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신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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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바닥을 찧을 때마다 자국을 남기는 지팡이로 노구를 지탱하며 걸어가는 울스프의 뒤를 따라가던 중, 울스프가 뒤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자넨 이 곳 사람이 아닌가 보군.”
“네.”
“에강위는 처음인가?”
“네.”
울스프의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사내가 옆으로 몸을 틀어 비켜섰고, 지팡이는 멈춤 없이 땅을 짚어갔다.
“따뜻한 곳에서 온 모양이군. 이 동네에는 그리 얇은 망토를 걸친 이가 없다네.”
단유는 자신이 둘러쓴 망토를 한 번 보고 주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비슷해 보이던 옷들이 디테일하게 살피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몸이 좋으니 쉽게 감기에도 걸리진 않겠어.”
걷던 중에 침을 모아 뱉는 노학자의 모습에 살짝 걸음을 옮겨 길의 가운데로 걷기 시작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은 무슨. ···젊은 녀석이 능청스러운 데가 있군 그래.”
노인과 단유는 북쪽으로 향하는 큰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까와 달리 이곳은 여러 상점들이 위치한 길이었다. 도서관을 찾기 위해 걷던 동서로 뻗은 길이 일반 주택가 사이에 난 보행자 전용 도로를 걷는 느낌이었다면, 지금 걷는 길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재래 시장 한복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보기에도 무식해 보이는 식칼로 고기를 저미던 사내가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다 잠시 단유를 바라보기도 하고,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로 무쇠 같은 팔을 들어 무두질을 하던 사내가 가게 앞에 찾아온 이를 반기며 손을 털기도 했다. 짐승의 피가 담긴 것으로 추측되는 통을 양손에 들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남자와, 이를 미처 보지 못해 앞치마에 붉은 자국이 남긴 중년 여성이 화를 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복잡한 그 거리를 유유히(?) 걸어가던 중 몇몇 사람들이 울스프에게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영감, 오늘 괜찮은 물건이 들어왔는데 한 번 보실려우?”
“오늘은 바쁘다네.”
“하나 빼 놓겠수.”
“그러시구려.”
“늦게라도 한 번 들리시오.”
무슨 물건인지 궁금했지만, 구체적인 이름이 오가지 않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묻기에는 울스프와 단유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역시 거리를 좁히기엔 대화가 제격인데 이곳은 너무 시끄러워서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그도 단유 만의 생각일 뿐, 울스프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어디에 묵고 있는가?”
“성문 근처의 여관에 방을 잡았습니다.”
울스프의 눈동자가 잠깐 위로 향했다가 다시 단유에게 돌아갔다.
“아, 퍼얼네 말이군. 거기 건물이 고친 지 얼마 되지 않았지.”
“다른 여관도 있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솔직히 말해서 퍼얼의 여관이 얼마 전에 보수를 해서 보기엔 좋지만, 그 집 음식은 정말 별로거든. 그 때문에 거기 여관은 늘 한산하지. 여관을 찾은 사람들은 하루를 묵은 뒤 곧 다른 여관으로 옮겨가지만 퍼얼은 그걸 몰라. 이곳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몰라. 그래서 매년마다 보수공사를 하고 항상 새 건물인 것처럼 꾸미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하루를 묵고 나면 다른 곳으로 옮기지. 거기 음식은 먹어 보았나?”
“아뇨, 아직.”
“자네의 미각에 자신이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지. 더러 그 집 음식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가요?”
“문제는 그 사람이 퍼얼의 동생이란 점이지. 그러니까 형제가 같이 여관을 운영하는 거겠지만 말일세.”
또 침을 가득 모아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퉤, 뱉었다. 튀어나온 벽돌에 맞고 흘러내리는 침과 그 옆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국들, 그 아래로 주변과 다른 색을 보이는 흙바닥을 보며 단유는 다시 길의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마침내 도착한 곳은 달리 특별해 보일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집이었다. 그래도 학자의 연구실이니 뭔가 다르지 않을까 했지만, 걸어오는 동안 숱하게 보았던 건물들과 유사한 건물이었다.
울스프는 지팡이 아래로 문 앞의 석판을 두 번 쿵쿵, 찧었다. 곧 문이 열리고 더벅머리를 한 젊은 사내 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셨습니까.”
인사와 동시에 몸을 뒤로 물리니, 울스프가 다시 지팡이를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단유가 뒤따르자 사내 아이의 시선이 레이저 광선처럼 단유의 위아래를 쏘아보았다.
문을 지나 램프가 밝혀진 복도를 지나니 복도 옆으로 닫혀 있는 몇 개의 문들이 보였다. 문들에는 어떤 문양이나 문패도 없어 그 안이 어떤 곳인지 식별하기 어려웠다. 울스프는 그 복도를 거침없이 가로질러 가장 안쪽의 방문을 열었다.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무슨 뜻이냐고 묻는 노인의 표정이었다. 단유는 그저 도서관에서 그렇게 날선 반응을 보이던 노인이 이곳까지 내치지 않고 데려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반응을 보인 것 뿐이었다.
어느새 뒤쫓아 왔던지 더벅머리가 단유를 스쳐 지나가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울스프가 지팡이를 창가에 두고 망토를 벗을 때 얼른 그 망토를 받아다가 벽에 걸린 옷걸이에 걸어두고, 벽과 책상에 놓인 램프에 불을 붙여 방안을 환하게 밝혔다.
“올해 여름은 예년보다 덥지 않을 모양이다.”
혼잣말 같은 울스프의 말에 더벅머리가 대뜸 반응했다.
“불이라도 지필까요?”
“그래 다오. 아직은 으슬으슬하구나.”
더벅머리는 벽에 붙은 벽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능숙하게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고 장작에 옮겨 불을 피워냈다. 벽난로 앞에 놓인 손풀무를 집어 들고 몇 번 바람을 일으켜 불을 키워낸 뒤,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섰다.
그때 울스프는 의자에 걸려 있던, 모자가 달리지 않은 망토를 어깨 위로 두르고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서신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네는 거기 앉게.”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벽에 붙은 책장 옆에 등받이 없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들고 와서 여기 앉아.”
여기서 손님 대접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단유는 의자를 집어 들고 울스프의 맞은 편에 앉았다.
“차라도 대접할까요?”
어느새 일을 마친 더벅머리가 울스프를 바라보며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따뜻한 맨드라미차 한 잔 다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도.”
더벅머리가 단유를 흘깃 본 뒤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더벅머리가 나간 뒤, 울스프는 살피던 서신들을 한쪽으로 제쳐 두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때 단유는 주변을 살피느라 울스프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연구실, 이라고 했지만 사실 작은 도서관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방이었다. 아까 도서관에서 본 것과 같은 책장들이 창문이 있는 벽을 제외한 세 벽을 모두 둘러싸고 있었고, 책장에는 한 손으로 들고 보기가 힘들 것 같다고 느낄만한 두께의 책들이 즐비했다. 한쪽 책장에 그런 책들이 가득했다면, 다른 책장에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루마리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친구로군.”
그제야 시선을 돌린 단유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울스프의 시선과 마주했다.
“이렇게 많은 책들을 본 건 처음이거든요.”
이곳 세계에서는 말이다. 울스프는 눈썹을 한 번 추켜 올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제국의 학자들은 우리 도서관 만한 개인 연구실을 각자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군요.”
“공국에서 왔다고 했었나?”
“네.”
“고생 좀 했겠군,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났죠.”
“안타까운 일이야. 정을 붙이고 살았던 터전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겪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지. 비록 난 승전국에 속했지만, 공국민의 아픔에는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네.”
“점령군이 모두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그나마 그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겠죠.”
“어려운 일이지, 그건. 점령군에게는 점령군만의 혜택이 주어져야 할 테고, 승리의 여운을 즐기고 싶은 점령군은 이성을 상실한 채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니까. 그들은 만취한 건달이나 마찬가지일 거야.”
“그렇겠죠.”
“무미건조한 반응이군. ···자네는 이번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모든 전쟁이 그렇듯, 욕심과 욕망이 충돌하여 벌어진 일 아닐까요?”
“호오. 꽤 현학적인 대답이군. 내가 원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나름 고민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 보이는군. 욕심이라···.”
“힘의 충돌은 결국 이성을 포기했기에 벌어지는 일 아닐까요? 인간이 이성을 버리고 나면, 남는 건 원초적인 본능과 욕심뿐일 테죠.”
울스프가 눈을 좁히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자네는 정말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말씀드린 대로 학자분들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학자를? 왜?”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게 무엇인가?”
“마법사들에 대해 아십니까?”
되묻는 질문에 울스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 그들은 왜?”
“잘 아십니까?”
“이상한 질문이지만 굳이 대답하자면, 그렇네. 물론 마법사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같은 마법사들이겠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마법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역시 우리 같은 학자들이겠지. 게다가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일 테고.”
“그렇습니까?”
“사실 내가 얼마 전에 연구를 마친 내용 중의 하나가 고대 마법사들이 남긴 기록물에 대한 검토였거든.”
“고대 마법사···. 예전에도 마법사가 있었습니까?”
“사람이 있는 곳에 마법사들이 없었겠는가?”
단유는 그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울스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마법사는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들이지. 비록 몇십 해 전에 마법사를 소탕하니 마니 하면서 난리를 떨던 족속들이 있었지만, 그건 그저 개소리였지. 마법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나타난 이들이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언제나 인간의 역사 속에 함께 했었네. 아마 지금도 마법사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우리 속에 숨어 있겠지.”
어쩐지 단유의 정체를 빤히 알고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에 고대 마법사들의 기록이라고 하셨는데, 마법사들이 기록을 많이 남겼나요?”
“많지는 않지만 없지는 않네. 사실 대부분은 그런 기록을 남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마법에만 탐닉할 뿐이지. 마법이 곧 그들의 힘이니까. 자네가 아까 말한 것과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난 인간이 가장 이성적일 때, 힘에 의존한다고 보거든.”
“왜 그런가요?”
“인간은 언제나 싸워야 하네. 상대가 몬스터이든, 인간이든, 혹은 이 자연이든. 싸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 만약 싸움을 피하며 살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면 결국 그 삶은 패배의 연속이 되겠지. 몬스터의 침입을 걱정하고, 인간의 폭력에 굴종하고, 저항할 수 없는 자연에 굴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야. 사실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긴 하지만, 더러 소수의 사람들은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힘을 기르지. 그건 가장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물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증명된 삶의 진리라네. 바꿔 말하면, 이성적이지 못하고 오랜 역사로부터 눈을 돌린 이들이라면 결국 패배자로서 죽음과 희생을 강요받게 된다는 뜻이야.”
“그게 전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신가요?”
“그렇네.”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말인가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 그것도 적절한 표현이군.”
울스프는 턱 아래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범상치 않은 이로군, 자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나와 이 정도 대화를 이어나갈 수준이니 말이야.”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만,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시면 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군.”
“연구실에만 있으면서 세상을 다 보고 있다고 착각을 하시는 게 아닐까 우려되어 드린 말입니다.”
“비꼬는 게 맞았군.”
“설마요. 저도 사실은 당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는걸요. 다만 다행스럽게도 제 주위엔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사고의 편향성을 줄일 수 있었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이 나이 먹도록 골방에만 처박혀 있진 않았네. 그리고 내가 만난 이들 중에서 자네처럼 날 똑바로 쳐다보며 대화를 이어나간 이는 많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네.”
“다른 학자분들도 말입니까?”
“그들은 다르지. 다르니까 학자라는 명예를 목에 걸고 머리를 무겁게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거고.”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해보게.”
“마법사에 대해 잘 아신다고도 하셨는데, 혹시 직접 만나본 적도 있습니까?”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