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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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썩는다는 단유의 말에 사람들은 처음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뭄보다 더 해괴한 이야기로군.”
“마법사는 진실만 말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나?”
사람들의 반응만큼이나 왕도 꽤 혼란스러운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것 역시도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인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로 대전이 잠시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곧이어 발을 굴러 이목을 집중시키는 왕의 행동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결국 단유로서도 곤란한 질문이 찾아왔다.
“지금으로서는 그 사실을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단유의 대답에 몇몇은 역시나, 라는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고, 몇몇은 매우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단유를 살폈다. 그리고 왕은 이죽거리며 단유를 추궁했다.
“뭐냐? 설마 마법사인 네가 거짓을 말한 것인가?”
“증명하지 못한다 해서 거짓은 아닙니다.”
“거짓이 아니라면 왜 증명하지 못하는가?”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한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구? 허, 고작 그것 때문인가? 그렇다면 말해 보라.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네가 원하는 도구를 만들 수 있게 지원해주마.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보라. 얼마나 필요한가? 얼마가 들면 네가 원하는 도구를 만들어 네가 말한 것들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단유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고, 침묵을 지키는 단유를 보며 왕은 코웃음 쳤다.
“사기꾼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허튼소리로 뭇 사람들을 심란케 하고 민심을 어지럽혀 혼란을 야기한 뒤, 뒷주머니나 챙기려는 수작이었음을 들키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단정을 내렸음이 비치는 왕의 엄포였다.
단유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니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커졌고, 왕은 그 수군거림을 방관했다. 많은 귀족들과 근위병에 둘러싸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마법사를 보니, 사실 그도 알고 보면 별거 없는 인물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레 겁을 먹었던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저자, 정말로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정말 마법사인 건 맞을까?’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믿기 힘든 게 사실이고, 설령 가까운 이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들, 그자들조차 어떤 꿍꿍이속을 가지고 자신을 속이려는지 모른다. 여기 있는 신하들 중 진심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만약 그들이 모두 충신이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면, 언제나 브링을 곁에 두고 궁 내를 돌아다닐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대답을 하지 못하는 단유를 보며 왕은 피식 웃음을 흘릴 뻔했다. 곤궁에 처한 단유가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물이 썩는다는 것은.”
단유의 입이 열리니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아마도 냄새나 맛으로 다들 아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 마시는 물에서는 그런 징조가 없으니 다들 제 말을 믿지 않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단유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좌중을 둘러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단유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물이 썩는 이유는 산소가 모자란 상태에서 미생물이 물 속에 있는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냄새가 나는 부산물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응?”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좌중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듣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담은 얼굴들을 둘러보며 단유는 말을 이었다.
“혹은 태양광에 의해 조류가 자라며 부산물을 발생시키기도 하지요.”
‘조류’는 무엇이며 ‘미생물’은 또 무엇인가? ‘유기물’이란 단어는 생전 처음 듣는 용어였고, ‘부산물’이란 것은 밀을 빻은 뒤에 남은 밀기울을 두고 하는 말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밀기울은 가축의 사료로나 사용되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런 요상한 단어의 조합들이 단유의 입에서 나오니 뭔가 정말 있는가보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기술로는 이 미생물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력이 뒷받침된 도구가 생산되어야 가능한데, 이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왕은 표정을 고치고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미생물이란 게 뭔가?”
“너무 작아서 맨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작은 생물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 설명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도울 수 없었다. 가장 작다고 생각하는 생물의 수준도 고작해야 바퀴벌레 정도인데, 그런 생물이 자신들이 마시는 물속에 있다고 하니 믿을 수 있을 리가.
“허. 참으로 듣기 불쾌한 소리로군. 그럼 우리는 여지껏 보이지도 않는 생물을 산 채로 들이키고 있었다는 말인가?”
일부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 헛구역질이 난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있었다.
쿵.
다시 좌중이 입을 다물고 왕의 눈치를 살폈다. 주위를 조용하게 만든 왕이 단유를 향해 말했다.
“그렇군. 이제야 자네가 어떤 자인지를 알 것 같다.”
왕이 발을 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뒤에 선 브링도 절그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왕을 뒤따랐고, 그것이 마치 신호였듯이 대전 내 모든 근위병들이 똑같이 한 걸음을 강하게 내딛었다.
“보잘것없는 허명에 기대어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다시 한 걸음 내딛으니, 다시 대전 안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근위병들이 단유를 향해 간격을 좁혀 왔다. 그 행동에 당황한 사람은 단유가 아닌 신하들이었다. 신하들도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중이라 어디로 피할 곳도 없었다. 근위병들의 접근이 자신들을 노린 것이 아닐지라도 피할 곳이 없으니 물러서다 옆의 선 이들과 부딪치기도 하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이가 없었다.
왕의 행보였으니까.
왕은 손가락으로 단유를 가리켰다.
“그 조그만 살덩이를 놀려 상대를 희롱하는 맛으로 이제껏 살았던가?”
왕이 옥좌가 놓여 있던 단에서 완전히 내려와 단유와 눈높이를 맞추었을 즈음, 경계를 높였던 근위병들도 단유와 상당히 거리를 좁히며 그를 압박했다.
“마법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네.”
“그거야말로 가장 큰 거짓이 아닌가?”
왕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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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건을 쓴 서너 명의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지만,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어 그저 그들의 무례함에 눈을 흘길 뿐이었다. 사람들과 부딪쳐도 사과 한 마디 남기지 않고 그저 자기 갈길만 가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관찰되었다. 그러나 한 번에 여러 곳을 관찰할 수 없는 이상 그런 움직임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만약 도시 곳곳을 순찰하던 근위병들이었다면 잠시 주목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평시의 경우에나 그렇다. 마침 그 근위병들이 모두 특수한 임무로 소환된 마당이라 일시적으로 에강위의 모든 대로는 무법 천지나 마찬가지인 상황. 그리고 그 때를 노려 일부의 사람들이 모종의 계획을 획책하는 중이었다.
두셋 정도에 불과했던 이들이 대여섯으로 불어나고, 곧 어느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열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어서, 다른 골목에서 그와 비슷한 숫자의, 망토를 뒤집어 쓴 이들이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바로 수도 성내를 순찰하는 근위대대 부속 순찰대 본부. 인원이 많이 빠졌지만 본부 앞을 지키는 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몰려든 인원에 비교할 수 없는 수준. 본부 안에도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시작하자.”
나직한 명령과 함께 사람들은 눈 아래에 시커먼 두건을 두르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뭐, 뭐야?”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일갈을 터뜨릴 틈도 없었다. 어느새 뒤에서 접근한 이들이 경비병을 무력화시켰다.
“들어가.”
정말 잘 짜여진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고, 허둥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본부의 문이 열리고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기습은 성공했다.
본부를 점거한 이들은 살아있는 경비병들을 제압해 지하에 묶어두고, 본부 내의 무기들로 무장했다.
“시간 없다, 서둘러.”
무장을 마친 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뒤, 세 사람만 본부에 남았다.
“정리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도록.”
순찰대 본부는 비단 하나만 있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 내 여러 본부들이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 의해 점거당했고, 에강위의 치안은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일을 벌인 당사자들과 그들에게 제압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미리 알았어야 할 이들은 현재 단유와 대치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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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자신을 둘러싼 근위대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왕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묻겠다.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을 너는 어떻게 보았다는 것이냐? 그것도 마법인가?”
“···아닙니다.”
마법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보이는’ 것이었다. 엘라바인과 함께 저수지에 갔을 때, 그 저수지를 들여다보았을 때 그냥 보였다. 썩어가고 있는 물이.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그 물을 음용하기 힘들 정도가 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때문에 엘라바인에게 물을 사용할 때 끓여서 사용하기를 권했다. 당장은 그냥 마셔도 문제가 없겠지만, 눈으로 그것이 보이는데, 그렇지 않아도 깔끔한 것을 우선으로 하는 단유였기에 그런 주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도 아니다?”
왕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들었다. 곧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텔이 달려왔다.
“물을 떠와라.”
텔이 빠르게 움직여 곧 왕의 손에 물 한잔을 쥐어 주었다. 왕은 단유를 보던 시선을 내려 컵에 담긴 물을 바라보았다. 투명하기만 할 뿐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코를 킁킁거리는 왕을 지켜보던 신하들이 침을 꿀꺽 삼킬 때, 왕이 다시 텔에게 그 컵을 건넸다.
“마셔보아라.”
텔이 왕의 명령에 따랐다.
“무슨 맛이냐?”
“물맛이 납니다.”
“냄새가 나느냐?”
“나지 않습니다.”
“다시 물을 떠 와라.”
텔이 다시 물을 떠 오자, 왕은 단유를 가리켰다. 텔은 단유에게 컵을 건넸고, 단유는 그 컵을 받았다.
“같은 물이다. 그 물이 썩었다는 증거를 대 보아라.”
왕은 히죽 웃었다.
일전에 단유와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이야기가 잠시 지나간 적이 있었다. 마법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이야기하는 순간, 라티오의 진실이 문을 닫아버린다고 했었다.
아무리 계산에 능하지 않은 왕이라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는 금방 계산할 수 있었다.
단유는 그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막다른 길로 몰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그는 마법사가 아니다. 혹은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진의를 판가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가 한 말이 진실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그가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며 그는 스스로 마법사로서의 지위를 버리게 되는 상황이 된다.
“너는 사기꾼이다. 헛된 말로 학자들을 속일 순 있었겠지만, 날 속일 수는 없다.”
왕궁에서 매일같이 오고 가는 말들 속에서 진실이 얼마나 많이 담겨 있을까? 권력이 커짐과 비례하여 자신을 속이려 드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지는지, 다른 이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그 고통을 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인내하며 오늘날까지 버텼고, 선대의 누구보다 넓은 영토를 얻는 치적까지 이루어냈다.
그런 날 속이려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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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대 본부를 점거했던 이들이 다음 향한 곳은 왕궁이었다. 왕궁 근처에까지 다다르니 여느 때보다 줄어든 경비병들이 관측되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검은 두건을 쓴 이가 손가락을 이곳 저곳을 가리켰다. 별 말은 없었지만 사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기에 지시를 듣는 이도 헷갈릴 이유가 없었다.
조용히 칼을 뽑아 들고 골목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이들.
그리고 어느 순간 공기를 가르는 휘파람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들이 달려갈 때, 이미 궁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날아온 화살에 절명한 상태였다. 그들은 지체없이 궁의 담을 넘었다. 늦은 저녁 거리를 지나가던 행인들의 비명 소리와 웅성거림도 그들을 막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