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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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여 있던 창으로부터 밀려 들어온 붉은 노을 자락이 왕의 얼굴을 물들이던 그즈음이었다. 왕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던 그때, 때 아닌 소음이 바깥으로부터 들리니 가장 바깥쪽에 섰던 근위병들부터 변화를 눈치채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이가 얼른 몸을 빼서 대전 밖으로 달려나가는 동안에도 바깥의 소음은 좀 더 커졌고, 이제는 대전 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바깥의 이변을 알아챘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다들 대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을 하고 있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그 와중에도 왕과 단유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깥의 소음이 점점 커지며 가까워져도, 그에 맞춰 좌중의 수군거림과 동요가 커져 가도 둘의 시선은 못에 박은 듯이 고정되어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폭도들이 처들어 왔습니다!”
“뭐? 폭도?”
높은 귀족 출신들인 이들은 더욱 당황하고 허둥대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에토신스의 길지 않은 역사에 가끔 반란을 일으키려는 멍청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궁내에까지 쳐들어 온 적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왜 하필 그게 지금이란 말인가?
그래도 한편으로는 주위를 둘러싼 수 많은 근위병들을 눈에 담으니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왕의 뒤에서 잔뜩 긴장한 채 단유를 경계하던 브링이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를 들은 일부 근위병들이 경계를 풀고 대전 밖으로 뛰어나갔고, 나머지 근위병들은 안팎을 동시에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바깥의 일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단유는 그들이 경계해야 하는 제1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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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밖보다 궁 안에 더 많은 경비―근위대가 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아무리 대전 안에 많은 근위병들이 모여들었다고 해도 궁 전체의 수비를 소홀히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궁 내 경비 임무를 맡아 돌던 근위대들과 침입자들 간에 거센 충돌이 벌어지는 건 당연하다.
수도 내 순찰대 본부를 털어 무장을 한 침입자들이 칼을 꺼내 들고 근위대와 맞섰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잘 때까지 칼을 손에 쥐고 시도 때도 없이 훈련만 하는 이들과 무기를 맞대봐야 결과는 뻔했다.
천둥소리를 방불케 하는 거센 충돌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어찌나 힘이 세고 빠른지 침입자들은 칼질 한 번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래도 1:1이 아니라 근위병 한 명에 두세 사람이 동시에 상대했기에 한 사람이 위험하면 다른 사람이 시선을 끌거나 방해해서 큰 피해를 막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근위병들을 압도할 순 없었다. 결국 이런 싸움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 다른 근위병들이 보충할 시간을 주게되고 침입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결과를 미리 짐작도 못할 침입자들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침입자들이 품에서 뭔갈 꺼내 들었다. 단단히 밀봉된 그것은 가죽으로 된 작은 주머니였다. 그들은 주둥이를 여미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풀고 근위병들에게 집어 던졌다.
당연하지만 근위병들도 그것을 순순히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설령 맞더라도 무슨 큰 피해가 있겠냐 마는 대부분은 칼로 쳐내거나 몸을 틀어 주머니를 피했다. 가죽 주머니는 터지거나 혹은 주둥이를 물고 있던 끈이 완전히 풀리며 내용물이 밖으로 튀어나와 비산하기 시작했다. 근위병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에 대비해 뒤로 물러서거나 입과 코를 가렸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바라본 그것은, 그저 흔한 밀가루였다. 허공에 뿌려진 밀가루로 인해 시야가 잠시 가려지는 기분에 근위병들은 칼을 세우고 경계심을 높였다. 마치 인위적으로 안개를 만들어낸 것처럼 주변이 밀가루들과 먼지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뿐이었고, 그 틈을 타 근위병들을 공격하는 이는 없었다.
‘뭐지?’
그러나 주머니를 투척한 침입자들이 어느새 횃불을 집어와 던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은 크게 변했다.
―화르르
그것은 마치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짐승은 그저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붉은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커다란 입을 벌려 근위병들을 삼켜버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피할 틈도 없이 온몸에 뜨거운 불이 붙어버린 근위병들은 칼을 집어 던지고 두 손을 휘휘 저으며 얼굴에 붙은 불길을 잡으려 허둥대지만 삽시간에 타들어가는 불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넓은 궁 내 정원을 물들이던 붉은 노을은 진짜 불길이 되어 주위를 검게 태워 나갔고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끔찍한 비명들은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
“피하셔야 합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온 근위병의 외침에 대전에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브링이 손을 들어 지시를 내리자 근위병들이 칼끝을 앞으로 세우고 준비 태세를 갖췄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귀족들을 향한 일갈에 허둥대던 귀족들이 옴짝달싹 못하고 눈치만 봤다.
“폐하. 우선 몸을 피하셔야겠습니다.”
그러나 왕은 섣불리 발을 떼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단유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네가 벌인 일이냐?”
“아니요.”
“기가 막힌 타이밍이 아닌가? 네가 곤궁에 처한 이 시점에 때맞춰 폭도들이 나타나 감히 나의 궁을 침범한다? 가능한 일인가?”
“놀라운 일이지만, 제가 무슨 힘이 있어, 그리고 무슨 의도로 그런 일을 꾀할까요?”
“그야 모르지. 하지만 자네가 감추는 진실이 한두 개가 아니어야 말이지. 짐작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네. 하마터면 나도 깜빡 속을뻔 했지만 천운이 따른 셈이야.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라고? 가뭄? 물이 썩어? 하하하! 놀랍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모든 게 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를 그러게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니 말이야. 하긴 사기를 치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법이지. 듣는 사람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몰아쳐야 하는 법이지. 공포심을 자극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 하하하! 정말 대단해!”
말미에 왕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손뼉을 쳤다. 하지만 그의 말에 동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전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왕의 말에 집중할 수 없도록 하였다.
왕이 손가락을 들었다. 브링이 한 발 다가왔다.
“죽여라.”
브링이 단유에게 시선을 주었다. 담백하기 이를 데 없는 눈. 왕으로부터 사기꾼이라는 모욕을 받았음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법사. 그가 진짜 마법사인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가짜라는 확신도 없다. 그런 와중에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우선 몸을 피하십시오.”
“죽여라.”
“폭도들이 더 가까이 오게 되면 위험합니다. 우선 안전을 확보한 뒤 명에 따르겠습니다.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처의 최우선 목표입니다.”
왕이 피한 다음이라면 마법사를 상대로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수도 있지만, 왕이 있으면 그럴 수 없다.
왕은 조소를 흘리며 단유를 쏘아본 뒤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던 찰나, 단유가 입을 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폐하의 것은 아닙니다.”
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단유를 돌아보았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폐하의 신하도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역할이 있는 법입니다. 마굿간지기에게는 마굿간지기로서의 역할이 있고, 농부에게는 농부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근위기사에게는 근위기사로서의 역할이 있으며, 국무를 맡아보는 대신들에게는 대신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고···당연한 말이지만 왕에게도 왕의 역할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고 물었다!”
“한 사회에서 각자가 역할을 맡아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 사회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기 위함입니다.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당연히 어딘가가 고장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역할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비꼬는 왕의 질문에도 단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폐하께서 영토 확장에만 집중하는 사이, 이 나라에 사는 이들이 갖는 불만이나 불편을 제대로 해소해주지 못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불만? 불편? 웃기는 소리. 감히 누가 나에게 불만을 가진단 말인가!”
화를 참지 못한 왕의 일갈에 단유는 시선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과 화염이 뒤섞여 붉어진 바깥 하늘이 눈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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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단유와 마찬가지로 붉은 하늘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 하늘 아래 높이 솟아 오른 궁전의 탑을 함께 눈에 담으며 가슴께에 올린 두 손을 마주 쥐고 있는 이는 바로 엘라바인이었다.
‘루치드.’
지금쯤이면 그녀가 속했던 조직원들이 궁 내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 있진 않았지만 거친 싸움의 소란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 그 거친 싸움터의 가운데 서 있을 루치드의 모습도 슬쩍 그려졌다.
며칠 전, 정확히는 단유를 은근히 떠보려다 실패했던 그 날 이후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리니 단유가 왔다.
“오셨나요?”
단유는 옅은 미소와 함께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은 엘라바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권했고, 단유는 언제나처럼 방에 들어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려던 때, 함께 앉은 엘라바인이 단유의 식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엘라바인?”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엘라바인이 지레 놀라 단유를 쳐다보니 단유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엘라바인은 이 일을 왜 하는 거예요?”
잠시 멈칫했던 엘라바인이 이내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다.
“왜긴요. 돈을 벌려고 하는 거죠.”
“단지 돈 때문에?”
“먹고 살려면 그래야 하니까요.”
“돈이 되나요?”
“···많진 않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되거든요.”
“그렇군요.”
단유의 질문이 그렇게 마무리되나 싶었다.
“함께 일하는 분들도 그 정도로 돈을 버는 건가요?”
“···네?”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잠깐 잠겨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이를 부끄러워할 틈은 없었다.
“함께 일하시는 분들도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건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엘라바인이랑 같이 일하는 이들 있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저 말고는 이 저택에 오는 사람은 없어요.”
시치미를 뗐지만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지 자연스럽게 수프를 떠 마시며 말을 이어나갔다.
“엘라바인이랑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니 표현이 이상한가요? 아니면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정확할까요?”
엘라바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단유를 향했다. 단유가 그 눈을 마주보며 대답을 기다리니, 엘라바인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알게 됐어요.”
엘라바인이 어떤 의도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전에는 그 의도가 설령 자신을 감시한다거나 혹은 다른 목적이 있다 해도 자신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고 해서 그저 모른 척 했을 뿐이다. 딱히 들켜서 위험한 부분도 없었고, 자신의 사생활이 누군가에게 속속들이 읽혀진다고 해도 자신의 행동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변했고, 단유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 앞서 함께 지낸 엘라바인의 속내가 궁금했다.
“당신의 무리가 어떤 일을 꾸미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그들이 저를 상대로 뭔갈 하겠다면 모르겠지만, 엘라바인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설령 무언가를 한다 해도 겁을 내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처음부터 작정하고 들어온 이라 해도 한동안 함께 생활하며 자신의 편의를 봐주던 엘라바인이 걱정되었다.
“그런 것도 마법으로 알 수 있는 건가요?”
엘라바인의 질문에 단유가 피식 웃었다.
“아니요. 그건 마법이 아니었어요.”
“그럼 제가 뭔가 들킬만한 빌미를 줬던가요?”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몰랐을 거예요.”
“혹시 저를 미행했나요?”
“아니요. 아시다시피 전 도서관과 연구실에만 있었는걸요.”
“그런데 어떻게···.”
엘라바인은 더 이상의 질문을 잇지 않았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단유에게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저희는 당신이 저희의 계획에 방해가 되진 않을지 감시했을 뿐이에요.”
“제가 오기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나 보군요.”
“네.”
“그래서, 엘라바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계획인지 물어보지 않나요?”
“그것보단 엘라바인의 생각이 듣고 싶어요. 만약 당신들이 하려는 일이 실패한다면 그 실패의 대가는 혹독할 텐데, 그런 결과를 무릅쓰고 이렇게 일을 벌이는 이유가요.”
그의 눈빛과 그의 말에서 엘라바인은 그가 어쩐지 자신을 이해해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 뒤로 엘라바인과 단유는 수프가 차갑게 식은 뒤에도 한참을 이야기 나눴다.
그때의 기억을 잠시 떠올렸던 엘라바인은 붉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동료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듯, 자신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었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