 경비병이 손으로 단유를 밀치지 않았다면, 오히려 배불뚝이 경비병이 단유의 기세에 눌려 엉덩방아를 찧지 않았을까 싶었다.
“뭐하는 짓이오?”
“아, 죄송합니다. ···잠깐 흥분해서.”
꾸미려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단유는 순간 흥분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유의 인생 스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이 바로 세명의 구도자였으니까. 물론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데도 ‘구도자’란 단어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저리 물러나시오.”
그나마 이 경비병들은 섣불리 칼을 빼들고 위협하는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그러나 불쾌하다는 표정을 만면에 드러낸 경비들이기에 일부러 자극하고 싶지는 않아 단유는 다시 한번 사과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콧수염은 단유를 위아래로 훑어 보다가 무기가 있냐고 물었다. 무기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과실의 껍질을 벗기거나 그 외 기타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주머니칼은 있었기에 단유는 미리 배낭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주며 자신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단유의 수상쩍음이 해결되지 않았는지, 경비병은 단유의 배낭 속을 모두 살피려 했다. 단유는 자진해서 배낭을 털어 그 속에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경비병은 단유의 몸 곳곳을 두드려보고, 말 안장과 그 뒤에 매어져 있던 망토까지 풀어 털털 털어본 뒤에야 단유의 입성을 허락했다.
“만일 안에서 허튼 짓거리라도 벌였다간 엄히 처벌을 받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다면 몇 가지 여쭤도 될까요?”
“질문은 받지 않겠소. 곧 성문을 닫을 시간이니 얼른 들어가시오.”
단유는 내쫓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면 성안으로 들어가려다, 끝내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여기, 이 성은 뭐라고 부르나요?”
“······.”
정말 수상하다는 듯, 눈에 경계심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았지만 단유가 멀찍이서 순진한 얼굴로 물을 뿐인지라 결국 배불뚝이 경비병이 답을 해주었다.
“피스토피(ΠΙΣΤΡΟΦΗ)라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