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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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이 자네를 조심하라 전했던 말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가로가 신음인지 침음인지 구분하기 힘든 소리를 뱉으며 대전 가운데 기둥에 몸을 기댔다. 기대려 기댔다기보단 무릎에 힘이 풀려 쓰러지기 직전 기둥에 가로막혔다고 봐야겠다.
단유는 창턱에서 손을 떼고 축축히 젖은 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물’을 소환하는 마법을 성공시켰다는 희열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로서 한 계단을 올랐다는 기쁨보다 그 계단을 오름으로서 자각하게 된 자신의 위치가 너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게 표현하면, 모든 일에 중립적인 포지션을 취하는 관조자, 혹은 관찰자겠지만 사실은 그저 방관자, 방조자였을 뿐이었던 단유였다.
대자연이란 환경에서 물은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고 순환한다. 억지로 그 흐름을 비틀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만다. 그러니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흐르도록 놔두는 것, 그 흐름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했다.
강국을 꿈꾸는 왕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신하들 사이의 충돌, 그리고 그로 인한 희생은 안타깝지만 거기에는 단유가 개입할 부분이 없었다. 이곳, 에강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저 흘러가는 긴 시간의 한순간이었고, 긴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 이방인이며 외부인인 단유가 힘으로 개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혁명을 꿈꾸냐고? 정확히 말하면 혁명이 일어나길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단유가 주도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그때, 대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대전 너머 긴 통로의 끝이 서서히 밝아졌다. 불빛이 커감에 따라 소리도 커지더니 마침내 일단의 무리들이 대전의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왔다. 한참 전 요란스럽게 떠났던 무리가 횃불을 들고 요란스럽게 귀환했다.
“너, 마법사의 짓인가?”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분명한데도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것마냥 생소하게 들리는 왕의 물음이었다.
근위병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왕은 대전 가운데 서 있는 가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이어 창가 쪽에 서 있는 단유의 모습을 발견한 뒤 침을 삼켰다. 진짜 마법사.
“네.”
단유의 대답을 들은 왕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번 자네가 나에게 해줬던 그 말, 그것은 사실인가?”
“네.”
“그대로만 한다면 분명···되는 것인가?”
“네.”
가슴이 조금 더 빨리 뛰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인지 숨소리가 거칠어졌지만, 이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자신도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실히 보였다. 마법사가 분명한 이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이가,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증언했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법사만 될 수 있다면, 겨우 살아남아 지금 이 시간에도 밤거리를 내달리며 달아나고 있을 귀족들 따위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리고 마법사. 왕은 단유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 나와 함께 하겠는가?”
“······.”
왕은 단유가 자신의 행사를 막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나를 돕겠다면 나 역시 그대를 돕겠다. 나를 도와 에토신스를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지 않겠는가? 나를 돕는다면 나 역시 자네를 대륙 제일의 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돕겠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근위병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왕의 자신만만한 시선과 달리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
“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들어보니 자네는 학문을 많이 아낀다고 들었다. 만약 자네가 날 돕는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만들어 자네에게 주겠네. 어떤가?”
“필요 없습니다.”
“권력을 주겠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 어떤가?”
“부질없는 권력입니다.”
“자네가 여태 갖지 못했던 것이기에 모르는 것이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네. 오래전 그 많던 마법사들이 왜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이겠나? 그저 힘만 있다고 태평하게 살 수 없는 법이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 왜 머뭇대는가? 힘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네. 하지만 권력과 재물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하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마법사로서 한평생 살다 갈 생각인가? 그대가 나의 학자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지식을 넘겨 준 이유가 무엇인가? 자네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아닌가? 명예. 존경. 그것이 자네가 바라는 것인가? 내가 그걸 돕겠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그리고 가장 존경받는 학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위인으로서 남을 수 있도록 자네를 돕겠네.”
“······.”
“나를 돕게. 그리고 나와 같이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나라를 만드세. 북쪽의 제국도 이루지 못한 강한 나라. 자네와 함께라면 이 대륙 전체를 통일한 국가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폐하.”
“그래, 말해보게.”
왕의 들뜬 목소리와 달리 단유의 음성은 식어버린 대전 밖 공기만큼이나 차분했다.
“낮에 이곳에서 했던 저의 말을 잊으셨습니까?”
“뭐?”
“폐하께서 누리시는 권력, 부귀, 영토. 모두 폐하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계시겠지만, 그것은 폐하의 것이 아닙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왕의 눈빛에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정녕 그 헛소리를 다시 지껄일 셈인가?”
“특히, 폐하를 따르던 사람들을 폐하의 손으로 없앤 마당이니 더더욱 폐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뒤에서 듣고 있던 가로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마법사의 진심을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는 왕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만 같기에 혹시 왕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마법사가 궁에 도착한 뒤, 왕과 나눴던 대화가 모두 연극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또다시 저렇게 왕의 화를 돋우니,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 방관자일 뿐일까 싶었다. 어느 것이 진짜 마법사의 모습이란 말인가?
“닥쳐라! 그들은 나를 따르는 척만 했을 뿐인 이들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나를 능멸하려 했던 이들이다!”
“교만하며 오만하며 자만하는 왕의 최후를 상상하십시오. 그것이 폐하의 마지막일 것입니다.”
단유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이내 왕이 고함쳤다.
“여봐라!”
근위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칼을 세웠다. 그러나 낮과는 분명 다른 모습. 무작정 기세를 드러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명령에는 따르나 상대가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음을 알게 되니 두렵기도 하겠지. 브링은 그런 부하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당장 자신도 두렵긴 마찬가지였으니. 다만 자신이 목숨을 잃을까 두렵다기보다는, 끝내 왕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운 것이었다.
“저자를···.”
“폐하.”
결국 왕의 명령을 막으며 브링이 끼어들었다.
“뭐냐!”
“······.”
브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간절한 눈빛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부디 헤아려주시길.
그러나 그때 단유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방관자입니다.”
왕과 브링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왕을 도울 생각도 없으며, 죽은 이들을 대신해 복수할 마음도 없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추악한 행태를 모른 채 살아갈 수많은 이들을 선동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저 미개할 따름인 이곳을 억지로 바꾸지도 않을 겁니다.”
단유가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폭정을 행하시든, 선정을 베푸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조언하자면, 폐하가 가지신 그 사소한 욕심들이 폐하의 꿈을 꺾게 만들 것입니다.”
왕이 이를 드러내며 조소를 입에 머금었다.
“정녕 오만한 녀석은 너로구나. 오냐, 두고 봐라. 내 반드시 네가 일러준 방법대로 따르겠다. 그리하여 마법사가 된 후, 가장 먼저 너를 찾겠다. 너를 찾아 보여주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왕,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왕, 가장 많은 백성을 거느린 왕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폐하.”
단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 대전의 통로 쪽으로 향했다.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걸음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근위병들이 들고 있는 횃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근위병들은 동요했다. 아니, 근위병보다 더 동요한 것은 브링이었다.
“장군!”
공국을 점령하기 위해 떠났던 사령관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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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내로 침입하여 소동을 벌였던 이들이 귀족들을 쫓던 그 시간, 눈 앞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떨던 제피는 외진 곳에서 숨을 돌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조직, 왕이 다른 신하들 몰래 조직한 비밀 조직의 일을 역사적 사명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어떤 일과 마주해도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신념과 무관하게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버틸 수 없었다.
그를 부축한 조직원이 자신을 달래며 괜찮다고 위로하곤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떠난 후, 제피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이렇게 약한 인간이었어?’
마법사가 자신에게 각오가 되었냐고 물었을 때, 당당하게 대답했던 것은 고작 어린 마음에서 나온 치기였던가 후회도 되었다.
‘아니야, 처음이라서 그래.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 역시 자신처럼 처음일 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처럼 무력하지 않을뿐더러 눈에 독기를 품고 저렇게 움직이는가? 결국 각오의 문제인 걸까?
“제피!”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놀라 눈을 뜨고 바라보니, 엘라바인이었다.
“엘라바인! 어떻게 여기?”
알기로 엘라바인의 역할은 대기조였다. 그래서 아지트에서 대기하다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말은 어딘가 문제가 생겼다는 말일까?
의문이 담긴 제피의 시선에도 엘라바인은 걱정스런 눈초리로 제피를 살필 뿐이었다.
“어디 다친 거야?”
“아니야. 그보다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엘라바인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사실은, 사령관이 왔어.”
“사령관? 무슨 사령관?”
“점령군 사령관.”
“장군이?”
엘라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금? 아니 어떻게? 아직 올 때가 아니잖아?”
엘라바인은 다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수상하게 보여 다시 물으니, 그제야 대답했다.
“내가···사령관에게 갔었어.”
“···왜?”
그 순간, 엘라바인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실패하면 그 결과는 매우 혹독할 텐데, 이를 무릅쓰고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이죠?”
단유의 물음에 엘라바인은 대답했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더 좋은 나라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이 나라가 힘이 없어서예요.”
왕이 겨우 결단을 내려 영토를 넓히긴 했지만, 왕의 옳은 결정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았다. 오래도록 지속된 귀족들의 가문은 그들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왕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래서 왕의 의견에 반대만 한다. 왕은 그런 귀족들이 없어야 나라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과 믿음에 엘라바인은 동의했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물이 부족해서, 땅이 척박해서 고통받는 나라는 없어요. 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가 강해져서 더 넓은 땅을 얻게 된다면 우리의 삶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귀족들이 사라지면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믿나요?”
“지금의 폐하는 역대 어느 왕보다 강하고 현명하신 분이에요. 그분의 의지가 나라 전체에 퍼져야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어요.”
단유는 수프를 떠먹던 스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로 인해 희생당할 이들이 많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엘라바인도 스푼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식욕이 당기지도 않았으니 미련도 없었다.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해요.”
“본인의 판단인가요?”
“···모두의 판단이기도 하고, 저도 동의해요.”
단유는 가만히 엘라바인을 바라보다 말했다.
“강한 나라, 강한 집단을 꿈꾸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진정 강한 나라는 왕이 강한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그래요. 군사도 많아야 하고 뛰어난 기사들도 많아야겠죠.”
자신이 만약 남자였다면, 제피처럼 밤에 동료들과 함께 훈련장에 가서 칼을 휘두르는 연습을 했을 테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단유의 한숨이 수프를 더 차갑게 식히는 것 같았다.
“진짜 강한 나라의 힘은 왕이 아닌,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이요? 어떤 사람들이요?”
“엘라바인의 이웃들 같은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을 모두 군사화시켜야 한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칼은 그저 폭력의 수단에 불과해요. 엘라바인은 폭력이 힘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전쟁을 하려면···.”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에요. 전쟁을 하지 않고도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