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30화 (730/956)

붕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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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병들의 호위 속에서 도망가던 왕이 끝내 다다른 곳은 굳게 닫혀진 검은 철문 앞이었다.

브링이 지시를 내리니 곧 한 근위병이 다가와 철문을 열었다. 넓지 않은 철문이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통과하기 어려워 보여 뒤에서 고개를 빼내어 바라보던 이들이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브링이 먼저 철문을 통과하고 그 뒤를 왕이 넘어갔다. 그리고 줄줄이 근위병들이 뒤따랐다.

“이보게,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난 재무대신이야. 내가 먼저 들어가도록 해주게.”

근위병들을 붙잡고 으르는 귀족들의 말에도 근위병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집고 들어오려는 귀족들을 밀어내며 사나운 눈을 부라릴 뿐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근위병이 철문을 통과하고 뒤따르던 귀족이 허겁지겁 서둘러 철문을 넘어가려 할 때, 그의 가슴을 강하게 밀치며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손길이 있었다. 바닥에 엎어지며 ‘어이쿠’ 소리 내는 고위 귀족의 항변에 주변의 귀족들이 영문을 몰라 할 때, 철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문을 열어주게! 어서!”

그러나 근위병들은 철문을 닫은 뒤, 빗장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이봐! 들여보내 주게!”

“문 열어줘! 살려 달라고!”

아우성이 빗발쳐도 철문 건너편에서 지켜보는 근위병들의 차가운 눈빛은 일말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다. 칼도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연약한 손으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이 커질수록 더 강해졌다.

****

가로는 단유가 건넨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다시 단유에게 건넸다.

“이것과 같은 거라고는 대답하기 힘들지만, 분명 본적이 있네.”

“어디서 보셨나요?”

“대답보다 먼저 자네에게 답을 들어야겠네.”

추리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추리가 아니라 짐작이었다. 이곳에서 쓰는 글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다른 나라의 언어가 아닐까, 라는 가정이었다. 물론 그 가정은 쉽게 부정(否定) 당했다. 다른 나라에서 쓰는 글이었다면, 그 흑의인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곳에서 쓰이지 않는 글자와 문자’이라고 말했으니, 이 세계에서 쓰는 글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의 글인가? 이 가정도 일리는 있었다. 당장 단유 본인이 다른 세계의 글과 언어를 습득하고 있는 마당이니. 그러나 단유가 살던 곳에서는 본 적도 없는 문자 체계였으니, 또 다른 세계를 가정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가정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이 세계와 시공간적으로 다른 세계를 상정할 수 있도록 돕는 힌트가 있었으니, 바로 ‘신’의 존재였다.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 이와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교국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테다. 그러나 교국이 공국과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비록 승전국이 되었으나, 교인이 아닌 사람이 공국에서 교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당한 각오를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신’이란 존재에 접근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었으니, 바로 에토신스의 ‘볼레로’ 가문이었다.

마침 에토신스의 수도에 유명한 학자들과 수많은 자료가 산처럼 쌓인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거니와, 에밀리아와 사울른을 위해서 자신이 한동안 에토신스에 머무는 것이 그들의 안전을 멀리서나마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이라는 판단이 곁들여져 단유의 에토신스행이 결정되었다.

에토신스로 온 직후, 볼레로 가문을 바로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에토신스의 고위 귀족인 그를 쉽게 만날 수는 없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에토신스에 온 직후, 호기심에 도서관을 먼저 방문했던 것이 그와의 만남을 미루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이라면 도서관에서 생각 외로 많은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고, 그중에서도 에토신스의 고위 귀족들에 대한 자료 역시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연인가?”

“반은 우연이었어요.”

“반은?”

울스프가 고대 마법에 대한 기록이라며 보여주었던 기록을 살피며 단유는 의아함을 느꼈다. 울스프는 자신의 아버지가 작성한 ‘회고록’의 내용과 고대 마법에 대한 내용이라고 추정한 기록의 유사성에 집착했지만, 단유는 두 기록이 개별적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유사성은 오직 그 두 문건에서만 발견되고 그 외의 자료들에서는 그와 유사한 표현을 찾기 힘들었던 때문이다.

이후 고대 마법에 대한 기록이라며 울스프가 모았던 자료들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그 자료들에서 단유는 그것이 마법이 아닌 또 다른 초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판단했다.

“또 다른?”

“오해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어떤 현상의 발현에 대해, 그것의 과학적 혹은 이성적 해석이 불가능한 경우에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또는 미신적인 해석으로 현상을 이해하려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간단하게 말하면 개기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현상, 혹은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미스터리는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주제이지만 그것에 대한 충분히 합리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해 메꿔지지 않는 부분을 채운다. 그것으로 전설 혹은 신화가 완성된다.

단유는 그러한 자료들 중에서 특히, 에토신스의 특정 가문에 대한 수많은 신화들을 만나게 되었다.

“볼레로 가문은, 이렇게 표현하면 이상하겠지만, 보통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쓰지 않으면서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는 인세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얻었고, 어떤 이는 듣도보도 못한 질병을 뿌리며 인근에 죽음을 전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볼레로 가문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즉 신의 행사가 있었다고 믿게 된 것이죠.”

“믿는다, 라. 그럼 자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가?”

“볼레로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정말 신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의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확실히 볼레로 가문이 잊혀지고 있음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될 수 있다니.”

“뭐,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볼레로 가문을 직접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은 곳이니까요. 그런 곳이라면 혹시 도서관에도 수집하지 못한 것들이 ‘가보’나 그 외 비슷한 종류의 유산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하고요.”

“만약 없다면 어떡할 건가?”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다행히 그렇진 않은 것 같네요.”

“···속을 읽히는 느낌이란 게 이런 뜻이군.”

가로는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길은 사람만 태우고 마는 것이 아니라 궁내의 정원을 모조리 불태우며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속을 잘 읽는 이가 어찌 왕의 속은 모른단 말인가?”

단유는 뜨거워진 공기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 손길을 따라 바람이 불며 공기를 밀어냈다. 잠시 놀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가로의 시선을 느끼며 단유가 대답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안단 말인가?”

단유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저 제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따름이죠.”

“허어.”

가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과연, 사령관이 말했던 것처럼 무서운 이였어.”

****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져도 안에서는 어떤 화답도 들리지 않았다.

“열어줘! 열어달라고!”

거친 말, 험한 말이 교양있는 고귀한 귀족들의 입에서 터져 나와도 근위병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명 소리가 더 커지며 주변을 에워쌌고, 귀족들은 오직 그 철문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철문을 붙잡고 흔들었다.

철컹철컹.

“죽기 싫으면 당장 열어!”

“이 개 같은 자식들아! 빨리 이 문 열어!”

그때 어깨 위로 뽀얗고 하얀 가루들이 뿌려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어떤 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징후임을 익히 보았던 귀족들이 앞으로 밀착했다.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다른 이들을 자신의 뒤로 보내기 위한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평소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고위 귀족들을 손과 발로 밀쳐내며,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손가락이 어딘가를 할퀴고 살점이 손톱 끝에 떨어져 나가도 양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생존을 위한 투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철문을 흔들던 이들은 뒤에서 밀려오는 힘에 짓눌려 비명을 내지르지만 양보는 없었다.

그때, 철문을 지키던 근위병들이 물러섰다. 그리고 귀족들이 보이는 추잡한 행태와 거리가 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등장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뛰어가던 왕이었다.

“폐하!”

“폐하, 제발 문을 열어주십시오!”

철문의 작은 창으로 왕이 모습을 드러내니 마침 그곳을 통해 건너편을 보던 귀족들이 소리를 질렀다.

왕은 근엄한 표정으로 슬며시 오른손을 들었다.

“폐하!”

더 큰 목소리로 왕을 부르짖으니, 왕의 펼쳐진 손바닥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철문 근처에 섰던 근위병들이 뒤로 물러섰다. 영문을 모르지만 조금 전 변화가 없던 상황보다는 나은지라 더 큰 목소리로 폐하의 은덕을 바라는 귀족들의 목소리였다.

왕이 주먹에서 검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근위병들이 칼을 꺼내 들었다.

“뭐···.”

반응할 틈도 없었다. 철문의 작은 창으로 칼날이 비집고 나오니 가장 앞에서 철문에 붙어 두드리던 귀족의 얼굴이 꿰뚫렸다. 어디를 노리고 찌른 것이 아니어서 귀족의 얼굴은 엉망으로 찢겨졌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뒤에 서 있던 이들의 가슴에도 칼날의 끝이 헤집고 들어갔다. 철문의 바깥에 붉고 진한 피가 튀어 올랐다. 칼날이 빠지며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귀족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뒤에서 계속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빠진 공간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졌고, 곧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했다. 앞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뒤섞여 끔찍한 살인의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억지로 앞으로 밀고 갔던 이들의 처절한 하소연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다시 칼날이 비집고 나와 얼굴을 찢고 눈을 꿰뚫으며 목을 베었지만, 뜨거운 불길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저 앞으로, 또 앞으로 밀고 나갈 뿐이었다.

****

“언제 알았는가?”

“지금 이 사태가 왕이 계획한 것을 말인가요? 아니면 왕의 욕심을 말인가요?”

“둘 모두.”

“왕의 욕심은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습니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던 왕.

“이 사태에 대해서는 왕이 저를 불러 억지를 부릴 때 눈치를 챘고요.”

“그 전에는 몰랐다는 말인가?”

“왕이 따로 부리는 비밀 정보 조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가.”

“눈에 띄더라고요. 저만 감시하는 게 아니라 연구실 내 학자들을 따로 감시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요. 아마 다른 귀족들에게도 그리 사람을 붙였으리라 예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허허, 참···. 당연히 마법사이니 범상치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리 들으니 확실히 자네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하군. 오히려 자네가 ‘볼레로’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거기에 가로님은 포함되지 않았던가요?”

“그럴 리가. 우리 집에도 폐하가 보낸 첩자가 숨어 있었네. 다만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을 그가 모르도록 하려고 했을 뿐이었지.”

“그럼 가로님도 오늘의 일을 알고 있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나?”

“물어봐 드려야 할까요?”

“하하하. 사실은 그게 볼레로의 힘이지.”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더 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가로였다.

“신의 시험을 통과한 이에게 신의 축복이 내린다는 것은 우리 가문의 비밀 아닌 비밀이지. 아, 물론 자네는 믿지 않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난 그 시험을 어렸을 때 통과했었고 덕분에 남들이 잘 모르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 그 능력으로 폐하가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폐하가 우리 집에 심어놓은 첩자가 누군지도 알 수 있었네.”

“신의 축복이란 건가요?”

“어쩌면 이것은 그저 저주일 거야. 저기 죽어가는 이들 중엔 나의 오랜 친우라 불리는 이도 있으니까.”

단유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왜 도망가시지 않으시나요? 지금이라도 피하면 도망갈 길이 있지 않을까요?”

“도망갈 길이나 있을까? 그보다 도망가면 뭐하나. 어차피 폐하께서 사람을 보낼 텐데.”

씁쓸한 미소를 짓는 가로였다. 어차피 죽을 운명, 이란 생각이 지금 단유와 뜨거워진 대전 안을 지키는 이유기도 했다.

“포기하신 건가요?”

“딱히 여기서 죽겠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긴 하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네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만 말이야.”

대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 왕이 근위병과 귀족들을 이끌고 갔던 방향에서 또 다른 불길이 치솟으며 하늘 위로 검은 구름과 비명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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