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가 되는 방법(6)
-------------- 724/952 --------------
엘라바인은 주위를 살피며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갑자기 소환 명령이 떨어진 까닭에 급히 아지트로 가던 엘라바인은 심장이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젠 안 되겠어.’
요 며칠간, 집에서 단유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특히 단유가 궁에 다녀온 직후부터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단유가 그녀를 피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레 겁을 먹은 것이긴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지트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그의 상관에게 선포했다.
“더는 못하겠어요.”
“얼마 남지 않았다.”
“안 돼요. 이미 눈치를 챘을 거예요.”
은근히 대화를 풀어 미끼를 던졌지만, 단유는 그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순간 눈치를 채지 못했더라도 대화 직후 왕궁으로 갔었으니 머리 좋은 마법사가 모를 리 없다. 자신의 정체는 이미 발각됐으리라.
상관은 팔짱을 끼고 엘라바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엘라바인도 더는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었다.
“네가 빠지면 더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조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 전에 제가 죽을지도 몰라요.”
“네 입으로 그가 함부로 손을 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는 마법사예요! 그리고···저희 아저씨를 손짓 한 번에 죽였던 자라고요!”
비방트는 팔짱을 풀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엘라바인의 삼촌은 단유가 흑의인들과 싸운 후, 마을로 향할 때 매복했었다가 그를 급습했었던 궁병부대의 부대장이었다. 당시 단유는 무의미한 살인을 막고자 부대장을 타겟으로 마법을 시전했고 덕분에 30명 가량의 병사들은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은 이의 인척에겐 몇 명이 살게 되었든 의미가 없는 계산법이었다.
사실 엘라바인은 그와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다. 피가 이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리 가깝게 지낸 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일로 인해 마법사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가지게 된 것이 그의 집에 시녀로 들어가게 된 큰 원인 중 하나였다.
그와 함께 하면서 엘라바인은 그가 들은 것만큼 잔인한 인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복수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직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동안 얌전히 지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어쩐지 그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전과 다르다고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아저씨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비방트는 그가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함께 하게 된 엘라바인에게 약간의 책임감을 느꼈다. 일을 하다보면 희생이 따르기도 하지만, 엘라바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순 없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지금 사태를 보건대, 그런 희생이 강요될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엘라바인이 신경질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뿐, 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더욱이 지금은 조직의 목표 달성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며칠 걸리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그 마법사를 궁에 소환한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조금만 더 참길 바란다.”
“······.”
비방트가 평소처럼 강하게 명령을 내렸다면 반발이라도 해볼 텐데, 그답지 않게 부탁하는 어조로 말을 거니 엘라바인도 더는 맞서지 못했다. 마지못해 엘라바인은 침묵을 지키며 다음 지시를 들었다.
****
오칸 아르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삐딱하게 몸을 기울인 채로 학자들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마법사가 밝히지 않은 진실의 한 조각을 찾으면 자신 역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법사가 된다면? 그는 지금의 땅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공국의 땅을 차지한 것부터가 선대의 왕들이 이루지 못한 치적을 이룬 셈이지만 오칸은 더 넓은 땅, 더 많은 신민들을 거느리길 원했다.
‘욕심을 버리고 순수하게 지식과 진실에 접근하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키포인트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오칸은 마법사가 의심스러웠다.
욕심을 버린다고? 과연 인간이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마법사는 인간이 아닌가?
생각에 잠긴 사이 학자들의 변명이 끝났는지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돌리니 신하들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과 자신이 다른 점은?
왕은 피식 웃었다. 저들이 가진 욕심은 고만고만하다. 그저 지금 현재에 머무르고 싶은 이들. 현상 유지만 하면 된다고 안심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자신은 지금의 치적만으로도 후대에 그 이름을 남길 것이다. 광활한 영토를 얻어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대왕(Great king)’으로서? 아니다. 여기서 멈출 생각 따위는 없으니, 어쩌면 에토신스 ‘제국’의 초대 황제(Emperor)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절대적 위치를 꿈꾸지 않는다면 결코 이 왕좌에 앉을 수 없다.
왕은 턱을 괴지 않은 다른 손을 살짝 들어 손가락으로 학자를 가리켰다.
“어쨌든, 그런 중요한 사실을 짐에게 고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의 진심을 의심케 만든다. 그러라고 그대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님을 그대는 알았어야 했고.”
울스프가 왕의 지적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지만, 왕의 입이 먼저 열렸다.
“이들을 가둬라.”
“폐하!”
“그대들이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며 책만 볼 수 있었던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헌데 그대들은 그런 신의를 먼저 저버렸다. 그러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폐하!”
“허나.”
이어진 왕의 말에 학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허나, 그대들이 지금껏 쌓은 업적을 무시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잠시 이곳에서 그간의 일들을 돌아보며 그대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반성할 수 있도록 하라.”
너그러운 왕의 은덕에 감사라도 하라는 듯 이어진 말에 학자들은 주춤거리다 결국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끌고 가라.”
근위병들에게 팔을 붙잡힌 채 대전 밖으로 나가는 학자들을 지켜보던 왕은 곁에 선 신하들을 둘러본 뒤 다음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 루치드를 이곳으로 부르도록 하라. 그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겠다.”
****
애슬리는 단유의 이야기를 별다른 첨언 없이 끝까지 경청했다. 달리 첨언할 내용도 없었다. 몇 가지 부분에선 조금 다른 견해를 물어볼 법도 했지만, 큰 줄기에서 단유의 이야기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까지 술술 나오니 오히려 그 지식들을 소화시키는 데 전념해야 할 정도였다.
“요약하면, 선대의 왕들은 물이 부족한 상황을 이용하여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했다는 이야기로군.”
“그렇습니다.”
“무척이나···위험한 발상이로군.”
“그런가요?”
애슬리는 곁눈질로 포아테지를 살폈다. 정신없이 단유의 이야기를 듣느라고 애슬리가 자신을 살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뒤늦게 자신을 향한 질문임을 깨달은 포아테지가 허둥대며 대답했다.
“제 생각이요?”
“그래. 나보다 젊은 이니 나와는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대의 생각이 궁금허이.”
“그게···사실 저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라서···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저 선생님의 식견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자네 생각이 있지 않나?”
“그···.”
포아테지는 송글 솟는 땀을 닦아내며 우물쭈물거렸다. 그러나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애슬리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의 눈빛에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저는 루치드 선생님의 말씀이 꽤 논리적인 추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물이 부족한 대로 살고는 있습니다만, 그게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요. 아니, 사실은···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선생님들은 저희에 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도 넉넉하게 물을 쓰실 수 있으니 그런 점을 못 느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선생님들께는 물을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 학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은 몇 동이의 물을 두고 굉장히 아껴 써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고백하건데 그런 점이 부러워 학자가 되고 싶은 점도 있지요. 제가 갑자기 귀족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렇다고 몸을 쓸 줄도 모르니 군인이 될 수도 없고요.”
주저하며 말을 꺼낼 때와 달리 이야기를 시작한 뒤로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마냥 술술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그렇지만, 그런 상황 때문에 폐하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이곳이 원래 그런 곳이니, 라고 생각할 뿐이었죠. 오히려 폐하 덕에 물을 사용할 수 있으니 그저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게 먹었던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애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역시 자네의 그 이야기는 위험한 이야기였군.”
“그렇네요.”
단유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묻겠네. 자네는 지금 이 현실을 바꿀 방법이 있는가?”
문제점을 밝혔다면, 이를 해결할 방법도 제시해야 옳다.
단유는 자기 앞에 놓인 두루마리 중 하나를 꺼내 펼쳤다.
“지금 사용하는 물도 건너편 산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오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또 다른 물을 끌어오는 방법으로 부족한 수원을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또 다른 물을? 그건 어렵지 않을까? 내 알기로는 이전에도 그것을 시도했었지만 잘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네.”
“네. 찾아보니 아주 오래 전에 이를 시도하다 실패한 기록이 있더군요. 이유를 보니 비용이 많이 들고, 이를 위해 수많은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그 인력을 충당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기술이더군요. 산 아래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더라는 이야기가 여기 적혀 있네요.”
“나도 그 기록을 본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자네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음···.”
단유가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도서관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포아테지가 움찔 놀라며 그쪽을 바라본 뒤, 서둘러 도서관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당황한 얼굴의 포아테지를 뒤로 하고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무장한 근위병들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애슬리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근위병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에 마주한 단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법사 루치드, 지금 즉시 입궁하라는 폐하의 명이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쪽으로 밀려 발을 동동 구르는 포아테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여기 이것들 대신 정리해 주시겠어요?”
포아테지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
궁으로 향하는 동안, 근위병들에 의해 거리 바깥 쪽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근위병에게 둘러싸인 단유를 보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은 단유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이 아닐까 추측하는 이도 있었고, 단유가 어떤 구속도 없이 걷는 것을 보고 나라의 중요한 인물이 아닐까 추측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비방트도 있었다. 비방트는 인파의 뒤편에 서서 단유가 궁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데 이는 자신이 그렸던 그림과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왕의 루치드에 대한 두려움이 모종의 일로 많이 희석된 탓이 아닐까 싶었다.
비방트는 조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단유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궁에 도착한 단유는 이전과 달리 대전으로 향했다. 여전히 옆에는 중무장한 근위병들이 곁에서 호위인지, 포위인지 모를 포지션으로 그를 따르고 있었는데, 대전 안으로 들어서니 그런 근위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중앙에 난 붉은 주단을 따라 걸으니 삐딱하게 앉은 왕이 높은 단상 위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이전에도 보았던 ‘브링’이라는 이름의 철갑병이 전처럼 왕의 뒤를 지키고 있었고 단상 앞으로는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귀족들이 단유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움츠러들지 않고 차분한 걸음으로 단상 앞에 섰다. 왕과 적당한 거리가 되었을 때, 옆에 선 호위, 혹은 포위한 근위병들이 팔을 내밀어 접근을 막았다.
단유의 걸음이 멈추자, 모든 소리가 멈춘 듯 대전 안은 침묵이 내려 앉았다. 작은 기침 소리와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루치드.”
왕의 나른한 목소리가 대전의 정적을 깨뜨렸다.
“네, 폐하.”
“지금 이 궁의 감옥에 만리를 비롯한 학자 몇몇이 들어가 있다.”
“······.”
“이유를 알겠는가?”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무엇인가?”
“아마도 물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럼 지난번에 우리가 만났을 때는 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폐하께서 물어보시지 않았던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묻지 않았기에 하지 않았다? 내게 따로 고할 정도의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왕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어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둔탁한 소음이 울리고 이어 왕의 질책이 단유에게 향했다.
“그게 중요한지 아닌지를 왜 자네가 판단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