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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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물음에 왕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게 하는 물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노를 넘어 허탈하게 느끼게 만드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자격? 하···.”
왕이 뺏어 들었던 칼이 바닥으로 향했다.
“어이가 없군.”
모두의 시선을 다시 돌려받은 단유가 입을 열었다.
“한 번쯤은, 누구나 태어나 한 번쯤은 생각하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보며 왜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가 궁금해하는 것과 같아요. 흘러가는 물을 보며 저 물이 마침내 어디에 닿을 것인가 의문을 가지는 것과 같아요. ···그것처럼 자신에 대해 생각하죠.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단유의 시선이 비스듬히 움직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런 질문이 바로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일 것입니다. 역할은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숙명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인간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횃불이 불을 밝혀 어둠을 물러내야 하는 역할이 있듯, 손에 든 검이 적을 물리치기 위한, 그리고 나의 가족, 친구들을 지키기 위한 역할이 있듯, 사람에게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는 겁니다. 근위병에게는 왕을 호위해야 하는 역할이 있고, 장군께는 국가를 수호하고 수많은 군대를 통솔해야 할 역할이 있으며, 신하에게는 국무를 보조하여 왕의 통치를 도울 역할이 있을 겁니다.”
어디 무슨 말을 하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왕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대전 안에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많은 근위병,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군인들이 대전 안을 채우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군인에게는 군인의, 근위병에게는 근위병의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마찬가지이죠. 그런데 우리가 맡은 역할은 단 하나가 아닙니다. 수많은 역할을 수행해야 하죠. 지금은 근위병이지만, 집에 들어가면 누군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친구로서, 동료로서의 역할도 있을 것이고 친절한 이웃으로서의 역할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사회 속 자신의 역할일 것입니다.”
제자리에서 천천히 돌며 자신을 향한 시선들과 눈을 맞춘 단유가 다시 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동공의 눈동자가 단유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이 역할에 소홀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이 역할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무너지게 되죠.”
누군가의 아들임을 망각할 때, 부모님과의 마찰이 벌어진다. 누군가의 부모임을 망각할 때, 소중한 자녀는 일탈의 길을 걷거나 혹은 망가진다. 친절한 이웃의 역할을 잊어버리게 되면, 주위 사람들은 자신을 떠나간다.
“그래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을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역할이라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어떤 역할을 맡든, 그 역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충분한 자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근위병으로서의 역할을 맡기 이전에 근위병으로서의 자격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길거리나 쏘다니는 한량이 갑자기 근위병의 역할을 맡는다고 근위병이 될 수는 없을뿐더러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낼 리 없다. 칼 한 번 휘두른 적 없고, 딱히 사명감도 없는 이가 군인이 된다면 제대로 된 군인이 될 리 없다.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부모로서의 자격이 필요하다. 친구의 자격이 없는 친구는 친구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폐하.”
단유의 부름에 왕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왕에게도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바닥에 닿은 칼이 거친 소음을 내며 왕의 뒤를 따랐다.
“자격이라고?”
“······.”
“하···.”
바닥을 질질 끄는 칼에서 나는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나는 기분이다.
“네 말이 맞다고 치자. 자격? 그렇지. 자격이 있어야 하지. 그렇고 말고.”
왕은 칼을 들지 않은 손을 들고 단유의 왼편에 서 있던 가로를 가리켰다.
“가로 경이 신하가 된 것은 내가 그에게 그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왕은 몸을 틀어 장군을 가리켰다.
“비고 경이 장군이 된 것은 내가 그를 장군으로 임명했기 때문이고.”
손가락이 원을 그리며 허공에 줄을 그었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내가 그 자격을 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본인을 가리켰다.
“나? 내 자격? 내 자격은.”
손가락이 천장을 가리켰다.
“천명(天命). 하늘이 주었다.”
단유가 입을 열려는 찰나, 왕이 말을 가로챘다.
“그러니!”
“······.”
“감히 누가 왕의 자격을 운운한단 말인가!”
단유 앞에까지 다다른 왕의 커다란 호통이 실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던 바람이 쩍쩍 얼어붙을 정도의 악기(惡氣)를 내지르는 호통이었으나, 단유는 물론 머리 위에 떠 있던 빛의 구체는 흔들림이 없었다.
“자격은 하늘이 줬을지 모르나, 그 자격을 평가하는 건 왕이 아닙니다.”
왕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유가 비어 있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 모인 이들, 그리고 이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폐하를 평가할 것입니다.”
“무지렁이, 거렁뱅이들이 날 평가한다고?”
“쓰레기 같은 놈들이 감히 나를 평가한다? 더 이상 들어줄 수 없군.”
픽, 웃음을 흘리던 왕이 순간 칼을 휘둘렀다. 바닥을 스치며 불꽃이 피어나고, 피어나자마자 사라지는 불꽃이 검을 떠난 순간 예기가 가득한 검날이 바람을 가르고, 바람을 가른 검날이 단유를 아래에서 위로 그어버렸다.
그러나 왕의 손에 들렸던 살기는 지나가는 저녁 바람처럼 그저 흘러갈 뿐이었다. 추어올렸던 힘을 이기지 못해 왕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올라갔던 칼이 공중에서 헤매다 다시 맨땅을 부딪칠 때, 잠시 몸을 틀었던 단유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왕을 바라보았다.
왕의 헛나간 공격에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할 틈도 없이, 왕은 이를 악물며 다시 반대로 팔을 휘두르며 두 번째 검격을 횡으로 날렸다. 역시 이번에도 단유는, 마치 마법을 쓰는 것도 아깝다는 듯 그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몸을 살짝 트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낼 뿐이었다.
다시 휘두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왕. 원독에 찬 눈으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죽여 버리겠다!”
그게 신호였던 것마냥, 근위병들이 일제히 칼을 들고 달려들려고 자세를 취할 때.
“멈춰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고 동시에 주위를 에워쌌던 군인들이 칼과 창을 철컥 세우며 근위병들을 위협했다. 근위병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대신 브링의 눈치를 살폈다. 브링은 뒤로 돌아서 사령관을 보았다. 사령관은 그저 굳어버린 얼굴을 하고 브링의 시선을 받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브링은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허나 브링은 그 뜻을 따를 수 없었다.
옆에 선 부하의 손에서 칼을 뺏어들고 놀랍도록 빠르게 몸을 돌려 왕에게, 단유에게로 뛰어갔다. 치켜든 칼이 천장에서 비쳐오는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보다 더한 빛이 칼에서 뿜어져 나왔다.
곧바로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브링의 오른손이 빛무리에 갇혔고, 빛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팔꿈치 아래로 흔적도 남지 않은 브링의 오른팔을 볼 수 있었다.
“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브링을 보며 모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모두의 시선은 단유에게로 향했다. 여기서 이런 일을 벌어지게 할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부들부들 떠는 왕을 무시하고 단유가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
“저는 이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이 난장판을 만들고 말인가?”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이곳에는 오래 머물지 않을 거라고. 제가 필요한 것을 얻게 되면 떠날 거라고. 비록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것은 얻었습니다.”
“하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사령관은 근위대장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근위병들 사이를 지나 단유에게로 향했다. 군인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령관은 단유가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태연히 걸어갔다.
“자격이라 했던가. 난 자네가 그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결국 자네가 만들었던 것은 그것이었구만.”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그 자격을 얻고자 노력하게 만드는 것. 자격을 갖춘 이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돕는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발상이야.”
하지만 그에 앞서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 만약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자격은 물론이고 제 역할을 소홀히 하면서 혜택을 누리려는 이가 나올 것이다. 군인이기에 더욱 그런 상황을 쉽게 가정해 볼 수 있는 사령관 비고였다.
“부하들을 믿지 못하는 장군, 상관을 신뢰하지 못하는 부하들로서는 군을 유지할 수 없지.”
그렇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통제력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사령관께서 하시지 않습니까?”
“그럼 그 마을은?”
“그 마을 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마찬가지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방종하여 타락할 것입니다.”
단유는 떨고 있는 왕을 흘깃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왕은 그저 만인의 위에 올라선 이가 아니라, 만인을 아우르며 그 구성원들이 제 역할을 하면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지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을 받은 것은 사령관이 아닌 가로였다.
“부끄럽구만.”
단 한마디였지만 사령관은 가로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로에게도 가로의 역할이 있으니, 단유가 말한 것처럼 왕을 도우며 왕이 스스로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보조하는 것이 그 역할이리라. 그런데 그런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왕이 독선적이며 이기적이라는 핑계로는 벗어날 수 없는 죄였다. 게다가 왕이 죽으라 했으니 죽어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했다. 진짜 직무유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제 역할을 끝까지 수행할 의지를 가지지 않았던 것. 자신의 진짜 역할을 제대로 고민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소치였다.
“이것들이···.”
벌벌 떨면서도 분을 이기지 못해 단유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왕을 무시하고 단유가 걸음을 옮겼다.
“어디, 어딜 가는 것이냐! 섰거라! 멈춰라!”
그러나 누구도 단유를 제지하지 않았다. 근위병들이 주춤대며 물러섰고, 군인들도 단유의 앞을 막지 않으려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던 사령관이 가로를 쳐다보았다.
“가로 경.”
“······.”
“가시오.”
“어쩔 셈이오?”
“지금은···모르겠소. 하지만 오늘 벌어진 일은 매우 끔찍한 일이고, 이대로 묻어둘 수 없는 노릇이오. 무엇보다···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겠소. 하지만 하나는 알겠소.”
비고는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여전히 단유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제자리에서 악만 쓸 뿐이었다.
“이후 역사에 내가 어떻게 기록될 지는, 역사에 내가 어떻게 평가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이 나라에, 내가 사랑하고 지키려는 이 나라에, 제 역할을 못하는 왕은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당당히 말하려 하오.”
“뭐라!”
얼굴부터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던, 이제는 곱게 빗어 넘겼던 머리도 산발이 되어 엉망이 된 몰골의 왕이 사령관을 노려보았다. 사령관은 한숨을 내쉰 뒤 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직하게 명령을 내렸다.
“에토신스의 위대한 아르다 왕조의 마지막 왕이시여. 그만 짐을 내려놓으소서.”
사령관이 칼을 뽑아 들자 흠칫 놀란 왕이 뒷걸음질 쳤다.
“브링!”
그러나 브링은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려 혼절한 상태.
“근위병!”
근위병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들이여! 나의 군대여!”
군인들은 척척 걸음을 맞춰 포위를 좁혀왔다.
“가로!”
가로는 다가오는 군인들의 무리 사이로 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이 나라의, 에토신스의 왕이다!”
여전히 천장에서 빛나던 빛의 구슬이 왕의 유언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