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2)
-------------- 737/952 --------------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가로가 물었다.
“다 보았는가?”
“네.”
“설마, 무슨 뜻인지···알아냈는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계속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 수 있겠죠.”
“역시, 그런 것인가.”
“아무튼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루마리를 말아 가로에게 건넸더니 가로가 잠시 그 두루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민을 하는 듯 했다. 그러나 결국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봐야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보라서 쉽게 포기하기 힘들군.”
“괜찮습니다. 대신 괜찮다면 필사본을 만들어도 되겠습니까?”
“그것까진 내가 막을 수 없지.”
가로가 다시 단유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
“잠이라도 자는 게 어떤가?”
“괜찮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는···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신세를 졌지. 미안하고, 고맙네.”
단유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려는 단유에게 가로가 다급히 말을 건넸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 돌아올 것인가?”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만약 돌아오더라도 그저 바람처럼 지나갈 뿐일 테니 다시 뵙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가.”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고개를 돌렸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뭐든 말해보게.”
부탁이 아니라 지시를 내린다고 해도 따를 준비가 됐다는 듯 냉큼 대답하는 가로였다.
“학자분들을 부탁드릴게요.”
“학자들? 그건 부탁할 것도 없는 문제네.”
“그분들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겠네.”
“만약 그분들이 세웠던 업적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아마 에토신스는 더욱 좋은 나라가 되었을 거예요.”
“···사령관과도 잘 이야기해 보겠네.”
“아, 그리고 울스프 선생님께도 이야기 전해주세요. 인사를 드리고 가야겠지만 여의치 않아 이렇게 떠남을 용서해달라고.”
“그냥 나랑 함께 궁에 들어가서 보고 떠나는 건 어떻겠는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사람들 눈에 띄는 일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다는 단유의 생각이었다.
****
한동안 에강위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왕이 그의 신하들을 몰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고 왕은 또 다른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혼란과 무질서가 덮친다 해도 이해했을 일이지만, 장군과 살아남은 몇몇 신하들―그 상황에서 용케 목숨을 구한 신하들이 몇몇 있었다―이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며 수도가 엉망이 되는 것을 막았다.
특히 공국을 점령하는 기간에 경험을 쌓은 군의 통제력이 수도에도 유감없이 발휘된 탓에 일반 사람들은 적잖은 두려움은 느낄망정 어떤 위태로움이나 혼란은 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일국의 가장 큰 권력인 왕이 사라지며 생긴 공백은 쉽게 수습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만, 살아남은 몇몇 귀족들 중에는 기회를 틈타 권력을 잡아보려는 시도를 꿈꾸는 이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강한 군사력을 동원한 사령관에 의해 그런 시도는 애당초 성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령관이 왕좌에 오르려고 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당분간은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사령관의 선언에 신하들은 할 말이 없었다. 거기다 내정을 주로 돌보던 가로가 사령관의 뜻에 동참하겠다 하니 다른 귀족들은 더더욱 만들어진 판을 깨기가 어려웠다.
사령관과 가로는 단유의 조언대로 학자에게 지혜를 빌려주길 부탁했고, 학자들은―자신들이 줄곧 해왔던 전통적인 방식대로―토론과 토의를 거쳐 나온 몇 가지 방안들을 제시하는 등으로 자문역에 충실히 임했다.
연구실로 돌아온 울스프는 포아테지가 건넨 여러 장의 종이 뭉치를 건네 받았다.
“루치드 선생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놀란 눈으로 종이를 받아든 울스프. 잠시 서서 첫 번째 장을 살피던 울스프는 한참 후, 무릎에 힘이 풀려 털썩 바닥에 주저 앉을 뻔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포아테지가 얼른 부축해준 덕에 쓰러져 나뒹구는 일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가까운 의자를 찾아 앉으며 울스프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네도 보았는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대충은 보긴 했습니다만, 선생님께 전해달라는 것이어서 제대로 보진 않았습니다.”
“난 마법의 비밀을 캐고 싶었네. 과연 어떤 이들이 마법을 쓰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는지, 그리고···.”
아버지는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었던 것인지. 사실 마법에 대한 연구라고 뭉뚱그렸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던 울스프의 욕심이 담긴 연구였다. 그리고 그 점을 단유가 지적하고 있었다.
<누구나 마법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단지 의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의지를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단순히 마법을 쓰겠다는 의지가 아닙니다. ‘모든’ 제약으로부터 초월한, 순수하고 곧은 의지가 ‘하나’로 수렴할 때, 그것이 열쇠가 되어 닫혀 있는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이제껏 그와 나누었던 마법에 대한,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들의 정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진리의 문을 열고 그 너머의 진실을 엿보는 순간 느끼는 희열은 감동적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들을 이해하고 보면, 고서에 적혔던 ‘환희에 찬’ 모습은 마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은유적으로 해석하든, 직설적으로 읽든 말입니다.>
‘그럼 그 환희는, 우리 아버지가 느꼈던 환희는 무엇이란 말인가?’
<때론 우리는 너무 사소한 것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함으로서 실제로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학문을 연구할 때 반드시 피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령, 지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죠.>
당연한 이야기였다. 울스프 역시 오랜 시간 학자로서 업적을 쌓은 이니 단유가 말한 것처럼 사소한 것에 매몰되어 중요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라티오와 눈을 맞춘다’는 표현은 어색했습니다. 제게 라티오는 눈을 맞추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 역시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부분이고, 그때 그는 좀더 고민해보겠다는 말로 넘어갔었다.
<헌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마법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울스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대 마법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아버님께서 마법사라고 생각하시는 증거는 그분이 기록에 남긴 몇 가지 단어들을 제외하곤 없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분께서 남기신 그 단어들은 일반인이 쉽게 알기 힘든 단어이긴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마법사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특정 가문의 사람들만이, 혹은 특별한 혈통을 가진 이들만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그 특별한 용어는 아주 비밀스럽게 전해 내려오는, 외부인이 전혀 알 수 없는 금고 속 보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혼란스러움과 아찔한 감정이 혼재된 울스프의 눈동자가 다음 문장을 짚어갔다.
<그래서 고민해보았어요. 만약 그 단어들이 마법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포르마’라는 것은 어떤 물체 혹은 존재의 ‘형상’을 의미하죠. 그런데 본질을 담은 ‘형상’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저와 달리, 혹시 아버님께서는 ‘포르마’라는 단어를 무언가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하신 게 아닐까라는 가정을 해 보았어요.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아버님께서 잃어가고 있는 기억을 비유한 것일지도 모른다고요.>
기억? 그럴 수도 있겠다. 기억이란 것이 오감으로 경험했던 대상을 복제한 ‘형상’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울스프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렇게 기술하셨죠? 라티오의 빛을 볼 수 없었다, 고요. 만약 ‘라티오’를 다른 은유로서 해석한다면 과연 무엇일까, 생각을 했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남자에게 있어 ‘본질’을 담은 ‘세계’라는 뜻으로 지칭할 대상이 무엇일까, 라고요. 그랬더니 저절로 답이 떠올랐습니다.>
울스프의 무릎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 포아테지가 울스프를 부축했다.
자리에 앉고 나서도 울스프는 감정이 격해져서 단유가 건넨 그 종이들을 보기 힘들었다. 숨을 가삐 쉬고 있으니 포아테지가 책상 위에 있는 컵에다 물을 받아 건네주었다. 겨우 컵을 받아 힘겹게 한 모금을 마시니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시면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포아테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묻자, 울스프는 고개를 저으려다 멈췄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집에 가서 조금 쉬어야겠구나.”
평소라면 별 느낌이 없었을 연구실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아니다. 혼자 갈 수 있다.”
울스프는 의자의 팔걸이를 짚으며 일어섰다.
연구실을 빠져 나오니 그것만으로도 한결 숨쉬기 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거리로 나서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예전 경비대를 대신해 무장한 군인들이 곳곳을 지키며 삼엄한 눈빛을 뿌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확실히 어수선해진 분위기와 갈팡질팡하는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그들은 과연 어떤 감정과 어떤 생각으로 이 순간을 살아가는 걸까? 새삼 그들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울스프는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울스프의 시선은 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시중을 드는 시녀가 놀란 얼굴로 달려와 그를 부축하려 했고, 그의 늙은 아내 역시 남편에게 또 어떤 변고가 생긴 게 아닐까, 불안감을 드러내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소.”
울스프는 조용히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아내가 뒤따라와 뭐라고 했지만 그는 조용히 생각하고 싶다는 말로 뒤따르는 질문들을 차단했다. 아내가 나가고 조용한 침실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던 울스프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살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란 존재가 바로 ‘라티오’가 아니었을까요?>
물론 이것도 가정일 따름이니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겸손한 표현으로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었지만, 울스프는 다른 가정을 떠올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무뚝뚝하기만 하다고 여겼던 아버지. 꼭 일을 시키고 난 뒤 그 대가로서 따로 구운 오블라텐, 별맛도 없던 오블라텐 하나를 주던 아버지. 자신을 바라볼 때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던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로서 정을 교감한 적은 별로 없었다, 고 토로하기도 했던 울스프는 새삼 아버지의 진심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살아남기 위해 구걸을 해야 했고, 학자를 따라 다니면서는 공부를 하느라고 바빠서 그랬다는 핑계는 눈가에 깊어진 주름만큼의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긴 세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도 많이 쌓았기에 어지간한 사람들의 속내는 다 안다는 식으로 현자 노릇을 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정작 자신이 들여다봐야 했던 것은 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사소한 것에 매몰되지 말라 했던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써야 하지 않을까?
한참 후, 울스프가 문을 열고 나오니 거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던 아내와 시종이 보였다.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한마디 꺼냈다.
“오블라텐이 먹고 싶군.”
****
단유는 에강위를 떠났다. 타고 올 때 사용했던 자전거 대신 가로에게 얻은 말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한 단유는 급할 게 없었다.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자.”
알아듣든 말든, 말을 툭 건네니, 말이 콧김을 한 번 내뿜은 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잘 훈련된 말이라 그런지 몰라도 길을 벗어나지 않고 뚜벅뚜벅 잘 걸어가기에 단유는 딱히 고삐를 챌 필요가 없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도 적당히 리듬을 타며 적응하니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앞을 바라보니, 산과 들, 평야와 언덕, 푸른 나무와 푸른 하늘,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길과 방황하는 새들이 보였다.
마치 교과서 어디엔가에 나올 법한 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단유는 말을 몰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