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15화 (715/956)

환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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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결과적으로 황금으로 수도관을 만드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울스프의 속내야 단유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수도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수도에 거주하는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던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절대 왕정에 대한 충성심만큼이나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도 적지 않았던 듯 했다.

사실 그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울스프가 단유의 사상에 대해 위험하다고 생각하든 말든, 그리고 왕궁 출입을 위한 단유의 위험성을 묻는 왕의 질문에 확신을 못하고 있다고 말하든 말든.

중요한 것은 단유의 아낌없는 정보 공개가 이면에 작용하는 효과였다.

어지간한 학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보유한 단유에게 질문을 던지려 찾아오는 학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었다. 애초에 그렇게 많은 학자들이 상주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과 대담이 단유의 시간을 뺏긴 했지만 그것 역시 그리 귀찮은 일만은 아니었다.

각 분야에 정통한 학자들과의 대담을 통해 단유는 단 시일 내에 이 시대의 정보를 취합할 수 있었고, 이 시대의 지식과 기술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막연히 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얻는 것보다 효율적인 방식이다.

물론 그 점만을 노린 것은 아니다.

“이제 도서관을 개방해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그래. 저 정도의 지식을 가진 이에게 감출 게 있는가? 차라리 도서관을 개방하여 혹시라도 우리가 모은 지식들 중 잘못된 것이 없는지 검수하도록 도움을 얻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아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 도서관은 오랜 세월에 의해 축적된 지식의 보고이네. 아무나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걸 모르나? 아무리 그에게 연구실 하나를 주었다 하나 그는 정식 학자도 아닐뿐더러, 이 나라의 백성도 아니네. 만일 그 지식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그 책임은 어찌 지려고 그러나?”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게. 다른 곳에서 흘러나갈 지식보다 우리가 얻는 지식들이 더 많은 현실을 부정하는가? 오히려 난 좀 더 일찍 그에게 개방했어야 한다고 보네. 그랬다면 우리는 좀 더 많은 지식을 공유하고 더 많은 오류들을 고칠 수 있었을 것이네.”

모인 이들 대부분이 단유와 이야기를 하면서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거나 잘못 알고 있던 지식을 깨닫는 경험을 겪었다. 하지만 도서관 내에 보관된 지식의 유출을 우려하여 제한적인 정보만을 주고받았을 뿐이니 만약 도서관을 개방하면 그들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그동안 단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도서관이 개방되었다. 이로써 단유의 텅 빈 책장에도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들을 둘 수 있게 되었다.

****

궁전에 반 매립형 수도관 설치 사업이 시작되었다. 수원(水源)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도관은 바닥에 매립하지만 건물 내부에 매립하는 건 어려움이 있어 수도관이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였다.

때문에 일부는 건물 외벽을 타고 오르는 수도관을 보며 눈을 찡그리기도 했다.

“흉물스럽군.”

“어허. 말조심하게.”

“쯧.”

하지만 왕은 만족했다. 대전 한쪽에 수도꼭지와 물을 받는 대야를 두고 틈이 날 때마다 그곳에서 손잡이를 조작해서 물을 흐르게 하고 거기에 손을 씻었다.

“허허, 이거 참. 이렇게 편리할 때가.”

“마음에 드십니까, 폐하?”

“아무렴. 너희도 편하지 않느냐?”

지금이야 신기해서 왕이 직접 가지만 아침에 왕에게 씻을 물을 대령할 때는 당연히 시종들이 떠와야 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모두 폐하의 은덕(恩德)입니다.”

껄껄 웃는 왕의 웃음소리에 줄지어 선 시종들이 미소 지었다.

수도관을 설치하고, 그 수도관의 돌출을 가리기 위해 그 위를 장식으로 덧대어 가리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는 동안, 수도 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성들이 함부로 물을 쓰게 되면 안 되니까.”

각 집에 이런 수도꼭지가 만들어지면 그들은 남이 쓸 물까지 쓰고 말 것이고, 그러다 보면 수원은 금방 동이 날 것이라 생각하는 위정자들의 선견 덕이었다.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올 즈음, 물동이를 지고 저택을 나가는 엘라바인을 발견한 단유가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아, 깨셨나요?”

물동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를 숙이는 엘라바인에게 똑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단유의 모습은, 처음엔 잘 적응이 되지 않아 엘라바인이 많이 당황했었다. 몇 차례 고사했음에도 단유가 아무렇지 않게 매번 볼 때마다 인사를 하니 엘라바인도 포기를 한 상태였다.

“조용히 나가려 했는데, 죄송해요.”

“아뇨. 어차피 일어나려고 했어요. 그보다 혼자 들고 오기 힘드실 텐데 도와드릴까요?”

“아뇨, 아뇨.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제가 혼나요.”

“누구한테 혼이 난다는 거죠?”

“···아무튼 안 돼요. 선생님께서 물동이를 지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시면 저도 혼이 나지만, 선생님도 놀림을 받을지 몰라요.”

“물동이 하나 지고 간다고 놀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단유는 성큼성큼 걸어와 바닥에 있는 빈 물동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같이 하면 금방 끝나지 않겠어요?”

집에 있는 물탱크에 물을 혼자 채우려면 몇 번을 왕복해야 할 것이다. 단유의 행동에 엘라바인이 놀란 눈으로 어쩔 줄 몰라하다 단유의 손에서 물통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단유가 물통을 뒤로 빼니 엘라바인의 손은 허공을 저을 뿐이었다. 단유의 키는 이곳에서도 어지간한 남성들 평균보다 큰 수준. 그런 그가 손을 뒤로 뻗어 피하니 키가 작은 엘라바인은 붉어진 얼굴로 단유를 바라봐야만 했다.

“같이 가죠.”

“안 돼요.”

“돼요. 구경도 할 겸 한 번 가보죠.”

단유가 먼저 집을 나섰다. 그리고 대문 앞에서 뒤로 돌아보며 엘라바인이 나오길 기다렸다.

“여기 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 한 번도 그쪽으로는 발길을 옮긴 적이 없었네요.”

“그야···.”

엘라바인은 무의식중에 대답을 하려다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단유의 말처럼 시간이 흘렀지만, 왕궁에서는 단유가 왕궁이 있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리고 수도의 물을 책임지는 수원은 말했다시피 왕궁 근처에 있었다. 그러니 단유가 그곳으로 갈 일이 없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혼자 물을 날라야 했으니.”

“힘들긴요. 어릴 때부터 늘 하던 일인걸요.”

“그런가요?”

단유는 옆에서 종종 걸음으로 따라오는 엘라바인을 흘깃 바라보았다. 문득 자신을 졸졸 따르던 에밀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을까?

수원에 가까이 가니 익숙한 광경이 떠올랐다. 오래 전 마을에 하나뿐인 우물에서 물을 뜨기 위해 줄을 서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었지, 라고 단유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서 단유는 우물 위에 도르래를 이용한 두레박을 만들어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었다.

사람들이 줄 선 곳에 다가가니 엘라바인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려다 곁에 선 단유를 보고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들이 관찰되었다. 이 역시도 단유가 그간 연구실과 집만 오가는 생활만을 한 탓이었다. 단유가 아직 이 도시가 낯선 만큼, 그들도 단유가 낯설었다. 더욱이 알게 모르게 퍼진 소문들. 단유를 훔쳐보는 눈빛에 두려움과 호기심이 깃들어있었다.

수원은 거대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곳을 입장하려면 입구를 막고 선 경비병들을 지나야 했다. 슬쩍 보기엔 성문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삼엄한 눈빛을 보내는 경비병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길 오가며 물을 떴었나요?”

“네.”

단유는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살짝살짝 보이는 저수지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이네요.”

“그럼요. 여기 에강위가 만들어질 때 같이 만들어졌다고 하니까 역사가 오래됐죠.”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서 매해 사람들을 불러 보수공사를 해요. 겨울이 되면 여기 물이 줄어드는데 그때가 공사를 하기에 적기라고들 하더라고요.”

보지 않아도 대충 상상이 갔다. 추위에 붉어진 손들이 진흙을 뭉쳐 나르고 그 진흙들을 깨진 벽 사이에 밀어 넣었으리라. 척 봐도 군데군데 고르진 않지만 정성스레 덧붙여 구멍을 막은 흔적들이 보였다.

“잠깐,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경비병이 단유를 막아섰다. 엘라바인이 입을 열기 전에, 단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라바인을 도우러 왔어요.”

엘라바인에게 사실이냐고 묻는 표정들을 짓는 경비병들, 그리고 그 표정 앞에서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라바인, 그리고 경비병들은 단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단유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두 손에 든 양동이를 들어 보이자 결국 입장을 허락했다.

수원 앞에서는 무언가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도 누가 물을 얼마나 떠갔는지를 체크하는 것 같았다. 그런 꼼꼼함에 단유는 헛웃음이 나올 뻔 했다. 공공 재산으로서 수원을 관리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보단, 고리대금업자가 자신의 금고 앞을 지키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그 기록하던 이가 단유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고보니 살짝 눈에 익은 얼굴이기도 했다. 가만 보니 연구실을 오가다 만난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단유는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는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 입구 쪽을 지키는 경비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단유는 싱긋 웃으며 엘라바인에게 물었다.

“그냥 여기서 물을 가득 채우면 되는 건가요?”

“네.”

수원은 생각보다 크고 깊었다. 어찌나 깊은지, 새벽이라 빛이 밝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아래가 시커멓게 보였다. 넓기도 무척이나 넓어서 눈대중으로 보건대 대략 지름이 30m는 될 듯 보였다. 그리고 드러난 수원의 대부분은 일견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거대한 덮개로 뒤덮여 있었고,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덮개가 벗겨진 쪽으로 다가가 물을 퍼 담는 방식이었다.

‘결국 거대한 우물이군.’

잠시 그 깊은 수원의 안쪽을 유심히 바라보던 단유는 엘라바인에게서 물동이를 받아 물을 듬뿍 퍼 담았다. 엘라바인이 들고 있는 물동이 한 개와 자신이 들고 온 물동이 세 개를 모두 채우고 돌아서니, 예의 그 학생이 그걸 지켜보다 종이에 기록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단유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학생이 슬쩍 눈치를 보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양동이 두 개 분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런 뜻이었던 것 같았다. 단유는 고맙다고 입 모양으로 인사를 전한 뒤, 엘라바인과 함께 나섰다.

집에 돌아오는 동안에는 가벼운 대화도 없이 조용히 돌아왔다. 엘라바인은 굳은 얼굴을 한 단유를 보며 혹시 기분이 나빠진 건 아닌지 눈치 보느라 바빴고, 단유는 단유 나름대로 생각에 잠긴 탓에 입을 열지 않았다.

“주세요. 제가 가져다 놓을게요.”

단유는 순순히 그녀에게 물동이를 전하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저택 내에 있는 물탱크로 안내를 부탁했다.

물탱크는 마치 와인 저장통처럼 생겼는데, 옆에 작은 사다리가 놓여져 있었고, 거기에 물동이를 지고 올라가 붓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마개를 뽑아 물을 받고, 다 받은 후엔 다시 마개를 막게 되어 있었다.

물탱크를 퉁퉁 두드렸더니 속이 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다리로 올라가려는 엘라바인을 막고 단유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를 대신해 세 양동이 분을 모두 붓고 내려왔다.

“고맙습니다. 이제 제가 할게요. 선생님은 선생님 일 보세요.”

“아뇨. 엘라바인도 잠깐 쉬어요. 그리고 같이 가요.”

엘라바인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다 채우지 못했는걸요. 그래도 여름에는 물이 많은 편이라 많이 뜰 수 있게 해주거든요. 이때 물을 많이 받아놔야 해요.”

“급할 건 없으니까 조금 쉬어요. 많이 힘들어 보이니깐. 대신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네?”

“여긴 비가 많이 내리나요?”

갑작스러운 단유의 물음에 엘라바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단유의 물음이니 왜 그런 걸 묻냐고 반문할 순 없었다.

“가끔씩이요.”

“자주 오는 편은 아니고요?”

단유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도 간간이 가랑비가 내리긴 했지만, 그리 많은 비가 내린 적은 없었다.

“네. 그렇게 자주 내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 부분을 더 자세히 파고들려면 학자들에게 문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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