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18화 (718/956)

환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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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단유가 꺼낸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모두 잊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가설에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네.”

“누가 그걸 모르는가? 하지만 그럼 자네는 지금의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니 무시하자고 말하고 싶은가?”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처음 이야기를 꺼낸 이가 지금 자신에게 되묻는 동료 학자였다면 코웃음치며 무시했겠지만,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마법사가 직접 한 말이라지 않은가.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할 게 아니라 그에게 가서 더 정확하게 물어야 하지 않은가? 그 가뭄이란 게 언제 올 것이며, 어느 정도의 규모로 올 것인지. 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한 국가를 멸망케 할 정도의 가뭄이라는 게 수백 년 후에 온다면 이리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게, 그도 정확히 답을 하지 않았네.”

“왜?”

“그는 정확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답을 줄 수 없다고 했네.”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이가 마법사이니,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

“대신 나는 그가 최근에 한 행동에서 대략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하네.”

“응?”

“첫 번째로 그가 날씨에 관심을 가진 건 아주 최근의 일이라는 거네. 내 학생에게 듣기로 그가 새벽에 물을 뜨러 저수지에 갔었던 적이 있다더군.”

“그가 왜? 그의 시비는 늦잠을 잤다던가?”

“그녀를 도우려고 했다더군.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그 이후로 갑자기 날씨에 대해 관심을 가졌단 말이네. 다들 알겠지만, 그 전에 수도관이라는 것을 만들 때는 별로 관심이 없다가 저수지를 직접 눈으로 견식한 뒤 관심을 가졌단 말이네. 그게 무슨 말이겠는가?”

“저수지에서 어떤 징후를 발견했다는 것인가?”

“그렇지. 우리는 여태 그의 어마어마한 지식들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몰랐던 것들, 무심코 지나갔던 것들에 담긴 진실과 지식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가.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징후를 그곳에서 발견했을 거라고 봐야 할 것이네.”

“그럴듯한 추리네.”

“그리고 최근 도서관 이전에 대한 이야기 말이네. 단순히 생각하면 그저 습도가 높은 이곳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책의 훼손을 막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네만, 어쩌면 그게 그가 우리에게 준 힌트가 아닐까?”

“좀 더 이야기해보게.”

“아무리 이곳 습도가 높다 한들, 당장 책이 훼손되진 않을 걸세. 우리가 수십 년 이 도서관에 책과 자료들을 두고 관리했으니. 하지만 그의 말처럼 도서관을 옮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그 책들이 오래 유지될 수 있기를 바라기에 하는 것 아닌가? 이를테면 예방이라는 것이지.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괜찮았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안심하지 말고, 당장 고칠 수 있는 점이 있으면 고쳐야 하는 거지. 그게 그가 우리에게 말한 가뭄을 대비하는 방법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드네.”

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한편, 왕궁 내의 한 내실(chamber)에서 조용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인가?”

“지금까지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그런 가정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자가 직접 말한 것은 없지 않은가?”

“꼭 말로 해야 아는 것은 아닐뿐더러, 그가 어떤 생각으로 입을 열지 않은 것인지는 달리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넘겨 빗은 왕이 이마를 짚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주 앉은 사내는 숙고에 들어간 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이럴 바엔 그를 대전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는 게 편하겠어.”

“차라리 이런 일이 없었다면 저도 폐하의 생각에 동의했겠지만, 지금은 어렵습니다. 더욱 수상한 행동을 이어나가는 그를 이곳에 불러들이는 것은 어쩌면 그가 노린 일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듭니다.”

왕은 결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니다. 지금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불러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왕은 매서운 눈빛으로 마주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를 조용히 부르도록 하라. 되도록 신하들이 알지 못하게.”

명령이 내려졌으니, 사내는 그저 따를 뿐.

“알겠습니다.”

얼마 후, 사내는 궁을 나와 통행인들이 많은 황궁거리를 거쳐 복잡하게 얽혀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방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골목을 익숙하다는 듯 지나친 그는 마침내 어깨 높이에나 겨우 닿을듯한 작은 문 앞에 섰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이들이 벌떡 일어나 예를 갖췄다.

“지금 즉시 엘라바인을 불러오게.”

한 사내가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간 뒤, 사내는 남은 이들에게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 도서관에 있다고 합니다.”

“누가 함께 있는가?”

“제피(zephyr)가 곁에 있을 겁니다.”

제피는 타구르의 학생임과 동시에 비밀 정보 조직에 속한 이였다.

“제피를 제외한 모든 조직원들을 호출하도록.”

엘라바인이 갑작스러운 호출에 당황스러운 얼굴로 등장했다. 비록 단유가 일찍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만일 그가 무슨 이유로든 집에 일찍 왔다가 엘라바인이 집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상관의 긴급 호출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

“무슨 일이세요?”

“폐하께서 그를 궁으로 부르셨다.”

엘라바인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왕이 그를 직접 부를 것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전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집에 돌아오시면 일에 대해 전혀 말씀이 없으세요. 간단한 인사 정도 외에는 거의 말이 없으십니다.”

“그래도 알아내야 한다.”

“어떻게 말이죠?”

“어떻게든.”

눈에 힘을 주고 말하는 사내의 눈빛에 엘라바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입궁하기 전에 먼저 그의 속내를 최대한 알아내야 우리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제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마터면 엘라바인이 ‘그럼 직접 해보시던가요’라고 말할 뻔했다. 물론 그는 굉장히 매너있고 점잖은 남자였다. 시녀임에도 자신에게 매번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도 그렇고, 그 어떤 가벼운 스킨십도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법사였고, 전해 들은 바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손짓 한 번에 빼앗기도 했던 무서운 인물이다. 여기 모인 모두가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는 작당을 하라고 하면, 아무리 엘라바인이 상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처지라 하더라도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다.

“폐하께서 그를 독대하기로 마음을 먹으신 지금, 그 무엇보다 폐하의 안위를 지켜야 할 너희들이 그런 안일한 마음을 품어서야 되겠는가?”

사내는 엘라바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아랑곳 않고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학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라는 명과,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올 것, 그리고 마법사가 도서관에서 살핀 책들의 목록과 내용까지도.

****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니, 얼마 뒤 단유가 돌아왔다.

“오셨어요?”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엘라바인 양도 수고 많으셨어요.”

별 특이할 게 없는 일상적인 인사를 나눈 뒤, 단유는 방으로 올라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저녁 준비가 되었는데, 바로 식사하시겠어요?”

“그럴게요.”

넓은 식탁에 홀로 앉은 단유는 엘라바인이 차려준 식사를 조용히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엘라바인은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가 오기 전에도 마음 속으로 시나리오를 써가며 생각했지만, 딱히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고민은 계속 깊어만 갔다.

“엘라바인?”

“네?”

“왜 그러고 있어요? 같이 먹어요.”

“아.”

너무 긴장한 탓에 식사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잊고 있었다.

처음 엘라바인은 단유가 동석을 권유했을 때 놀란 눈으로 절대 안된다고 거절했지만, 거듭된 권유에 결국 단유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아침과 저녁은 늘 함께 먹었는데, 오늘은 머리가 복잡해서 자기 식사를 준비하는 것마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식사를 준비해서 마주 앉으니, 단유가 흐린 선을 그어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빵이 정말 부드럽네요.”

“아, 그런가요? 늘 받던 빵집에서 받아온 건데.”

“맛있어요. 아마 오늘 빵집에 새로운 밀이 들어 왔나 봐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맘때면 가을밀이 수확되어서 들어오거든요.”

“에강위에는 가을밀이 없지 않나요?”

“아랫지방에서 가을밀 농사를 짓는 곳이 있어요. 이즈음에 그곳의 밀이 수도로 올라오거든요.”

“역시 수도라서 그런가요?”

단유의 말에 엘라바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다 문득 눈을 빛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를 계속 이끌다 보면 원하는 질문을 던질 기회가 올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선생님.”

“네.”

“에강위에서는 왜 밀농사를 짓지 못하는 걸까요?”

“그야, 날씨나 토양이 밀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하니까 그렇겠죠?”

“그럼 에강위에서는 영원히 밀농사를 지을 수 없는 건가요? 만약 에강위에서도 밀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식량이 부족할 우려가 없을 텐데.”

“밀이 다른 작물에 비해 키우기가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에강위는 날씨도 날씨지만 토양이 받쳐주질 않아요. 사실 날씨도 이 정도라면 가능은 할 거예요. 다만 땅의 지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원하는 만큼의 소출이 되지 않는 것이겠죠.”

“아.”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땅의 지력은 비료를 이용하면 개선할 수 있으니까, 좋은 비료만 만들어낸다면 여기서도 밀농사를 짓는 게 가능할 수 있어요.”

“정말요?”

“지금처럼 화전을 계속하면, 결국 땅의 지력만 갉아먹는 셈이라 언젠가는 아무것도 심을 수 없게 될 날이 올 테니 비료 생산은 필수라고 할 수 있죠.”

“아무것도 심을 수 없다고요?”

“아주 안 나는 건 아니겠지만, 생산량이 큰 폭으로 감수할 거예요. 그러면 힘들여 농사를 짓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럼 큰일 아닌가요? 지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건가요?”

“왜 모르겠어요. 아니까 계속 땅을 옮겨다니며 화전을 짓고 있는 거죠. 아직까지는 주위에 땅이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덜 하는 거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계속 이런 화전을 이어가게 되면 언젠가는 정말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겠죠.”

“정말 큰일이네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시는 거예요? 대단하세요!”

“대단하긴요. 저도 책을 보고 배운 거라 자세하게 알진 못해요.”

“책을 보면 그런 게 다 나오나요?”

“관련 내용이 적힌 책을 본다면, 그렇죠.”

“지금도 그런 걸 연구하시는 건가요?”

“아뇨. 지금은 조금 다른 거예요.”

“혹시 어떤 내용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이 질문을 던질 때, 엘라바인은 최대한 표정을 감추려 애를 썼다. 그 효과가 있었던지 잘 모르겠지만, 대답하는 단유도 별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에강위와 그 주변의 날씨에 대해서 알아보는 중이었어요.”

“날씨요? 그것도 조금 전에 말씀하신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과거부터 지금까지 기록된 날씨에 관한 기록들을 살피는 것 뿐이에요.”

“왜요?”

단유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자, 엘라바인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식사를 이어나가야 할지, 아니면 얼른 화제를 돌려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단유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어···.”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제 질문이 불쾌하셨나요,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데 어느 것 하나 입으로 나오는 게 없었다.

그 와중에 잠시 뜸을 들이던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알게 되실 거예요.”

단유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엘라바인은 더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그저 단유의 웃음을 따라 억지 웃음을 지으며 식사를 ‘빠르게’ 마무리 짓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

“자네, 오늘 나랑 어딜 가야겠어.”

연구실에 들렀다가 도서관으로 향하려던 단유를 붙잡은 울스프의 말에 단유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디 가는지 묻지 않는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요.”

울스프의 얼굴이 단유와 다르게 굳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군요.”

“부득이한 이유로 이렇게 들어가긴 하지만, 본래는 저기 정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길 원하시니 이런 곳으로 안내하는 걸 용서하게.”

“제가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나요?”

“그리고 자네.”

“네.”

“부디···폐하의 앞에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주게.”

“어떤 거요?”

“···나한테 했던 말들 있잖은가.”

“알겠어요.”

“부탁하네. 난, 정말이지 자네에게 깊은 호의를 느껴. 그리고 그 호의에 보답하고 싶네. 그리고 자네와 함께 오래 연구를 하고 싶어. 그러니 부디 신중하고 자중하는 모습 보여주게.”

단유는 역시 대답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작은 쪽문을 통해 몰래 들어간 궁내에서 삼엄한 경비들의 눈빛 아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한 경로를 따라간 단유는 마침내 에토신스의 왕, 오칸 아르다(Okan Arda)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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