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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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넓은 대전에서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중에 단유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 오르게 되었고, 왕은 그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안됩니다, 폐하. 비록 그가 여기에 머물기를 결정했다 하나 아직 그 의도가 만리(Manlee)의 말처럼 순수하다고 여기기는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법사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들이라 했습니다. 만약 그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면 폐하를 면전에서 뵙는 그 순간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 신하가 한목소리로 반대를 외쳤다.
“그건 어차피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미 단유가 공국에서 벌였던 일들에 대해 보고를 받은 참이다. 심지어는 녹스에서 벌어졌던 일까지도 늦게나마 보고를 받았고, 그의 마법이 무시무시하다는 것까지 확인한 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악의 선택은 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막 전쟁이 끝났습니다. 비단 그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폐하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을 불순분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으로도 폐하의 신변에 위협이 없도록 호위에 만전을 가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왕의 안전을 염려하는 신하의 말에 왕은 아쉽다는 눈빛으로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물었다.
“그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것 같소?”
“만리의 말에 따르면, 우선은 함께 공동연구를 하고자 한답니다.”
“공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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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연구요?”
만리 울스프(Manlee woolsph)의 제안에 단유가 되물었다.
“내가 가진 자료와 지식, 그리고 마법사로서의 자네의 경험들이 합쳐지면 보다 빨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자네는 자네가 호기심을 가진 문제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테고, 난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거지.”
반짝이는 눈동자로 단유의 대답을 기다리는 울스프에게 단유는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답은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유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서로 도울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죠.”
“분명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네.”
울스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유에게 손을 내밀었고, 단유는 그의 손을 잡았다.
물론 울스프의 제안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의도를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령관이 제안했던 것과 비슷한 제안이 깔려 있을 테다. 하지만 사령관 때와는 달리, 이 제안은 단유로서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메리트가 있다고 여겼다.
지금 단유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사실 물을 것도 없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를 기다리고 있을, 명수와 하은에게 돌아가는 것이 단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풀 방법이나 혹은 이를 위한 실마리는 전무한 상태. 막막하기만 한 문제를 풀기 위해 단유는, 매일 밤, 매 시간 고민을 거듭했다. 에밀리아, 사울른과 함께 지낼 때도 시간이 날 때마다 단유는 그 문제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이 단유를 에토신스로 오게 했고, 울스프가 가진 자료들은 단유의 그런 고민을 해결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그의 공동 연구 제안은 단유를 에토신스에 머물도록 하는 동시에 그가 이 나라에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제약임을 알면서도 받아들였다.
사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의 제약도 되지 못한다는 게 현실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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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단유는 여관을 나와 새로운 집에 머물게 되었다. 작은 정원이 딸린 3층짜리 저택이었다.
“자네가 이곳에서 연구를 하는 동안 머물 수 있도록 폐하께서 배려하셨네.”
뒷짐을 지고 함께 집을 둘러보던 울스프의 설명에 단유가 돌아보며 물었다.
“저 혼자 사는 건가요?”
“그렇네.”
혼자 살기에 너무 넓은 집, 이라는 게 울스프의 속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유가 이런 집을 아무런 대가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준 왕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괜찮네요.”
하지만 단유의 감상은 거기에 그쳤다. 울스프는 뭔가 심심한 단유의 반응에 눈을 찡그렸다.
“···그뿐인가?”
“네? 아, 뭐. 혼자 살기에 충분해 보이네요. 고맙습니다.”
‘충분하다’는 단유의 말에 울스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집은 공국에 가도 하위 귀족이나 되어야 살 수 있는 집이었고, 일반 평민들은 감히 구경도 못 해 볼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도 저리 덤덤하다니, 뭔가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서울에, 그것도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지역에, 최첨단의 기술이 가미된 인테리어로 도배된 100여 평짜리 집을 보유한 단유에겐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지하 도시를 만들면서 이 시대 사람들에겐 그저 기적으로만 보일 최신의 기술을 선보인 바 있었던 단유였기에 넓기만 한 이 집에 그리 감탄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입맛에 맞게 조금 고쳐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울스프가 조금 못마땅한 모습으로 단유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선생님.”
그 부름에 고개를 돌아보니 포아테지가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포아테지의 뒤에 선 이도 울스프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이를 확인한 뒤, 단유를 불렀다.
“이보게.”
“네?”
“인사하게. 앞으로 여기 집안일을 봐줄 이네.”
양쪽으로 갈색 머리를 땋은 젊은 여자가 단유를 보며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엘라바인이라고 합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단유를 바라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떨어뜨리고 마는 그녀는 두 눈의 색깔이 다른, 이른바 ‘오드아이(odd-eye)’를 가지고 있었다.
“집 안 청소와 식사를 책임질 걸세. 이 역시 왕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거절하지 않아도 되네.”
굳이 거절할 생각도 없던 터라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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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단유는 울스프의 연구실이 있는 곳으로 출근을 했다. 처음에 갔을 때 보았던 것처럼 그곳은 여러 학자들이 함께 사용하는, 일종의 연구 기관과 같은 곳이었다. 연구라고 해봐야 온종일 책과 씨름하는 일이었고, 가끔 저택 안쪽에 있는 작은 정원에 놓인 의자에 앉아 동료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는 게 전부라고 포아테지가 설명해주었다.
“사실 선생님들마다 연구하는 주제가 다 달라서 별로 토론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들 자존심이 강하신 분들이어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이 되고 말지만, 차마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어 말을 줄이는 포아테지였다.
단유가 울스프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단유가 울스프의 연구실로 찾아온 날,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학자들이 모두 문을 열고 나서서 단유를 ‘구경’했다.
“자네가 그 유명한···이로군.”
아직은 ‘마법사’라는 타이틀이 주는 껄끄러움에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는 노학자들이었다.
에토신스의 연구실은 비단 여기만 있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곳에서 연구하던 학자들도 단유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반갑네. 난 쿠스타라고 하네. 약초학을 전공했지. 지금은 이 지역 자생 약초들을 배합하여 새로운 약물을 만들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어.”
때로는 실험을 하는 연구실도 필요했고, 그런 연구실은 성의 바깥쪽에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엉덩이 무거운 녀석들이 자넬 보러 이렇게 달려왔다네. 혹시 약초에도 관심이 있는가?”
“없진 않습니다.”
“그래?”
“어릴 때 약초점에서 일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게 정말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달려들려는 쿠스타를 울스프가 제지하고 나섰다.
“관심 끊게. 지금 나랑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시간 뺐지 말고 인사 다 했으면 이만 돌아가게.”
“귀한 시간 내서 찾아온 손님에게 너무 박정한 거 아닌가?”
“그 귀한 시간, 자네의 연구실에서 썩고 있을 풀들에게나 쏟게나.”
쿠스타는 혀를 찬 뒤, 단유를 보며 말했다.
“나중에라도 여유가 되면 한 번 찾아오게. 사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지 몰라.”
“제가요?”
“마법사들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며?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약초의 효능을 발견할지도 모르니 한 번 봐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럴 시간 없대도!”
울스프의 으름장에 쿠스타가 눈을 흘겼다. 단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물의 본질을 살피긴 하지만, 무엇이든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처음 보는 약초라면 아마 선생님보단 못할 겁니다.”
“그런가? 그래도 시간 나면 한 번 들리게.”
그런 식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의심 섞인 눈으로 단유를 경계하는 이가 더 많았다. 그들은 대놓고 단유에게 적의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쉽게 접근하지도,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대신 동물원에 새로 들인 악어를 구경하는 관람객처럼 멀찍이서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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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스프는 연구실의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그동안 고대 마법사들에 대한 자료들을 모은 것이네.”
“생각보다 많군요?”
“이것들을 모으기 위해 꽤나 고생했지. 돈도 많이 들었고. 날 후원해주시는 공작님의 도움이 컸지만 말이야.”
단유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한 벽을 가득 채운 책들과 종이들이 쌓여 있었다. 비교적 새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이쪽은 뭔가요?”
“여기는 내가 쓴 책들이네.”
“전부 다 말인가요?”
울스프는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나름대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며 확인한 것들을 쓴 것이지. 이쪽의 것은 오래된 것들이라 함부로 손대면 안 되지만, 여기는 보고 싶을 때 봐도 되네. 만약 빌려 가고 싶다면 빌려 가서 봐도 되고.”
그 정도로 소개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가장 처음 한 것은 역시 울스프가 가장 먼저 보여줬던 양피지에 적힌 글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이건 내가 외운 부분까지만 적힌 것이라 실제로 아버지께서 작성하셨던 건 이보다 더 많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이미 다 불타버려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지. 그래서 내용은 미완성이네.”
“그렇군요.”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아버지는 스스로를 마법사임을 이 글을 통해 밝히셨네. 내가 보여줬던 글귀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아버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법을 어떻게 구현하셨던 건지를 확인할 수 있었네. 문제는 그것을 봐도 일반인인 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고.”
울스프는 책장에서 양장된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와 양피지 옆에 두고 펼쳤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법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가 적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이걸 보고 따라 하면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보다시피···.”
텅 빈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울스프는 흐린 눈동자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방법대로 따라 했을 때 마법이 구현됐다면, 아마 아버지도 그리 슬픈 죽음을 선택하진 않았을 거야. 그래서 아버지는 마법이라는 것의 근원을 찾아 나서게 되었지.”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기던 울스프는 책을 돌려 단유에게 찾은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이 책은 고대 마법에 대한 기록이 적힌 사서(史書)네. 매우 짧게 명기되어 있지만, 이 구절을 통해 아버지가 찾으려던 것이 이것임을 알게 되었어.”
단유는 울스프가 짚은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 소리가 하늘에 닿으니 구름이 갈라지고 빛이 내려와 노래에 화답하듯 춤을 추었다. 춤추던 빛무리가 세상을 뒤덮자 사람들은 마침내 탈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탈을 벗은 이들이 외치자 땅이 움직이고 물이 솟아났다. 불꽃이 맴돌며 추위를 몰아내고 어둠을 쫓아냈다.···」
울스프는 양피지의 한 부분을 짚었다.
“‘라티오를 떠올리는 법을 잊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라티오에 눈을 맞췄을 때 내 몸을 관통하던 환희는 잊지 못했다’.”
단유와 울스프과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자네도 ‘환희’를 느꼈는가?”
문득 단유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장면은 바로 게리를 만났던 그 시기, 우연히 접했던 마약과 그 마약으로 인해 겪었던 환상의 조각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