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28화 (728/956)

붕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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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수도 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사람들이야 아직 모르고 있다 할지라도, 궁에 가까운 곳을 지나던 이들은 소란에 놀라 도망가거나 혹은 사태를 확인하기 위해 궁으로 몰려들었다. 그 때문에 거리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 사람들 틈바구니를 엘라바인이 헤치며 지나가던 바로 그 시각.

소란의 주범인 침입자들 중 한 사람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에 무릎이 떨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복면을 썼지만, 겉으로 드러난 두 눈동자는 쉴새 없이 떨렸다. 눈앞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다 쓰러지고 마는 검은 형체의 근위병을 눈에 담고 있던 그는 바로 제피, 타구르를 모시던 학생이었다.

“끄아악!”

불길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고 마는 그를 바라보며, 그리고 동시에 생전 맡아본 적 없던 악취를 느끼며 제피는 벌벌 떨었다.

문득 그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각오, 했어요?”

며칠 전, 마법사가 자신에게 물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

그가 모시는 타구르라는 분은 그리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관심을 보이며 연구하던 주제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사실 그런 점이 제피가 타구르의 학생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주목받는 선생의 밑에 있으면 접하는 정보가 많으니 유리한 면도 없잖아 있겠지만, 그보다는 대부분 학자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목적이 더 크기에 제피는 타구르 밑에서 수학(受學)을 결정했다.

얼마 동안은 타구르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연구동 내를 오가다 보니 역시나 주워듣는 이야기도 많았고, 바쁘지 않은(?) 선생님 덕분에 돌아다니기도 좋았다.

그러나 얼마 후, 연구동 내에 변화가 생겼다.

“마법사의 동태를 파악하라.”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제피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자들이야 혹여 수상쩍은 행동을 발견한다쳐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동료가 된 티코로부터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마법사의 행적에 대해 미리 들었던 탓이기도 했지만, 역시 ‘마법사’라는 선입견은 제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처음엔 그래도 괜찮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별나지 않았고, 주변에서 보던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순 없어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를 관찰했다. 다행히 그는 울스프의 연구실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고,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제피는 본인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타구르가 마법사와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 일 없던 타구르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덩달아 자신도 마법사의 지근거리에서 동석하게 되었다.

‘괜찮아. 모를 거야.’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려고 노력했다. 가끔 타구르가 자기 이름을 불러 무언가를 시킬 때면 움찔거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끔 마법사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갈 때면 제피는 간이 움츠러들고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마법사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타구르의 연구실에서 나올 때면 오늘 하루 무사했음을 하늘에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마법사가 무엇을 연구하는가?”

마법사가 무엇을 알아보고 있는지, 그리고 마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오라는 지시에 하마터면 상관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날 이후로 제피는 귀를 기울이고 눈으로 단유를 쫓았다. 단유가 연구실을 나간 뒤 타구르와 함께 있을 때면, 괜히 타구르에게 말을 붙여 성실한 학생의 표본인 양 행동했다.

그러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단유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들의 급작스러운 결정에 제피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잔뜩 긴장한 채로 단유의 곁에서 그가 지식하는 것들을 수행했다.

그는 딱히 곤란한 것을 부탁하진 않았다.

“날씨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주시겠어요?”

“이곳의 농업에 관한 자료들이 있나요?”

“역대 왕조에 관한 기록도 있나요?”

군말 없이 신속하게 자료를 찾아 대령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받으면, 제피는 도리어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모종의 일을 준비하느라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던 때, 제피는 어김없이 단유의 옆에 시립하여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다. 사실 다른 선생님들 같으면 사소한 요구들―이를테면, 차를 가져오라거나 벽난로를 데우라거나 바닥 청소를 시키거나 책상 정리를 부탁하거나 하며 제피가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봤을 텐데, 단유는 어쩌다가 자신이 찾는 자료를 찾지 못할 때만 도움을 구할 뿐, 그 외에는 제피가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가 있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온다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이였다.

가만히 있으니 이런 잡생각이나 하는구나, 정신을 차리자고 자신을 독려할 때쯤이었다.

“제피?”

잠시 방심한 틈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제피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무슨 일로···?”

제피는 눈을 껌뻑거리며 단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만히 있으니까 심심하지 않아요?”

제피는 속을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저도 계속 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괜히 졸려서요. 그냥 가벼운 이야기나 좀 나누며 잠을 쫓을까 하는데, 귀찮으면 말하세요.”

“귀찮다니요? 선생님들이 모두 인정하시는 석학이신데, 그런 분의 말동무가 된다는 건 영광입니다.”

“그렇게 과찬하실 거 까지야. 아, 여기 앉으세요.”

이때, 제피가 생각한 건 어디 사느냐, 몇 살이냐, 왜 학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느냐 같은, 그러니까 학생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자들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묻던 질답같은 것이었다.

“늘 주변을 경계하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네?”

밑도 끝도 없이 들어온 질문이 제피의 가장 감추고 싶은 부분을 훅 찌르고 들어왔다.

“주위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경계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는 행위가 종종 보여서요. 어떤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는데, 대답하기 어려운 건가요?”

제피는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단유의 시선도 마주하기 어려웠다. 발가벗겨진 느낌, 이라는 게 바로 이런 때 쓰는 거구나, 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타구르가 다른 학자들과 토의할 것이 있다며 나간 뒤, 단유와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단유가 제피를 불렀다.

쭈뼛거리며 단유에게 다가간 제피에게 단유가 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죠?”

“···전 잘 몰라요.”

“쉽지 않을 거예요.”

“······.”

“각오, 했어요?”

“···각오는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막상 닥치면, 쉽지 않을 거예요. 제피를 무시하는 말은 아니에요. 저도 그랬으니까.”

제피가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떨궜다.

“제피.”

다시 제피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제피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웠다. 비록 지난번에 어찌어찌 하다보니 대화를 깊게 나누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지 못한 제피였다.

“걱정이 많은 눈치예요.”

마법사는 사람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 때문에 마법사인 걸까? 사실 아니라고 했지만, 점차 시간이 줄어들면서 제피는 자신의 미래가 점점 불투명해진다는 기분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거룩하다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다들 숭고한 목적으로 거사에 동참한 마당이다. 막말로 그의 동료들은 미래는커녕 죽음을 불사하고 각오를 다지는 판인데 자신은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분에 점점 우울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시시때때로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제가 도와줄 건 없나요?”

“루치드, 당신이 도와준다고요?”

“제피가 속한 조직의 일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건 제가 손댈 수 없는 문제니까. 다만 제피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걱정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다는 거예요.”

“왜 제게 잘해 주시는 거죠?”

“제피도 제게 잘 해줬잖아요?”

“전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게 고마워서 그래요.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전 제피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이렇게 공부도 할 수 있었고요.”

“루치드도 공부가 필요한가요?”

“그럼요. 전 공부를 하지 않을 것 같아요?”

“루치드는 모르는 게 없잖아요?”

“아뇨. 전 모르는 게 많아요. 그리고, 공부란 건 평생을 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군요.”

“제피도, 어떤 목적으로 이 길에 들어섰든, 나중에라도 계속 이 길을 계속 걷길 바랄게요. 제 생각엔, 제피가 학자가 되면 분명 이름을 널리 떨칠 거예요.”

“제가 무슨···.”

딴 목적이 있어 학생으로 들어온 것인데.

“평소 제피가 여기 있는 책들과 두루마리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보면 알 수 있어요.”

제피는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눈을 대여섯 번 정도 껌뻑이며 감정을 털어내려 애쓰고는 말했다.

“그냥 제 할 일을 한 것 뿐이에요.”

“그래요. 그게 제피의 할 일인 거죠. 그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진짜 자기 할 일. 그걸 보통 직업이라고 해요. 제피에겐 이게 진짜 직업인 거예요.”

이번엔 진짜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피. 제피의 각오를 무시할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더 멀리 보세요. 단지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제피에겐 제피의 인생이 있어요.”

“이제 와서 도망칠 순 없어요.”

“도망치란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쩌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준비해요. 도망을 염두에 두는 것도 계획이에요.”

“루치드도 도망친 적 있나요?”

“늘 도망치는 중이죠.”

단유의 입가에 띈 쓸쓸하고 허전함이 느껴지는 미소에 제피는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지 몰랐다. 둘 모두 말없이 있다 보니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피는 뭔가 다른 식으로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아무 말이나 뱉었다.

“지금부터라도 칼을 쓰는 법을 배우면 좀 괜찮을까요?”

단유는 제피를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역시···어렵겠죠?”

“글쎄요? 전 칼을 써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모르는 일이죠. 어쩌면 제피에게 칼을 다루는 재능이 숨겨져 있어서 갑자기 재능이 만개할지도?”

농담이라 생각하며 제피도 단유처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운 게 사실이에요. 근위병들은 평생 칼을 휘두르던 이들인데, 저희가 아무리 숫적으로 우위에 선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고.”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 문득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왜 그러세요?”

“음, 이래도 되나 모르겠는데.”

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싸움이 될 텐데, 도망칠 계획이 없다면 그 결과도 뻔했다. 그래서 단유는 잠시 망설이다 이야기했다.

“혹시 이런 건 어떤가요?”

****

“준비가 끝났나?”

“급히 준비하긴 했지만, 다행히 협조적이어서 물량을 모두 맞출 수 있었습니다.”

사실 물량을 어느 정도로 맞춰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최대한 많은 양의 밀가루를 모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밀가루를 주머니에 꾹꾹 눌러 넣는 일은 수작업으로 해야 했기에 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행이군.”

비방트가 고개를 끄덕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도를 휘두르던 제피를 바라보았다. 제피가 ‘우연히’ 얻어온 정보를 토대로 실험했을 때 하마터면 자신도 불길에서 갇혀 버릴 뻔 했다. 그 실험으로 효과는 입증되었는데, 문제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양을 준비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양을 준비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겨우 사전에 말해 둔 목표치를 달성했다는 이야기를 지금 들은 것이다.

비방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는지, 제피도 칼질을 멈추고 비방트를 바라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비방트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다시 목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살아남을게요.’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단유가 말한 자신의 적성이 만약 학자와 잘 맞는다면, 거사가 끝난 뒤 꼭 자신도 학자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목표를 다지니 더욱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눈앞에서 검은 재로 스러져가는 근위병들을 보니 하반신으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제피의 어깨를 거칠게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놀라며 돌아보니 함께 거사에 뛰어든 동료였다.

“뭐해? 정신 차려.”

밀려들어오는 불길에서 물러선 두 사람은 곧 다른 이들처럼 불길을 멀리 돌아 궁내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에 집결했다.

“가자!”

검은 두건을 올려 쓴 비방트의 한 마디가 괜히 먹먹한 느낌을 주었다.

“악!”

그 느낌을 잊기 위해 힘껏 소리친 제피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정문을 발로 걷어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곳에 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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