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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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폐하께서 이런 일을 벌이셨는지 아는가?”
단유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털어 넘기며 대답했다.
“아니요.”
“폐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뭐?”
“제가 알아야 할 이유는 아닐 듯 합니다.”
자신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종이에 적혀 있는 뜻 모를 글자들과 문양일 뿐이라는 듯, 종이를 들어 보이니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가로는 이내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자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지. 그러나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으니 한 번 들어봐 주게.”
단유의 침묵이 대답을 대신한다고 생각했던지 가로는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의 폐하는 젊고 패기가 넘치시는 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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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끝나면 공국으로 군사를 보내라.”
왕의 결정에 신하들은 반기를 들었다.
“폐하, 신중히 결정하셔야 합니다.”
“폐하. 비록 지금의 공국이 매우 곤궁한 처지에 처하긴 했으나 이를 틈타 이득을 도모하는 것은 지난 세월 두 나라가 공고히 쌓아 올린 신뢰와 우정을 저버리는 행위이옵니다. 돕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들의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면 뭇 나라들의 지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공국 점령에 대한 논제는 지난 겨울, 궁을 뜨겁게 달궜던 주제였다.
“자네는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물론 저는 위대한 에토신스의 신하이옵니다. 허나 폐하. 이것은 단순히 에토신스의 국력을 올라가는 정도에 그칠 이야기가 아니옵니다. 교국과의 마찰 문제도 고려해야 하지만, 만에 하나 공국이 교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저희 나라가 보인 행태는 온 대륙에 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공국이 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젊은 왕은 그런 신하의 부탁을 거절했다.
“교국과는 이미 협의가 끝났다.”
“폐하!”
“더는 반론을 제기하지 말라. 이는 왕의 명이다.”
어느 누군들 자국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반대할까? 그러나 친우처럼 지냈던 나라의 위기를 이용하는 것은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이니 분명 국제 사회에서 비웃음거리, 손가락질 받을 일이다. 이는 공국의 작은 영토를 꿀꺽 삼키는 정도의 이득보다 훨씬 큰 손해였다.
그런 계산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에토신스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예부터 물자가 부족했던 에토신스는 타국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공국으로부터 그런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만약 공국이 나쁜 마음을 먹고 물류의 유통을 막았다면 진작에 에토신스는 말라 죽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동안 공국의 도움을 많이 받은 국가였다는 뜻이다. 공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아야 할 것인데 이를 이런 식으로 갚게 되면 향후 에토신스는 어찌 될 것인가?
반면 왕의 결정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언제까지 우리가 다른 나라의 도움을 빌미로 눈치보며 살아야 하는가.”
공국의 넓은 평야를 얻게 되면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왕의 계산이었다.
마침내 에토신스는 공국의 영토를 침범했고, 마침내 공국의 영토를 점령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과정에서 왕과 신하들간에 생긴 마찰은 왕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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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살기를 바라며 피를 토하는 신하들의 비명과도 같은 부름에도 근위병들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왕의 눈은 그저 차가웠다.
“이 나라는 옛적부터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너희들 같은 늙은이들 때문이야. 무조건 반대만 외치는 이들. 그저 과거에만 집착하는 늙은이들. 너희는 이 나라를 좀먹는 기생충 같은 이들이야.”
“폐하! 폐하! 제발!”
살려달라 구호의 외침이 철문을 때리는 그 순간에도 앞 열의 신하들은 근위병들이 찔러넣는 칼날에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더 넓은 왕국, 더 강한 왕국을 만들 때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을 쌓고 강한 기둥을 세워야 할 때다. 그런데 그 반석이 갈라지고 비틀어진다면 어떤 기둥을 세울 수 있겠는가?”
철문을 때리는 힘이 약해졌다. 드디어 철문 가까이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뒤에서 미는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앞에 섰던 이들이 물러서거나 달아났다. 당장은 어디로든 피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미 궁 내에 침입했던 이들이 이곳으로 몰려오는 상황. 목숨을 갈망하던 그들의 절실한 발놀림은 차가운 칼날과 뜨거운 불길 속에서 허망하게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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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충성의 결과가 이리되니 어쩐지 허망하다는 생각도 있네. 하지만 폐하를 원망할 생각은 없네. 어쩌면 이것은 폐하께서 주도하실 새로운 흐름일 수 있으니. 분명 이 나라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네. 더 넓은 땅, 더 많은 백성들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통치도 그에 맞춰야 할 것. 고리타분한 신하들이 폐하의 앞길을 막으면 안 될 일이겠지. 그러니 신하된 이로서 폐하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
“그게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신가요?”
가로는 터벅터벅 걸어 옥좌가 놓여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옥좌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서 펜을 집어 들고 뭔가를 적었다. 이후 길지 않은 글을 적어 접은 종이를 단유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들고 내 집으로 가면 집사가 안내해 줄걸세. 거기서 자네가 찾고자 하는 걸 찾게. 내 이야길 모두 들어준 값이네.”
단유는 종이를 받아 품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하자면, 만약 폐하께서 자네의 목숨을 진정으로 위협하지 않는다면 부디 폐하의 적이 되지 말아주게.”
“충신으로 이름을 남기고픈 건가요?”
“기왕 이리 된 거 충신으로 이름을 남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단유는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아까 왕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고 한 거 기억하십니까?”
가로의 끄덕임을 확인한 단유가 다시 창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던 단유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왕과 신하들 사이의 반복에 제가 개입할 부분은 없었습니다. 사실 왕이 이런 대규모 학살극을 꾸민 이유를 왕의 젊음, 패기, 자신감 따위로 해명하는 가로 님의 설명도 쉽게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런 고상한 어휘로 해석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사방으로 달아나는 귀족들과 그 뒤를 쫓는 침입자들 사이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정원은 불타고, 불길은 커지며, 노을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제 눈에 이 나라는 저 노을처럼 보입니다. 빛이 저무는 하늘. 별이 떠오를 거라고요? 아니요. 별은 구름에 가리고 오롯이 빛나길 바라는 달은 만월을 지나 그믐을 향해 가죠.”
가로를 향해 잠시 시선을 던졌다.
“이 땅에서 위로받을 사람은 오로지 저 궁전 밖 사람들 뿐입니다. 그들 외에는 저의 관심도, 호기심도, 동정도 받을 이가 없습니다.”
단유는 뻗은 주먹을 펼쳤다. 손바닥을 드러내고 가만히 바깥을 향하는 동작에 가로의 시선이 절로 따라갔다.
보랏빛을 하늘을 가리던 검은 연기가 점점 옅어졌다. 아니, 흐려졌다. 흐려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절로 사라진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가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 단유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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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뒤에 서 있던 브링은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궁 밖은 물론, 궁내에 있던 근위병들의 다수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비록 같은 ‘근위’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소속이 모두 달랐던 탓에 생긴 비극이었다. 궁 외부의 근위대대 순찰병과(兵科), 그리고 궁 내의 근위대대 경비병과(兵科)는 해당 병과 담당 귀족들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근위병들만이 왕의 직속으로 명령을 받았다. 왕은 그들이 귀족의 편에 서서 자신과 대립할까 걱정했고, 때문에 일을 계획할 때 그들을 최우선으로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
“어차피 근위병들은 새로 뽑아서 키우면 되잖나?”
브링은 훌륭한 기사이며 동시에 지도자였다. 왕은 브링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 정도 수준의 근위병들을 키울 수 있다고 보았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이미 죽음을 맞이한 타 병과의 근위병들도 브링의 가르침을 받았던 부하였었다는 사실은 왕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그 작전을 물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는 왕의 기사, 오로지 왕의 손과 발이 되어 적들을 물리쳐야 하는 입장이지 왕의 머리, 왕의 혀가 되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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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를 위해 충성을 다한 신하도 뜻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불태우는 미친 왕과, 그런 왕마저도 충성해야 한다며 삶을 포기한 신하, 동료들을 배신한 병사들. 그들에게 궁전 밖에서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단유의 나직한 음성에 가로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물이 부족하여 생기는 곤란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나라가 강해지길 바란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부국강병일까요?”
감은 두 눈에 질끈 힘을 준 단유의 이마에 땀이 송글 솟는가 싶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와 밖으로 내밀었던 단유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그것이 점차 많아지면서 가로는 경악했다.
“서, 설마!”
작은 물방울이었던 것이 점차 단유의 손 전체를 흠뻑 적실 정도가 되었고, 이내 대전 주위를 뜨겁게 달구던 열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정도로 떨어져 내렸다.
곧 바람이 불었다. 바람과 뒤섞인 물방울들이 불길을 안으로 감싸듯 빙빙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검은 연기를 삼키고, 다음 붉은 불길을 삼켰다. 검게 그을렸던 땅의 모래와 흙들도 집어 삼키니 어느새 강한 회오리가 되었다.
처음으로 단유의 마법을 바라본 가로는 그 장엄함에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 이것이 마법이라고?”
단유는 그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달아나던 이들을 쫓던 침입자들도 갑자기 내린 빗방울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둘러보니 주변을 태우던 불길도 어느새 폭우에 씻겨 사라졌고, 특히 대전 근처에 생긴 어마어마한 회오리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뒤쫓던 귀족들이 멀어져 가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달아나던 이들도 옷이 흠뻑 젖는 폭우에 놀라 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그들의 생존 본능은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걸 느꼈는지 다시 발을 놀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닫혀 있던 철문이 천천히 열리며 근위병들이 나오고 그 뒤를 왕이 뒤따라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려?”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내리기 시작한 폭우에 멍한 시선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던 왕은 곧 검은 회오리를 발견하고 설마 하는 생각을 가졌다. 고개를 돌려 브링을 바라보니, 브링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지 무거운 눈빛으로 대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자.”
어디로 가자는 말도 없었지만, 브링이 곧 대답했다.
“위험합니다.”
“그가 있는 한 어딘들 위험하지 않겠는가?”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도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담할 수 있는가?”
“······.”
“나는 왕이다. 그리고 이곳은 나의 땅이며, 나의 궁이다.”
왕이 먼저 걸음을 옮기니 브링이 얼른 그의 앞에 섰다.
“앞장 서라.”
“폐하.”
“막을 생각이냐?”
“저에겐 폐하의 안전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그자와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때, 정말 거짓말같이 폭우가 멈췄다. 땅이 젖어 있지 않았다면 비가 내린 게 환상이었던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폐하!”
왕은 브링을 지나쳤다. 근위병들이 브링의 눈치를 살피다 왕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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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자네가 한 것인가?”
검은 회오리도 금방 잦아들며, 어느새 하늘은 좀 전의 맑았던 그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하늘 끝을 물들였던 보랏빛도 이게 거의 사라지고 정원을 환히 밝히던 불도 모두 꺼져버리니 어둑해진 사위가 가로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어슴푸레 비치는 달빛을 받으며 존재감을 드러내던 단유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가로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를 거예요. 그리고 그 흐름 속에 자연히 이 세상도 변하겠죠. 하지만 그 변화는 왕을 위한 것도, 귀족을 위한 것도 아니에요. 변화는 이 땅에 사는 이들을 위해 변해야 합니다.”
단유는 어둠에 어울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 후 가로가 물었다.
“자네는···혁명을 꿈꾸는가?”
“아니요.”
단유는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한 달과 별을 눈에 담았다. 구름이 사라진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저는 그저 방관자일 뿐입니다.”
방관자이며 관찰자일 뿐인 단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