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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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제안으로 엘라바인은 사령관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령관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하려 해도 그전에 공국에 머물고 있는 사령관을 만난다는 게 그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길도 잘 모르고 거기에 도착하기까지 걸릴 시간을 고려해도 엘라바인이 집을 비우고 떠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편지를 썼다.
“편지를?”
“친척의 핑계를 대며 그분께 편지를 먼저 보냈어.”
사령관 휘하에 있던 부대장의 친척임을 밝히며, 현재 왕의 명령에 따라 단유의 시종을 들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단유와 ‘우연히’ 나라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고, 단유가 사령관과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충고를 했기에 편지를 보내게 되었음을 밝혔다.
“서신을 주고 받았던 거야? 그때부터?”
제피의 경악스런 표정에 엘라바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넌 이미 우리 조직을 배신할 생각이었구나?”
“그렇지 않아. 난 우리 조직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적어도 그때는.”
“그럼 언제 비밀을 누설했던 거야?”
“그게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네가 알아주길 바라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어쨌든 중요한 건, 난 우리의 계획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어쩌면 더 끔찍한 미래를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감당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후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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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저의 아들 딸, 손자와 손녀, 그리고 그 손자와 손녀들이 낳은 또 다른 손자와 손녀들이 살기 좋은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게 이유라고?”
왕의 부들거리는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날 막는다고 했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명령을 어기고 귀환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
“역시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단유가 만들어낸 빛무리를 받으며 얼굴을 든 장군 비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하긴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사실 제가, 그리고 폐하께서 하려는 일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기 위함이라 해도 그것은 그저 후대에게까지 존경받는 이로써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죠. 어쩌면 아주 먼 훗날, 지금 에토신스가 이룩한 영광이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의 이름만큼은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랄까요.”
비고는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얗게 센 귀밑머리가 빛에 반짝였다.
“그런데 공국에 간 뒤, 그랬던 저의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저 자를 만나면서.”
오랜 시간 먼 길을 헤치며 지나온 노장의 굵은 손가락이 단유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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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가 그런 말을 했었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이 나라의 십 년, 백 년이 흐른 뒤를 상상해 보았냐고. 만약 지금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면, 그 결과를 누가 감당할지 생각해 봤냐고 루치드가 물었는데 난 대답을 하지 못했어.”
“그런 걸 왜 생각해? 지금은 지금이야.”
제피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지금은 지금이지. 하지만 말이야, 이런 생각 해 봤어? 만약 과거에 이런 생각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했다면 과연 수 백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을 때, 과연 우리가 지금과 똑같을까?”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이야. 막말로 정말 네 말대로 그랬다면 좋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일어선 거 아냐. 선왕폐하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달성하고자 지금의 폐하께서 이렇게 분투를 하시는 거잖아?”
“아니, 너도, 나도, 비방트도, 그리고 폐하도···그 누구도 진지하게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한 사람은 없어.”
엘라바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제피는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여기서 시간을 축내는 것이 과연 옳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에서 엘라바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라바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피는 엘라바인에 대한 배신감을 넘어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 이상해.”
“이상한 게 아냐.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고. 동기는 똑같아. 우리가 지금 이런 일을 벌인 건 미래를 바꾸기 위함이잖아? 좀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 하지만 그 노력이 단지 우리의 미래만을 보고, 그 미래만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어선 안 된다는 거야. 더 먼 미래를 바라보자는 거야.”
엘라바인은 대화가 진행될수록 처음과 달리 차분하게 변했다. 그리고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피가 이해를 하든 말든.
“그게 이상한 거야.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를 왜 생각하는 거야?”
엘라바인이 고개를 들었다. 가깝지 않은 거리,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향하는 곳, 그곳에 우뚝 솟아있는 대전 안은 환한 빛으로 가득 찬 듯이 보였다. 수 백개의 횃불들을 켜놓더라도 저 정도로 밝지는 않을 텐데.
“그 미래에 우리는 없을 수 있지. 하지만 그곳에는 우리의 자손들이 있을 거야.”
“그건 그들의 몫이야. 우리가 책임질 부분이 아니라고.”
엘라바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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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법사가 만든 마을을 처음 보았을 때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저 세계, 하늘도 없는 천장은 하늘보다 더 밝게 빛나고 누구나 집에서 물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마을이었죠.”
그때의 충격을 되새기는 듯 장군의 시선은 단유에게 향해 있었으나 초점은 그 너머를 향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제게 충격을 줬던 것은 바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령관의 이야기는 단유도 호기심이 생기도록 만드는 말이었다. 그곳을 떠난 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 과연 그곳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곳에는 왕도, 귀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둑도, 거지도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몇 사람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 않소?”
옆에서 듣고 있던 가로 역시 호기심을 느꼈는지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물론 한 나라에 비교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곳이 작은 나라처럼 보였습니다. 그곳에는 그곳만의 질서가 있었고, 그 질서는 대단히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 역시 그곳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가로에게 시선을 잠시 던졌던 사령관은 다시 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백성들, 무지한 평민들을 다스리기 위해선 왕이 필요하며, 그 왕을 돕기 위한 귀족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으나, 그곳은 그런 왕도 귀족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지렁이라 여겼던 그들은 현명하게 마을을 운영하고 있었고, 어쩌다 생긴 분란은 스스로들이 정한 규칙에 따라 조율하여 다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숨을 한 번 고르는 사령관의 이마에 주름이 도드라졌다.
“도둑도, 거지도 없는 것은 그들에게 훔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훔칠 필요가 없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배자가 된 폐하를 위해 세금을 내고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때에 집을 나와 정해진 때에 식사를 하고, 정해진 시간만큼 일을 했습니다. 결코 강요에 의해 일하지 않고 강요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사령관의 말을 들을수록 가로는 가슴의 두근거림이 커지는 것이 비단 자신만의 일은 아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단유가 마법을 보였을 때 자세가 무너졌던 것을 제외하면 거의 흔들림이 없던 근위병들의 경계가 조금이나마 낮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봐야, 망국의 작은 마을이지.”
“네, 그러나 그건 그 마을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공국은 물론 에토신스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 마을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헛소리! 지금이라도 내가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나의 군사들의 발아래에 넙죽 엎드려야 하리라!”
사령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뭐라?”
그때, 사령관의 뒤로 이어진, 빛이 닿지 않은 검은 통로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을 맞춰 등장한 그들은 바로 무장한 병력들. 바로 사령관과 함께 온 군인들이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무기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냐!”
브링의 외침에도 군인들은 동요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령관의 뒤에 대열을 갖췄다.
“폐하.”
군의 등장으로 잠시 말이 멈추었던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은, 바로 이 나라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토신스, 제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충성을 바치기로 한 이 나라 말입니다. 전 이 나라가 진정으로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랐고, 이 나라의 수호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노라 다짐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폐하. 이 나라는 그 작은 마을조차도 못합니다. 물이 모자라 제대로 씻지 못하는 아이들, 언제나 악취로 가득해서 나는 줄도 모를 정도였던 도시, 구걸하는 사람들, 그들을 구제하지 못할망정 창과 칼로서 위협하는 이들을 거느렸던 저로선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단 말입니다.”
사령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에토신스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게 무슨 소란이란 말입니까? 폐하께 충성을 다한 신하들을, 충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들을 이리 불태워 죽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충언이라 하였는가! 무엇이 충언인가! 언제나 반대나 하며 왕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수고도 하지 않는 이들이 어찌하여 충신이란 말인가? 이들이야말로 이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다! 자네가 말한 그 가소로운 이상마저 방해할 이들이란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런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폐하는 어떤 신하를 거느리려 하십니까? 과연 이 다음에 폐하를 떠받들며 도울 신하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있다 한들, 그들이 충신이 아니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감히···.”
“그리고! 이런 결정을 손쉽게 내리시는 폐하의 나라에 과연 누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저 정원에 죽어간 이들처럼 죽는 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쳤던 것일까? 그리고 또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저는 폐하께 충성의 서약을 했으나, 그것은 폐하를 향한 충성이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한 충성이라는 것을. 폐하의 나라가 아니라, 제가 살아가고 있는 나라에 대한 충성임을.”
“역모다! 반역자로다! 브링! 무엇 하느냐! 당장 저자를 잡아 무릎 꿇리지 않고!”
브링이 한 걸음 나서자 근위병들이 칼을 뽑아 들었고, 동시에 사령관의 뒤에 선 이들이 화답하듯 칼과 창을 치켜들며 근위병들을 향했다. 그러나 왕은 근위병을 향한 날 선 무기의 예리함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잠시 두 집단이 무기를 서로에게 겨누며 흉흉한 기세를 뿌릴 때, 왕이 고개를 홱 돌리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의 단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놈이, 네 녀석이 바라는 게 이것이었던가! 이러기 위해서 이 궁에 들어온 것이었던가! 이 나라를, 아르다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 것이었던가!”
“아니요.”
“그럼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서 이런 분란을 만드는 것이냐?”
“분란은 폐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신하들은 여전히 나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장군과 내 군사들은 나를 위해 충성을 했을 것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대륙 제일의 강국이었을 것이다! 네가, 네가! 이 나라를 망쳤다!”
“제가 아니라, 폐하입니다.”
“닥쳐라, 이 놈!”
왕이 브링의 손에서 칼을 뺏어 들고 단유에게로 달려 들었다. 그 전에 브링이 왕을 붙잡았다. 왕은 큰소리를 지르며 몸을 흔들었지만 꼭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서 있는 단유의 모습이 왕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왕은 팔을 휘둘렀다. 왕의 팔꿈치에 브링의 턱이 가격당했으나 그런다고 왕을 붙잡은 손이 풀리지는 않았다.
“폐하, 참으십시오!”
“놓아라! 놓지 않으면 너부터 베겠다.”
사령관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추태를 보이지 마시옵소서.”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모두 날 깔보는 놈들밖에 없구나!”
왕은 허공에서 칼을 휘저으며 역정을 냈지만, 단유에게 닿지 않았다. 단유는 그런 왕을 향해 손을 저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손끝에서 나와 왕의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나 싶더니 잘린 머리카락들이 어깨 위, 바닥 위로 날려 떨어졌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놀란 왕이 입을 벌린 채 멈추었고, 뒤에서 붙잡고 있던 브링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모든 문제는 단 하나로 귀결됩니다.”
단유의 음성이 모인 이들의 표정을 깨뜨렸다.
“폐하, 폐하는 왕으로서의 자격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