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5) - 수정(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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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이만 가시지요.”
브링은 다시 간곡한 어조로 왕에게 피신을 권했다. 혹여 그것이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진 않을까 걱정하며. 그러나 왕은 그런 브링의 진심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다. 이미 앞에서 자신의 긍지를 긁어댄 단유 때문이었다.
“이 나라는 나의 것이다!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감히 누가 나의 것을 탐내려 하는가!”
“폐하.”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린 단유가 왕의 분노 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물론 이 나라는 폐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폐하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왜냐하면 이 나라에 사는 이들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라는 것이냐! 나는 왕이다! 이 땅의 통치자! 이 땅 위에 숨 쉬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며 나의 명에 따라야 하는 법이다!”
분노한 왕의 선언은 바깥의 소란도 잠시 잊게 할 정도로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가 왕의 선포에 움찔할 때, 단유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뭐라!”
단유의 다음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브링이 칼을 뽑아 들고 왕의 앞에 섰다.
“그 입 닥쳐라!”
단유의 말을 막은 브링은 단유를 바라본 채로 왕에게 고했다.
“폐하. 실례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브링의 등을 바라보던 왕은 점점 가까워지는 소란을 느꼈다. 결국 왕은 브링의 청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브링이 먼저 앞섰고 그 뒤를 왕이 뒤따르며 단유의 곁을 지나갔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섰을 때, 왕은 단유를 쏘아보았지만, 단유는 아무 느낌도 없다는 듯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왕의 뒤를 근위병들이 뒤따라 나갈 때까지 대전 내에 모여 있던 많은 귀족들은 나가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했고, 겨우 자신들이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대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인 단유를 흘깃 바라보긴 해도 다들 밖으로 달아날 생각밖에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그 자리에 단 한 사람, 단유만 남아 있는 듯 싶었으나 그 말고도 나가지 않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뒤 마려운 사람들마냥 허겁지겁 뛰쳐나가던 이들과 달리, 그는 차분한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단유 앞에 섰다.
“결국 이리 되는군.”
그는 단유의 어깨 너머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고, 단유도 고개를 틀어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렇네요.”
“이 나라에 사는 이들은 사람이다, 라고 했던가?”
“네.”
“사람이라. 그렇지. 사람은 이게 있으니까.”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보이던 그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속 시원하게 지르니 어떤가? 좋은가?”
단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그렇네요.”
“왜 그런가?”
“제 의견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아요. 사실 이전에는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정확히는 단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주는 어른들이 없었다. 어린 놈이,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같은 하대를 받으며 단유의 이야기를 곱게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비록 화를 내긴 했지만 왕이라는 이도 단유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지 않았던가? 적어도 무시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단유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제 의견을 이해해줄 이가 많지 않다는 게 조금 섭섭하기도 하네요.”
현대 지구에서 만큼의 지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생활을 해오던 이들이기 때문일까?
“자네가 폐하께 건넨 이야기는 그야말로 파격일세. 폐하라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 어떤 왕, 황제를 만나더라도 비슷한 반응이었을 거네.”
“이해합니다.”
그저 몇 마디 말로 깨우치고 뉘우치리라고는 단유도 상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말이라도 던져놔야 이후 어떤 계기로든 바뀔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말을 꺼냈다.
“무턱대고 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군. 난 또, 자네가 일부러 폐하의 화를 돋우려 한 건인지 궁금했었거든.”
“그렇게 생각하신 것 치곤 꽤 왕의 편을 드셨습니다.”
“내 사정이야 어떻든, 지금은 폐하의 신하로서 존재하기 때문이지.”
“그런가요?”
“사실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었네. 저러다 마법이라도 쓰는 건 아닐까 해서 말이야.”
“아까 저에게 죽이라 명하셨을 때, 정말로 제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분명 마법을 썼을 겁니다.”
“그랬다면 나도 이렇게 편히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겠군.”
노을을 짓누르는 어둠의 무게를 느끼는 것 마냥 무거운 고갯짓으로 주억거리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던 대전은 오히려 괜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기가 흘렀건만,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뒤의 텅 빈 대전은 반대로 열기가 스멀스멀 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바깥에서 난 소란의 영향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우리도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야 하지 않겠나? 여기 있다간 원치 않게 구운 오리 요리처럼 새까맣게 그을려 버릴 것 같은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활짝 열린 대전의 입구 쪽이 아니라 아지랑이가 올라오기 시작한 창가 쪽이었다. 그의 움직임에 마주 보던 중년의 귀족, 가로 역시 뒤를 따랐다. 창턱에 손을 얹고 밖을 바라보니 후끈한 저녁 바람에 매운내가 코를 찔렀다.
“두렵지 않으신가요?”
“곧 이곳을 불태울 저 불길을 말인가, 아니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천재 마법사를 말인가?”
“천재라고 불리기엔 모르는 게 많아요.”
“듣기 싫진 않나 보군.”
문자 그대로 잿빛의 연기가 정원을 메운 바람에 평소의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아니면 검게 그을린 채로 허우적대는 근위병들의 마지막 모습 때문일까, 가로는 눈을 찌푸렸다.
“노을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했었네. 나의 마지막도 저 노을처럼 아름답게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지은 죄가 많다 보니 어쩌면 저 연기에 섞인 잿가루처럼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그럼. 많이 지었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만했고, 거만했었네. 젊었을 적엔 겸손함을 몰랐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감사할 줄 모르네. 그러니 신의 축복이 다 무슨 의미겠는가.”
단유가 슬쩍 가로를 바라보니, 정원의 불길을 눈에 담은 그의 눈에 회한이 엿보였다.
그때 궁전 바깥으로 달아나던 일단의 사람들이 불길을 피해 둘러가다 복면을 쓴 이들과 마주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윽박을 지르고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가 비명 속에 섞여 들려왔다.
“아마도 지옥은 이런 모습이겠지.”
단유는 침묵을 지켰다.
“고민하는가?”
“고민이요?”
“자네는 누구 편인가?”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그런가.”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오고 다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고성과 비명이 눈앞의 아지랑이를 뒤흔들었다.
“안타까운 일이야.”
“막으실 수 있으신 일 아니십니까?”
“내가? 못하네. 난 겁쟁이거든.”
창틀에 올려둔 손을 떼며 가로는 몸을 바로 세웠다.
“난 두려움이 많네.”
가로는 몸을 틀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우리 가문은 신의 축복을 받은 가문일세. 오랜 과거에는 신의 저주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선대의 어른 중 한 분께서 말씀하셨네. 그것은 축복이었다고. 다만 신의 축복을 하찮은 인간의 뜻으로 헤아리지 못해 그저 저주라고 원망했던 것이라고 말씀을 남기셨지.”
“축복과 저주는 한끝 차이겠죠.”
“그 말이 정답이네. 그리고 그 한끝 차이를 우리가 만들었지. 그리고 저주는 날 겁쟁이로 만들었네.”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근위병들의 일부와 다시 맞붙은 침입자들이 분투를 벌이는 동안, 귀족들의 일부가 근위병이 벌어준 시간을 이용해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일부는 침입자들에게 붙잡혀 바닥에 널브러지기도 했다.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 자, 이제 말해 보세. 나에게 그 쪽지를 보낸 이유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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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 있는데, 여기 책상 좀 정리해 주시겠어요?”
단유는 그렇게 부탁을 남기고 찾아온 근위병들과 함께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서관에 남은 포아테지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단유의 부탁에 따라 그가 머물렀던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두루마리 아래에 깔린 접혀 있는 종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적혀 있는 글을 읽고 포아테지는 단유의 진짜 부탁이 바로 이것임을 깨달았다.
망설이던 그는 이내 결심하고 그 종이를 품에 집어넣었다. 대충 책상 위를 정리한 뒤, 곧 도서관을 뛰쳐 나갔다.
“계십니까?”
“누구요?”
“도서관에서 일하는 포아테지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이 댁 나으리께 건네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이리 주시오.”
“제가 직접 전해야 합니다.”
“주인께선 댁에 안 계십니다.”
“어디 가셨소?”
“궁으로 모이라는 전갈을 받고 나가셨소.”
포아테지는 집사에게 쪽지를 건넸다. 집사는 접혀 있는 종이의 겉면에 적힌 단유의 부탁을 발견하고는 포아테지를 바라보았다. 포아테지가 사정을 설명하니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집사는 직접 궁으로 가서 주인에게 그 쪽지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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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국에서 에토신스로 향할 때부터 뵙고 싶었습니다.”
“날?”
“정확히는 볼레로 가문의 사람을 뵙고 싶었습니다.”
단유의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가로 볼레로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볼레로, 라···. 아직도 우리 가문에 대한 신비가 남았던가?”
그도 세간에 떠도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저 어린 아이들 사이에나 거론되는 신비로운 가문, 이라는 이미지를.
“아니요.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뵙자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슨 일인가?”
단유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혹시 이걸 알아보실 수 있으신가요?”
단유가 건넨 종이를 받아든 가로가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어디서 구한 것인가?”
단유가 건넨 것은 바로 예전, 단유를 죽이려 들었던 흑의인들의 본거지에서 봤던 ‘방정식’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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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왕의 앞을 막던 침입자 한 명이 브링의 칼질 한 번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쓰러진 남자에게 잠시 머물렀던 시선을 거둔 왕은 계속 걸음을 이어갔다.
그의 뒤로 일단의 근위병들이 주변을 에워싸는 식으로 왕을 보호했고, 근위병의 뒤에서는 본능적으로 왕의 근처가 제일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뒤따르는 중이었다.
그들의 안전이야 브링에게는 별로 중요한 점이 아니었고, 그들을 따로 돌볼 여력도 없었다.
또 한 명의 침입자가 건물 옆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왕이 지날 때 뛰쳐나왔으나 왕의 뒤를 따르던 근위병들이 빠르게 다가와 침입자의 칼을 막아낸 후, 능숙하게 칼을 뒤집어 상대의 가슴을 헤집었다.
다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이를 뒤로하고 왕의 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별궁이 있었는데, 그곳은 왕의 가족, 왕자와 왕비가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입구부터 진득하게 뿌려진 핏자국, 그 위에 어지러우리만큼 찍혀 있는 발자국들이 브링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왕에게도 그것은 그대로 확인되었다. 브링이 돌아보니 왕이 턱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브링은 근위병 여럿을 시켜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근위병들은 명에 따라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계속 움직이셔야 합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와 왕비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생존이었다.
다시 발을 뗀 왕을 따라 근위병들과 귀족들이 줄을 이었다. 귀족들은 어미 새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새끼 새들처럼,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면 금방 어미 새에게 버림을 받을 처지라는 걸 자각한 것처럼 최대한 왕의 가까이에 붙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바로 그때, 근위병들의 뒤를 쫓을 뿐이었던 그들의 머리 위로 하얀 가루가 뿌려졌다.
“뭐, 뭐야?”
당황스러워하는 귀족들의 물음은 곧 불길로 화답 받았다.
“으아악!”
마침 불꽃이 점화되어 큰불로 이어지는 곳의 중심에 있던 귀족은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불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몇 걸음 걷다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격렬하던 움직임도 서서히 멎어갔다. 그의 비참한 죽음을 끝까지 지켜봐 준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불행을 함께하는 동지들은 있었다.
점점 바닥에 숯처럼 새까맣게 타며 쓰러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도 옷에 붙은 불씨를 떼어내기 위해 미친 듯이 팔을 저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근위병들을 향해 구원 요청을 했다. 그럴수록 근위병들은 더욱 완고하게 벽을 세우고 그들이 행여 왕에게 피해를 전가할 수 없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근위병들이 귀족들을 제대로 보호해 줄 의사를 보이지 않자, 몇몇 사람들은 행렬에서 벗어나 각자 살 길을 찾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벗어난 이들도 끝내는 하얀 가루 속에 피어오르는 불길에 잡아 먹히거나, 혹은 둘 셋으로 짝을 짓고 다가오던 침입자들의 칼날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