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36화 (736/956)

귀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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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하지?”

엘라바인과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제피는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에 의지해 바라본 궁 내 정원 위를 무장한 군인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자신들이 계획한 ‘개혁’은 또 다른 ‘혁명’군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제피도 이제 앞으로가 걱정되었다.

“걱정하지 마.”

“넌 걱정 안 해도 되겠지. 네가 데려왔으니까. 하지만 난 아냐. 난 저들에게 붙잡히면 분명 고문당하다 죽을 거라고.”

“나랑 같이 있으면 될 거야.”

“무서워.”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가는 어둠만큼이나 두려움도 커졌다. 엘라바인이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였다.

“누구냐?”

사각지대에서 나타난 군인이 창을 들이밀었다. 제피는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엘라바인은 벌떡 일어나 제피 앞을 막았다.

“제 친구예요.”

군인은 엘라바인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뒤에 있는 이를 보내줄 순 없었다.

“범죄를 저지른 이는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엘라바인이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를 때였다.

어둡던 사위가 한순간 밝아졌다. 때아닌 햇살(?)에 놀란 이들이 눈을 가렸다가 이 햇살이 그 햇살이 아님을 깨닫고 당황할 즈음, 해라고 착각할 만큼 환한 빛의 구체 아래로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를 발견했다.

“마, 마법사?”

군인은 엉겁결에 창을 단유에게로 돌렸지만 딱히 공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경계하는 기색은 역력했지만, 그보다 두려움이 더 컸던 탓에 단유의 보보에 맞춰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그리고 단유 역시 그와 상대할 마음은 없었다.

“루치드!”

엘라바인이 아는 척 그를 불렀고, 뒤이어 제피가 핼쑥해진 눈으로 단유와 단유의 머리맡에 있는 빛의 구체를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움을 드러냈다. 마법사라는 건 익히 알았지만 그의 마법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제피였다.

군인의 경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피에게 천천히 다가간 단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뒤늦게 파악한 제피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를 일으켜 세운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옷을 털어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네.”

단유는 제피를 바라보았다. 제피는 어쩐지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몰래 놀러 갔다가 들킨 아이가 된 심정이었다.

“선생님께,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각오가 되었냐고 물었을 때, 전 자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됐어요.”

단유는 다 이해한다는 듯 제피의 말을 막았다. 사실 단유의 지구 나이로 계산해도 제피는 단유보다 어린 학생에 불과했다. 아무리 이 사회가 무법천지에 가까울 정도로 가혹한 면이 있다 하나, 평생 칼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다는 청년이 불에 타 시커멓게 변한 시체와 그 시체의 가죽을 뚫고 부풀어 오른 선홍빛 내장을 바라보며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을 리 없다.

“동네 골목 뛰어다니며 칼싸움하는 아이들의 수준을 넘을 거라고 경고했을 때, 들었어야 했어요.”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단유의 말에 제피의 젖은 눈동자가 슬쩍 군인을 향했다 돌아왔다. 그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피.”

단유가 그를 불렀다.

“아직도 그 각오, 변하지 않았나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 그 계획을 위해 목숨도 불사하겠다는 각오. 제피는 단유의 물음에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무엇을 위한 신념이었던가? 지금은 그저 죽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제피를 바라보며 단유가 말을 이었다.

“쉽지 않죠? 각오라는 거.”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으려 애써보지만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제피가 가졌던 이상은 존중해요. 하지만 신중하지 못했던 그 각오와 조심성이 부족했던 준비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해요. 제피가 책임질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피에게도 책임은 있어요.”

바닥에 엎어지며 통곡을 하는 제피. 그리고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엘라바인. 그들이 잠깐 꿈꿨던 그 미래와 앞으로 에토신스라는 나라에 펼쳐질 미래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생길까? 그리고 그 간극 속에서 각자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어느 세계를 막론하고 모든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일 것이다.

“이상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각오와 준비로는 이룰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길.”

단유가 몸을 돌렸다.

“루치드!”

엘라바인이 앞을 막았다.

“제피를, 제피를 살려줘요.”

단유는 군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피를 바라본 뒤, 다시 엘라바인을 바라보았다.

“제게 그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는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걱정 말아요. 설마 제피를 죽이겠어요?”

단유의 시선을 따라 엘라바인도 그 군인을 바라보니, 군인이 멍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위에서 내려진 명령도 사로잡으라는 명령이었지, 발견 즉시 죽이라는 명령은 아니었다. 물론 붙잡은 이후의 일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마법사가 저렇게 운을 떼니, 시치미를 뗄 수도 없었고 그의 상관에게도 마법사가 넌지시 건넨 그 말을 전하게 된다면 아마도 이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엘라바인과 제피를 등 뒤에 두고 다시 걷기 시작한 단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던 가로와 마주했다. 가로가 단유를 따라 걷기 시작하다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자네라면 그를 그냥 데리고 나와도 될 텐데. 사령관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거야.”

단유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책임질 수 없는 문제니까요.”

“역시···. 철저히 방관자가 되겠다는 것인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던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힘빠진 목소리로 토로했다.

“이기적인 방관자죠.”

“이기적인?”

단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횃불을 든 군인들이 에워싼 가운데 얌전히 군인들을 따라가는 두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 완벽하게 방관자 노릇을 할 거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개입을 하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었어요.”

“왜?”

“한 사람은 제게 항상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었고, 한 사람은 제 공부를 도와주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변명일 뿐이겠지만, 제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어요. 저 두 사람, 어쩐지 제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거든요.”

“친구라. 그렇다면 더더욱 그들을 구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친구는 아니니까요.”

“···흠. 냉정하군.”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는 덜 밝지만 빛의 구체를 하늘에 띄워 앞을 밝혀 둔 터라 그들의 근처로 다가오거나 길을 막는 이들은 없었다. 멀찍이서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던 군인들도 그것을 보고는 멀리 피할 뿐이었다. 그 덕에 손쉽게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왕궁 앞 대로는 이미 군의 통제에 텅 비어 있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집들도 창을 모두 막아두고 있었는데,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한 조치로 인해 불필요한 시선을 받지 않으며 움직일 수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길을 걸어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가로의 저택이었다. 걱정스런 눈치로 기다리던 집사가 한달음에 달려 나와 가로를 향해 괜찮냐고 안부를 묻고 또 물었다.

“부인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저녁 내내 걱정하다 결국 쓰러진 가로의 아내는 침실에서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는 말을 전했다.

가로는 그런 집사의 걱정을 뒤로하고 단유를 안으로 데리고 갔다. 내실로 안내한 가로는 단유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이것이네.”

단유는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쳐 보았다. 예의 그 알 수 없는 문자가 빼곡히 적혀 있는 두루마리였다.

“가문의 선조들 누구도 이 두루마리를 해석하지 못했지.”

“······.”

“그렇게 서서 보지 말고, 여기 앉아서 천천히 보게.”

“감사합니다.”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단유를 두고 가로가 방을 나갔다.

다시 가로가 단유가 있던 방에 들어온 것은 아침 해가 밝은 후였다.

“여태 보고 있었던가?”

“좀 쉬셨나요?”

가로는 두꺼운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쓸어낸 뒤 피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한숨도 자지 못했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가로는 단유의 맞은편에 의자를 질질 끌고 와 두고는 거기에 몸을 묻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 진짜로 벌어졌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머릿속이 혼란스럽네. 잠깐 쉬면서 정리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손발이 떨리고 혼란은 더해지더군. 아니, 뭐랄까···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들고, 나만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자책도 들고.”

단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로가 팔걸이를 툭 밀며 일어서더니 창가로 향했다. 나무 창을 밀어젖히니 환한 햇살이 실내로 쏟아져 들었다.

“이제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고민 때문에 더 잠을 잘 수 없었네.”

창밖을 바라보던 가로가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밤새 고민했지만 쉽게 답을 낼 수 없었네. 이 방을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런데 이 방에 들어와,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있는 자네를 보고는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나더군.”

“무엇이었습니까?”

“오래전 남겨진 그 두루마리를 보며, 그 의미를 해석해내려는 자네의 노력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만약 내가 보고 겪었던 일을 기록해서 남긴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어쩌면 지금의 자네처럼 후대의 누군가는 그 기록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궁구(窮究)하지 않겠나? 그들은 오늘의 일을 반추하며 이런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좋네요.”

짧고 단순한 대답.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는지 굳어 있던 가로의 얼굴이 조금 풀리는 듯 했다.

“정말 괜찮다 여기는가?”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일을 상세히 기록하여 내일을 사는 이들에게 보이면 그것이 바로 교육인 거지요.”

“교육이라.”

“거리 위 무지렁이, 거렁뱅이도 교육을 받으면 제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나라를 만드세요. 그럼 그 나라는 가로 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나라가 될 겁니다.”

“과연 그럴까?”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네.”

“고맙네.”

“제가 인사받을 입장은 아니죠.”

“그런데 개인적인 질문이네만 해도 괜찮겠는가?”

“말씀하세요.”

“어쩌면 자네는 어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네. 자네에겐 힘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방관자이기에 그런 죽음을 두고 봤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네. 자네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네. 하지만 그들을 살렸다면, 그리고 왕을 징치했다면···.”

“제가 왕을 징치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는 무고한 신하들을 죽였네.”

“전 그보다 더 많은 무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가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단유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쳐들었다. 그 상태로 조용히 읊조렸다.

“만약 지금 제 눈에 보이고 제 귀에 들리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환상 속의 그림 같은 것이었다면 전 그저 감상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된 서사시에 나오는 참혹한 전쟁의 한 장면을 재현한 작품을 감상하듯, 유행가를 읊조리는 시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듯이 말이죠.”

가로는 단유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품을 그린 화가도, 유행가를 만들어낸 작가도 아니기에 전 그것에 참견할 권리도 명분도 없습니다.”

한때는 작은 지분이라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지분마저 모두 털어낸 마당이다.

“전 시간을 관조하는 방관자가 되어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수지의 깊은 물을 바라보다, 그 물의 수면 위에 떠오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유는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수면에 떠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라는 것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저 분노에 가득 차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했습니다. 힘을 사용했더니 또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가 왜 이곳에 와 있었던가를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관계를 맺고 인연을 만나는 과정에서 제가 너무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물속 깊이, 숨이 차는 것도 잊은 채로 그저 밑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것처럼. 그러다 깨달았죠.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전 그저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제 역할은 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을. 그게 저의 역할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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