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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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왕을 만난 그 시각, 궁 내의 또 다른 모처에서는 또다른 은밀한 만남이 진행 중이었다.
“비방트, 어찌 되었는가?”
“준비는 거의 끝났습니다. 하지만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위험하네. 조금 있으면 점령군이 돌아올 시간이야.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그쪽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돌아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전에 저희 일이 모두 끝날 것입니다.”
비방트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는 미간에 힘을 주고 앓는 소리를 냈다. 비방트는 공손히 침묵을 지키며 그의 결정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더 걸리겠는가?”
“사실 서두른다면, 오늘이라도 결행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아니 가능했을 것입니다.”
“역시 마법사가 변수였던가?”
“네. 근위병 대부분이 궁내에 몰렸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덕분에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으니 말입니다.”
“총 몇 명인가?”
“인원은 대략 200명까지 가능할 듯합니다.”
“빠듯하군.”
“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왕의 곁에 너무 많은 근위병이 몰려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흠.”
“마스터께서도 이만 돌아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시간을 끌면 이상하게 볼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나도 이만 가봐야겠다. 그리고···마법사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낼 것인지도 확인해봐야겠지. 비방트.”
“네.”
“수고하거라.”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상대는 등을 돌렸다. 비방트는 그 등에 대고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가 사라진 직후, 비방트는 천천히 몸을 들었다.
“후우.”
긴 숨을 내쉰 비방트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리며 각오를 다졌다. 이날을 위해 가파른 절벽 사이에 세워진 외줄 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몇 년을 지냈다. 비록 마스터에겐 시간을 더 달라고 했지만, 본인이 그 시간을 더 견딜 자신이 없었다.
‘서두르면 안 돼.’
비방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방을 나섰다.
****
왕의 추궁에 단유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확실한지 아닌지의 문제였으니까요.”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왕에게 전달하면, 그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 역시도 내가 판단할 문제다. 자네는 내 머리 위에 서려 하는 것인가?”
억지다. 무슨 이유로 억지를 부리는 것인가.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왕의 눈을 보면, 그 속에 담긴 초조함과 갈증을 읽어낸다면 말이다. 어울리지 않게 조바심을 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잔뜩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도, 차마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일단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뒤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고 싶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익숙하진 않지만, 자주 보던 방식이기도 했다. 어린애들이 마트에서 부리는 응석이 저런 꼴이 아닌가? 괜히 심술 난 척 시늉을 해도 부모는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유의 말에 왕이 다시 딴지를 걸려 했는데, 단유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에강위에 ‘가뭄’이 온다면.”
특정 단어에 힘이 실린 단유의 발언에 싸늘하던 대전은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가뭄이 온다면 에강위에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면이 있어 그에 대해 연구를 했었습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대전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왕의 호통소리에도 단유는 별 반응 없이 담담히 대답했다.
“무엇을 책임지란 말이죠?”
“에강위에 가뭄이 온다는 그 말, 책임질 수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책임질 수 없죠.”
“뭣이라!”
“이미 말씀드렸듯이 확실하지 않다고.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라고요.”
오칸은 순간 당황했지만, 지금은 기세에 밀리면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럼 왜 갑자기 가뭄을 언급한 것이냐! 그렇지 않아도 물이 부족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몰라 하는 말인가? 너로 인해 학자들까지도 혼란스러워하며 갈팡질팡했다고 들었다. 이미 그 자체로도 너의 죄는 크다.”
“물이 부족해서라···.”
고개를 틀어보니 주위를 둘러싼 근위병들의 기세가 왕의 기분에 맞춰 함께 드세어진 느낌이었다. 기가 약한 사람이라면 이미 근위병들의 찌릿찌릿한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지 않았을까? 단유보다 먼저 이곳에 왔다던 학자들도 이런 분위기였다면 감히 입을 놀리지 못했을 것이리라.
“에강위는 늘 물이 부족합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에강위에 사는 시민들은 늘 물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가뭄의 징조라도 된다는 것인가!”
왕의 억지에 맞춰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왕이 아니라도 그 주위로 도열해 있는 신하들이 단유의 말을 듣고 깨우칠 수 있다면, 것도 나쁘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 궁전 옆에 있는 저수지의 물을 누군가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죠.”
단유의 대답에 신하들이 당황하며 왕을 쳐다보았고, 왕은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의 화기를 참지 못해 부들거렸다. 누구도 대놓고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에강위에 사는 나의 신민들이 물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 혹은 하더라도 당사자 앞에서는 하지 않던 이야기.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만 한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통제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왕좌에 오르신 후로 물의 사용량을 엄격히 통제하셨다고 기록에서 확인했습니다.”
“필요한 일이었다! 과거의 선왕께서는 저주지의 물이 급격히 줄어드는 일을 자주 접하셨고 그때마다 근심하시며 잠 못 드는 모습을 나 뿐 아니라 여기 있는 신하들도 자주 보았을 것이다.”
신하들이 허리를 숙여 그 말에 동의했다.
“저수지에 가보셨나요?”
“······.”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 정도의 저수지라면 에강위에 사는 사람들이 스무날은 넉넉하게 물을 쓸 수 있는 양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스무날이라는 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당연히 펑펑 써댈 수 있는 양은 아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양을 제한해서 쓸 것까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단유의 의견에 반박하는 이가 등장했다.
“스무날은 결코 긴 날이 아니네. 달이 다시 차오르기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짧은 날일세. 만약 사람들이 물을 펑펑 써대면, 그래서 금방 저수지는 바닥을 보일 것이고, 그 뒤에는 목마름에 말라가는 사람들로 인해 지옥이 펼쳐질 걸세. 폐하께서는 이를 걱정하여 하루 물 사용량을 제한한 것이네. 이는 어쩔 수 없는, 하지만 현명한 판단이셨네.”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가로’ 경의 발언이었다. 그러자 단유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짚었다.
“저 건너편 산의 저수지에도 가봤습니다. 과거의 에토신스가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저수지더군요. 게다가 거기서 여기까지 연결된 수로 역시 꽤 많은 사람들의 땀이 들어갔으리라 예상되는 공사였습니다. 허나 그 노력이 들어간 것에 비해 지금의 사람들은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과연 과거의 이곳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피와 땀을 쏟았던 것일까요?”
왕이 바닥을 박차고 일어섰다. 왕의 기립에 신하들이 움찔거렸고, 근위병들이 자신의 허리에 찬 칼에 손을 가져갔다.
“해괴한 말이로구나! 처음 에강위에 수도를 잡으신 선왕들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에토신스의 모든 왕들을 능멸할 셈이더냐!”
단유는 들었던 손을 내리고 공손한 자세로 다시 섰다. 그리고 말했다.
“누구도 흉을 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에강위에서 시행되고 있는 물 공급 방식은 에강위를 점점 병들게 할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단유는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반발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 이들,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려 시선을 피하는 이들, 혹은 단유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는 이들.
“처음의 불확실한 가정부터 말씀드리죠. 가뭄에 대한 것은,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나라의 사례에서 출발합니다.”
단유는 타구르에게도 이야기했었던, 고원의 국가에 대해 천천히 풀어 설명했다. 그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그리고 몰락. 그 몰락의 이유로 짐작되는 가뭄에 대한 것까지.
“사실 가뭄 자체의 원인보다는 그런 자연 현상에 대비하지 못한 그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의 말대로면 우리는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유는 가로의 반론에 다시 대답했다. 그것은 불과 몇 시간 전 애슬리에게 했었던 이야기였다. 특정 재화를 독점한 소수인들, 그리고 그 소수에 제외된 다수의 불행. 그리고 그 불행이 만들어내는 차별과 반목이 마침내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는 이야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에강위에 사는 모든 신민들은 폐하의 은덕에 감사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제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신민들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신하 한 명이 힘을 내어 단유의 이야기를 반박했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평화는 말 못하고 억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마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자신을 도살장 주인 취급한 단유의 말에 결국 왕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던 것일까?
“여봐라!”
근위병들이 일제히 칼을 꺼내 들었다. 칼집을 빠져나오는 칼날의 소음이 대전을 채웠다. 그러나 다음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근위병들. 그리고 그런 근위병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는 대신 단유를 노려보는 국왕, 오칸 아르다.
반면 단유는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한다는 눈으로 왕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단유의 눈빛이 자신감으로 읽히자 왕은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저런 눈빛을 드러내는 것인가!
그래서 자신이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눈빛으로 무릎 꿇은 적국의 왕들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때,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에강위가 병드는 또 다른 이유는, 저기.”
다시 단유의 손가락이 이번엔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수지의 물이 썩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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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트.”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던 비방트가 고개를 들어보니, 타구르의 학생이었던 ‘제피’가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급히 뛰어온 모양인지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애써 고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비방트가 벌떡 일어섰다.
“그래?”
“마침 앞을 지키던 근위병들의 수가 줄어들었던 게 다행이었습니다.”
“역시!”
비방트는 책상을 가볍게 내리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또 뭔가?”
“티코에게서 들었는데, 점령군 사령관이 곧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울스프의 학생이기도 한 티코는 점령군 사령관과 친척이었다.
“곧이라면 언제쯤인가?”
“그것까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미 점령지를 떠나 귀환 중인 듯 합니다.”
비방트는 더 망설일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럼 얼른 사람들을 모으게. 오늘 밤, 아니 최대한 빨리 사람들이 모이는 대로 시작할 수 있도록.”
제피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바깥에서 대기하던 다른 부하들까지 불러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부하들이 뛰쳐 나간 뒤, 비방트는 책상에서 작성하고 있던 서신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으로 구겼다. 더는 정체를 감추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