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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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인 만큼, 그중에는 날씨에 대해 연구를 하는 학자도 있었다.
“타구르.”
“오, 루치드. 무슨 일인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자네가?”
타구르는 단유를 가장 많이 찾아온 학자 중의 한 명이었다. 구름의 생성이라든가, 번개나 안개와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해 단유의 명확한 설명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그는 거의 매일 빈 종이 한 가득을 품에 안고 찾아와 단유의 이야기로 종이를 빼곡히 채울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었다. 때문에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학자들의 불만도 많이 감내해야 했고, 단유의 도서관 출입 허가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기도 했었다.
“에강위의 날씨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뭐든지 물어보게. 이곳 날씨라면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여기 비는 자주 내리는 편인가요?”
“음, 자주라고 하긴 그렇고 보통이라고 해야 하려나? 다른 지방과 비교를 하자면 비슷한 수준이지.”
“한 번 오면 얼마나 오는지도 혹시 아나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물이 그리 넉넉한 곳이 아니라네. 그래서 비가 올 때마다 사람들은 물동이를 밖에 두고 물을 받아 쓰지. 그 기준으로 설명을 해보자면, 많이 올 때는 저만한 물동이가 거의 다 찰 때까지 온 적도 있네.”
“시간은요?”
“시간?”
학자는 모서리에 놓여 있는 물 때 낀 물동이를 바라보며 턱을 긁었다.
“글쎄? 보통 하루 정도 꼬박 비가 올 때 차지 않았나 싶네. 거기까지는 시간을 재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구만.”
“혹시 이곳 날씨에 대해 기록한 자료들도 있나요?”
“그야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을 걸세.”
“볼 수 있을까요?”
“루치드, 자네도 이제 얼마든지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네. 보고 싶은 만큼 보고 연구할 게 있으면 연구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대신 뭐라도 알게 된다면 내게 먼저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정확히 무엇을 궁금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날씨에 관한 것이라면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니까 말이야.”
“그럼 같이 가시면 되죠.”
“그래도 되겠는가?”
반색하며 단유의 제안을 반기는 타구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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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 청소를 마친 엘라바인은 고요한 집안을 한 번 둘러본 뒤 외출 준비를 했다. 질긴 직물로 짠 바구니를 한 손에 든 엘라바인은 두건을 깊이 눌러 쓰고 길을 나섰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걸어가던 엘라바인은 한참을 더 걷다 어두침침한 골목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어깨 높이에나 겨우 닿을 정도로 작고 낡은 문 앞에 선 엘라바인. 주위를 둘러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양초 하나가 불을 밝힌 가운데, 불빛 너머에 어스름한 실루엣을 드러낸 이가 있었다.
“늦었군.”
“죄송해요.”
“됐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널 탓하진 않겠다.”
“죄송해요.”
“아무튼, 오늘 새벽에 그가 너와 함께 저수지에 갔었다고?”
“네.”
“혹시 널 의심스러워 한 건 아니고?”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저 절 돕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알았다. 남은 보고를 해 보도록.”
엘라바인에게 말을 거는 실루엣에 교묘히 가려져 있던 작은 체구의 남성이 펜을 들어 종이 위에 올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곧 엘라바인이 입을 열자 그 남성은 엘라바인이 하는 말을 모두 종이에 받아 적었다.
단유가 연구실에서 집으로 언제 돌아왔는지, 집에 들어와 가장 먼저 무엇을 했는지, 밥은 언제 먹었고, 무슨 밥을 먹었으며, 어떤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지, 식사를 마친 후엔 무엇을 했는지, 그의 방에 들어간 뒤 얼마나 지난 뒤에 불이 꺼졌는지, 그리고 아침엔 언제 일어났는지. 매우 사소한 부분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엘라바인, 그리고 그것을 모두 받아 적는 남성의 깃펜이 사각거리며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실루엣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엘라바인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사실 그렇게 듣는다고 해서 크게 중요하게 여길만한 내용은 없었다. 적어도 엘라바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내용을 어제도 전달했고, 그저께도 전달했으며, 수십 일 전에도 똑같은 내용을 전달했던 바이기 때문이다. 단유에게 연구실이 주어지고, 도서관이 개방되며, 다른 학자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고 해도 집에서의 생활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늘 똑같은 패턴으로 움직였고, 엘라바인이 차려주는 음식들은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는 엘라바인의 인사에 똑같이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고, 집을 나설 때나 들어올 때는 꼭 엘라바인을 찾아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엘라바인은 그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보고하는 내용의 중요성은 자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저기 내용을 듣는 이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엘라바인의 보고를 대충 넘긴 적이 없었다.
“끝인가?”
“네.”
단유가 집을 나간 후의 일에 대해서는 엘라바인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고 당연히 보고의 대상도 아니었다. 설령 어쩌다 단유가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듣게 되더라도, 그것이 단유가 집에 돌아와 엘라바인에게 직접 해준 이야기가 아니라면 보고해야 할 내용이 되지 않았다.
단유의 일거수일투족을 저리 상세히 기록하는 이들이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을 리 없으니, 바꿔 말하면 엘라바인 외에도 단유를 관찰하며 그의 일상을 보고하는 이가 있다는 이야기이리라. 하지만 그 역시 엘라바인이 관심을 가질 사항은 아닐뿐더러,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될 일이다.
보고를 끝낸 엘라바인이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으니, 종이 위를 휘갈기듯 써내려가던 소리가 뚝 멎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실루엣이 입을 열었다.
“됐다. 가 보거라.”
엘라바인은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뒤, 다시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가옥을 빠져나갔다.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몸을 빼낸 엘라바인은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큰길로 들어선 뒤에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평소처럼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저녁 식사 때 쓸 돼지고기와 뚜꾸마나를 만들 재료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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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으로 향한 단유는 타구르가 골라준 책과 문서들을 책상 위에 펼쳤다.
“조심해서 다루게. 오래된 것들이라 함부로 다루면 금방 훼손되어버릴테니.”
“그럴게요.”
단유는 그렇게 대답하고 책을 들여다보려다가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타구르를 돌아보았다.
“타구르.”
“응? 뭔가?”
“여기 있는 책들 말인데요.”
단유는 잠시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 말했다.
“이대로 두면 사람 손을 타지 않더라도 빨리 훼손될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이곳은 책을 보관하기에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거든요.”
지구의 것도 그렇지만, 이곳의 책들, 그러니까 종이들은 닥나무나 자작나무 같은 나무나 식물의 섬유를 물에 풀어 만들었다. 당연히 습기에 약하다. 이를 위해 철저히 계산된 통풍―환기 시스템, 혹은 제습 장치가 필요하다.
양피지나 독피지(犢皮紙, vellum)같은 형태의 기록물도 있지만, 종이에 비해 내구성과 보존성이 강하다 한들 지속적인 공기와 습기에 노출되면 훼손은 불가피하다.
“그, 그러니까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것인가?”
“특히, 저기서 저기까지의 책들은 다른 곳보다 빠르게 삭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유는 도서관을 둘러싼 벽의 가장 위에 뚫어져 있는 조그만 창들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이 도서관이 유지되는 건 저기 저 창들의 환기 덕분이라 하겠지만, 그걸 계산하고 만든 건물이 아닌지라 저것으론 부족하다. 그가 처음 도서관에 발을 들였을 때도 느꼈던 문제지만, 도시 전체가 서늘하고 습한 부분이 있어 이렇게 장서를 보관해서는 그리 오래 보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었다.
만약 어쩌다 큰 비라도 내리게 된다면 아예 곰팡이가 피어 오르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
단유는 그런 부분들을 언급하며 장서 보관을 위한 방책을 전달했다. 타구르는 혼자 듣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판단했고, 자신을 따라온 학생을 도서관에 둔 채 연구소로 돌아갔다.
그가 나간 뒤, 단유는 문득 중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던 내용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석굴암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을 언급하며 선조들의 위대함을 설파했었다.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파고들지 않았기에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그 기술로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혹시 지금 단유가 보는 것처럼, 도서관 내에 떠도는 공기와 습기의 유동 흐름이 보인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없이 완벽에 가까운 제습 효과를 볼 수 있게 설계를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단유는 창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공기의 흐름을 눈으로 쫓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어차피 당장은 그걸 해결하기 위해 단유가 움직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은 책을 보는 게 중요했다.
단유는 옆에 뻘쭘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는 학생에게로 눈을 돌렸다.
“혹시 여기 이것 말고 에강위의 날씨에 대해 기록한 자료들이 있는지 찾아봐 줄 수 있나요?”
“네? 네. 알겠습니다.”
“아, 에강위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의 날씨에 대한 기록들이 있으면 모두 찾아주세요.”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 학생은 열심히 책장을 뒤지며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 사이 단유는 앞에 놓인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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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며칠이 더 지났다. 단유의 일상은 여전히 집과 도서관 혹은 연구실을 오가는 일상이 계속되었고, 에강위의 날씨를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말에 몇몇 학자들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연구 과제와 동떨어졌다고 판단한 이들은 단유에게서 눈을 돌렸다. 대신 도서관의 습기로 인한 장서의 훼손에 대해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이것인가?”
그들은 단유가 그려준 설계도면을 보며 호기심을 보였다.
“이대로 새로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보수 정도로는 습기에 의한 훼손을 막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것 참. 이봐, 이건 자네 분야 아닌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하고 말고가 어디 있나? 솔직히 내가 그가 아는 만큼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여기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있을 이유가 없었겠지.”
“그래도 자네가 아는 선에서 말해보게. 그의 말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지 않나?”
“······.”
“긴 시간은 아니네. 하지만 그래도 그 동안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충분히 검증을 끝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그는 지식을 훔치러 온 게 아니네. 우리가 오랜 시간 보존해 온 지식들을 파괴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덕분에 얻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이번에는 우리가 지키려던 그것이 훼손될 우려가 있음을 먼저 알려 주지 않았나? 그러니 그만 그를 경계하고, 이제 그를 받아들여야 하네.”
누구도 그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의 말에 찬성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다시 이 문제로 돌아가시게들. 어차피 지금의 도서관은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장서들을 보관하기에 너무 좁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던 상황이지 않은가? 어차피 옮길 것, 이런 핑계로 지금보다 더 큰 도서관을 건립하게 되면 더 좋은 일일걸세.”
“폐하께 이대로 알리자는 것인가?”
“마법사가 건의한 것이라 하면 폐하도 흔쾌히 받아주실 걸세. 이미 궁에 설치된 수도 때문에 마법사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니.”
“나도 찬성이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이 건물이 설계되어 제습이 완벽하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제습을 위한 다른 방법도 알려주었다면서?”
“그건 우리 집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 하네.”
“그걸 왜 자네 집에서만 하는가? 우리에게도 알려주게.”
“혹시 위험한 것은 아닌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핑계는. 그래놓고 자네가 따로 폐하께 알려 공을 얻을 생각은 아니었고?”
“무슨. 그런 생각은 없었네.”
“자네는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난다네. 자네만 모르지 다들 알고 있을 거야.”
입을 다문 학자를 뒤로 하고 울스프가 나섰다.
“다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결론을 내리세. 그럼 이대로 새 도서관을 짓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중요한 결정이 끝나니 모인 이들의 표정이 한결 풀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친구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왜 뒤늦게 수선을 떠는가? 과거 에강위의 날씨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걸 왜 알아보고 있냐는 거지?”
학자들의 시선이 타구르에게로 향했다.
“변화무쌍한 날씨는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네. 그걸 이상하게 보는 자네들이 이상하군.”
“자네의 호기심과 우리의 호기심이 같을 순 없는 법이네. 저 친구는 돌에 관심이 많은데, 자네는 돌에 관심이 없지 않나?”
“그거랑은 다르지 않은가? 돌···.”
굴러다니는 ‘돌 따위’라고 표현하려던 타구르가 다급히 말끝을 흐렸다. 그때 곁에서 눈치를 보던 한 학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네.”
학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에강위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려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