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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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단유는 말끝을 흐렸다. 무턱대고 답을 내놓으면 엘라바인이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엘라바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모든 사회에는 수많은 집단이 형성될 수밖에 없어요. 작게 보면 가정을 이루는 가족 단위도 그런 집단의 한 부류일 거예요. 또 직업상 함께해야 하는 길드도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런 집단의 최종적인 형태라고나 할까요? 그걸 우리는 국가라고 할 겁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 동의를 한 후 이루어져야 한다.
“······.”
그러나 쉽게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사람은 개별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을 도모하기 힘들기에 집단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어요. 가족이 단지 혈연 때문에 구성되는 우연한 관계일까요? 가족이란 단위도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소의 집단체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의미를 전제하고 설명해볼게요. 실제로 살아가면서 인간이 받는 위협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봐야겠죠. 특히 엘라바인과 같은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한밤중에 도둑이 몰래 들어와 칼로 위협하면 어떨까요? 혹은 엘라바인보다 강한 힘을 가진 남성이 위력 행사를 하며 엘라바인을 공격한다면?”
“저 혼자라면 그저 당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엘라바인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비슷할 거예요. 사실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이라도 그 경우엔 비슷하리라 생각돼요. 이런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홀로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그런 인간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앞서 말한 조직인 거죠.”
“이해했어요. 가족도 어찌 보면 그런 안전과 생존을 위한 조직이라는 의미.”
“그런 의미는 계속 확장되었어요. 그래서 가족과 가족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또 그 마을이 모여 마침내 국가가 된 거죠.”
엘라바인도 어느새 앞에 식어가는 수프가 있다는 것을 잊은 듯 보였다.
“그럼 국가의 역할이 뭘까요? 아까 엘라바인이 말한 건 바로 이 역할에 대한 것이었을 거예요.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 이유. 바로 이 국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지 않고 안전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국가가 만들어진 이유일 겁니다.”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 없던 엘라바인은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이렇게 들으니 그간 가지고 있었던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엘라바인이 조건을 걸었어요. 그냥 나라가 아니라 강한 나라라고. 강하다는 것이 뭘까요? 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 과연 강한 군사력을 가지면 그 나라는 강한 국가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럼 엘라바인은 군사력이 강한 나라에서 살고 싶나요? 그런 나라가 엘라바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나라인가요?”
“제가···원하는 나라요?”
“네.”
“······.”
“어떤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강하기만 한 나라가 과연 살기 좋은 나라냐는 단유의 물음은 엘라바인이 가지고 있던 어떤 편견을 뒤흔드는 질문이었다. 침묵이 잠시 내려앉은 틈에 바깥에서 골목을 지나는 순찰대가 흔들어대는 종소리가 들렸다.
****
“그가 그런 이야기를 너와 했었다고?”
“그래.”
엘라바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피의 떨림도 멎어있었다.
“그래서, 아니, 그런데 그게 사령관을 데려온 것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넌 원래 만일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어. 만약 계획에 문제가 생겨서 너한테 연락이 갔었으면 어떡하려고 그랬던 거야?”
엘라바인이 고개를 틀어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 그들의 동료는 물론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제피에게로 고개를 돌린 엘라바인이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제피···. 난, 이제 우리의, 아니 왕의 계획에 순순히 따르고 싶지 않아졌어.”
“왜? 그가 해준 이야기 때문에?”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어.”
“왜? 그가 정말 강한 나라가 되는 법을 이야기 해줬어?”
“아니. 그는 강한 나라가 되는 법은 이야기해주지 않았어.”
“그럼?”
“내가 살고 싶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줬어.”
“그래서 네가 살고 싶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데? 어떤 나라이기에 동료들을 배신한 거야?”
“배신이 아니야?”
“네가 한 건 배신이야. 사령관을 데려왔다고? 우리 계획에서 사령관은 에강위에 한 발짝도 들여선 안 되는 거 몰라? 아니면···그가 혼자 궁에 들어온 거야?”
엘라바인은 고개를 저었다.
****
어둠 속에서 걸어와 모습을 드러낸 사령관이 왕과 마주하니,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령관.”
“폐하.”
잠시 두 사람이 말없이 마주보고 있으니, 브링이 발을 한 번 굴리며 사령관을 시선을 돌렸다.
“사령관은 뭐하시오? 폐하께 예를 올리시오!”
사령관은 순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점령군 사령관 비고(Biggho tamoas), 귀환을 보고합니다.”
왕이 사령관을 바라보다 물었다.
“사령관.”
“예, 폐하.”
“누가 자네에게 귀환을 지시하였는가?”
“······.”
“혹시 내가 자네에게 귀환하라 명을 내렸던가? 내가 나도 모르게 자네에게 귀환 명령서를 보냈던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나 몰래 나의 명령인 척 가짜 명령서라도 내렸던가? 누군가 나 몰래 인장을 찍어 자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던가?”
“아닙니다. 자의로 귀환한 것입니다.”
“자의? ···그래, 좋아. 그 문제는 차치하고, 내가 자네에게 내렸던 마지막 명령은 무엇이었던가?”
“점령지를 안정시키라는 명이었습니다.”
“점령지는 안정되었는가?”
“거의, 그렇습니다.”
“거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공국 내에 수많은 유랑민이 발생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일부 유랑민들은 치안이 부재한 틈을 타 도적이 되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상황이며 에토신스의 점령지에서 그런 도적들이 없진 않으나 교국의 점령지에 비하면 극히 적은 편이라 확인되었습니다.”
“변명이지 않은가? 결국 내 명령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채로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귀환했다는 것 아닌가?”
“예, 폐하.”
“허, 그런 주제에 대답은 곧잘 하는군. 무슨 생각인가, 사령관?”
사령관이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왕이 아닌, 그 너머의 단유를 향했다. 시선을 따라간 왕의 고개가 단유를 향하자, 단유가 한 걸음 나섰다.
“드디어 다 모였군요.”
단유의 시선이 사령관에게 향했다.
“죽음도 불사하고 적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사령관님과.”
몸을 틀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로를 바라보았다.
“꺾이지 않는 충성심으로 제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는 신하와.”
다시 몸을 돌려 왕에게로 향했다.
“타협하지 않는 왕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놈!”
“과연 이번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브링!”
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칼을 들이밀며 브링이 단유에게로 달려들려 할 때,
번쩍.
근위병들이 들고 있던 몇 개의 횃불에 의지해 주위를 밝히던 대전 안이 환해졌다. 브링이 놀라 칼을 모로 세우며 방어 자세를 취하며 물러서는 동시에 왕의 앞을 가로막으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다. 갑작스런 광채에 놀란 왕은 체면도 없이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의 충직한 근위병들도 잠시 이성을 잃고 바닥에 엎어지거나 몸을 틀며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왕이 게슴츠레 눈을 떠 보니, 사령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그러나 슬픈 눈빛으로, 사이를 가로막은 근위병들의 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순간 자신이 미천한 평민들마냥 부복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얼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야의 반대편에 있을 마법사가 어떤 짓을 할지 몰라서였다.
“폐하.”
어느새 브링이 다가와 왕을 부축하니, 그제야 주춤대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돌리니 대낮마냥 환한 빛이 대전의 천장에서 비추는 가운데, 그 환한 빛무리 속에서 단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은 변화가 없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저 눈빛이 자신의 실태를 보며 조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절로 이가 갈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단유는 그런 왕의 표정 변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태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충직했던 신하들을 죽이고, 여물지 못한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칼받이와 칼잡이로 사용하여 이루려 했던 왕의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여기 오랜 세월 에토신스를 위해 평생을 바친 신하와, 그저 당신의 명이라며 군사를 이끌던 장군 앞에서 말씀해 보십시오.”
“내가 못 할 것 같은가? 그보다 내가 왜 그런 말들을 늘어놓아야 하는가? 나는 왕이다!”
“왕은 나라를 이끄는 수장이지만, 그 수장이 내키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희생당하는 건 수 많은 백성들, 힘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책임을 왕은 느끼지 않으십니까?”
“내 백성이고 내 신하들이다. 그들의 생사여탈은 내 손에 있으니, 내가 내 것을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인가?”
“그 대답, 제가 대신 드려도 되겠습니까, 폐하.”
왕의 고개가 돌아갔다. 단유가 보인 놀라운 마법에 모두가 추태를 보이는 와중에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비고! 그에 앞서 그대는 내게 먼저 고해야 할 것이 있지 않던가? 자네는 정녕 저자가 불러 이곳에 온 것인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씀드렸다시피, 전 제 자의로 온 것입니다.”
“왜? 무슨 일로 온 것인가?”
“폐하를···막기 위해서입니다.”
근위병들이 술렁거렸다.
****
“물었어, 그에게. 내가 원하는 나라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기껏해야 하급 귀족의 친척에 불과한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나라를 바꿀 수 있냐고.”
“그래서 우리가 이 조직에 들어온 거였잖아.”
“그래. 하지만 조직과 폐하께서 이루려 하는 나라는 내가 원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니, 어쩌면 내가 이루고 싶은 나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왜?”
“그가 말했어. 모래로 쌓은 성은 바람에 흩어지고, 피로서 쌓은 성은 빗물에 씻긴다고. 설령 우리의 계획이 성공한다고 해도, 이 나라는 오래 가지 않을 거야.”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폐하가 언제나 옳은 판단을 내리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 만약 그럴 때 왕에게 충언을 해 줄 신하가 있을까?”
“왜 없겠어?”
“네가 할래?”
“······.”
“난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왕의 의견에 반대를 하는 순간, 지금 우리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오로지 왕의 뜻에 따라야만 하는 나라가 되겠지.”
“그 생각을 못 했던 건 아니야. 하지만 폐하가 약속했다고 했어.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더 이상 아픈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우리같이 젊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앞에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셨다잖아? 고루한 생각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가로막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셨고,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 생각에 동의한 거잖아.”
엘라바인은 제피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단유도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어쩐지 제피는 진짜로 그렇게 믿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어서, 상대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강하게 상대의 말에 반론만을 펼치는 친구의 모습에 엘라바인은 무거움 한숨을 내뱉었다.
“그···루치드가 말했어. 만약 내가 가진 이상(理想)이 바른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사령관을 만나보라고.”
“왜?”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어. 하지만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내가 느끼는 의문도 조금 풀어질 거라고 말이야.”
“그럴 거면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하지, 왜 사령관을 만나라고 한 거지?”
엘라바인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령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생각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