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신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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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걸으니 몇몇 사람들이 단유를 흘깃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그저 의례적인 시선일 뿐 딱히 외지인을 알아보고 경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덕분에 단유는 새 놀이터에 놀러 온 이웃 동네 아이처럼 주위를 살피며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은 빠르지 않았고, 때문에 단유도 덩달아 천천히 걸어야 했다.
단유가 느낀 이 도시만의 분위기를 제외하면 여태 보았던 곳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복식이나 생김새가 다른 지방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다만 공국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보았던 허름해 보이던 사람들보단 나은 형편인 것처럼 보였다. 일단 다양한 색의 복식을 걸친 사람들이 보인다는 점에서 나름 ‘패션’을 고려할 여유가 있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도시 풍경이었다.
야채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손에 들고 걸어가는 아주머니와 심각한 고민이라도 하는지 입술을 굳게 닫고 눈썹을 좁힌 채 걸음을 옮기는 사내는 일상적이었다. 모자를 쓰고 행인들 사이를 헤치며 뛰어가는 사내아이가 단유 곁을 스쳐 지나가고, 등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느린 걸음을 옮기는 노인과 눈이 잠시 마주쳤지만, 이내 노인의 무미건조한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골목 입구 옆에서 작은 상자를 의자 대용으로 쓰고 있는 사내가 작은 도구를 이용해 무언가를 고치고 있는지 열중하고 있었고, 그 곁에 엎드려 있던 늙은 개 한 마리의 흐린 시선이 단유를 쫓았다. 킁킁거리며 코를 씰룩이고 혀를 내미는 개를 보니 왠지 정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갓 상경한 시골 총각 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단유의 눈에 입구가 매우 넓은 건물 하나가 들어왔다. 회칠이라도 한 것처럼 하얀 벽의 손이 닿지 않을 높이에 작은 원형 창이 여러 개가 줄지어 있었고, 폭이 좁은 난간이 1층과 2층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건물의 꼭대기는 뾰족한 철 기둥이 하나 꽂혀 있었는데, 마치 교회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위를 바라보는 중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실 인기척을 느끼기 전에 목소리가 먼저 와 닿았다.
“어어?”
뒤를 돌아보니 얼굴을 가릴 정도로 높게 쌓인 상자를 들고 위험하게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시야를 완전히 가리진 않아서 눈만 빼꼼 내놓고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걷고 있었는데, 그래서야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러니 고르지 않은 바닥 어딘가에 걸려 비틀거리는 것이겠지.
쌓인 상자가 흔들리고 균형을 잃을 모양새라 단유가 손을 뻗었다. 가벼운 바람에 상자가 쓰러지는 걸 억지로 막아내며 다가가 상대를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아아, 고맙습니다.”
턱 아래에 염소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진땀을 흘리며 단유를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단유가 그가 든 상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었더니 더욱 고마워했다.
“들어드릴게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까지 가시나요?”
사내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단유를 올려다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여기, 도서관까지만 가면 돼요.”
턱짓으로 가리켜 보이는 그 건물은 단유가 계속 바라보고 있던 그 건물이었다. 역시 여기였구나, 생각하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세요.”
문 앞에 다가간 사내는 상자를 내려놓고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두드렸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내 도서관의 문을 열고는 두 손으로 힘주어 문을 밀었다. 경첩이 밀리며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뒤로 하고 사내는 다시 내려놓았던 상자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눈가에 가득 주름을 만들어 보이며 사내는 단유를 안으로 들였다.
오기 전까지, 어떤 모습의 도서관일까를 상상했는데 실제로 바라본 도서관의 첫 인상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였다. 사실 에강위 자체가 지대가 높기도 하거니와 다소 습도가 높은 도시이긴 했지만,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 이렇게 습하면 그 안의 책들이 과연 보관이 잘 될지 의문이었다.
‘걱정도 팔자라.’
단유가 관리하는 도서관도 아닌 마당에 뭐하러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까?
실내는 어두운 편이었고, 다만 밖에서도 보았던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만이 겨우 어둠에 저항할 뿐이었다. 흐릿한 빛의 기둥을 타고 오르는 먼지들의 움직임을 훑던 중, 갑자기 실내가 밝아졌음을 깨닫고 눈을 돌렸다.
“여기 두시면 됩니다.”
방 가운데 있던 책상 곁에 가지고 들어왔던 상자를 내려놓은 사내가 책상 위 램프를 켰던 것이다. 단유는 사내가 지정한 장소에 상자를 내려놓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실내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좁아 보였는데, 이유는 역시 실내를 가득 채운 책장 때문이었다. 벽마다 넓은 책장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제대로 돌아다니기 힘들 것처럼 곳곳에 독립된 형태의 책장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서적들이 책장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유가 나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땀을 식히던 사내가 말을 붙였다.
“실은 이곳에 볼 일이 있어 오던 참이었습니다.”
“여기? 도서관엘 말입니까?”
“네.”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슬리와 약속이라도 하신 겁니까?”
“애슬리는 누구죠?”
사내는 더욱 의아하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았다.
“애슬리는 이 도서관을 책임지고 있는 수석 학자입니다.”
“아, 그렇군요. 가능하다면 그분도 뵙고 싶군요.”
“···여기 분은 아니신 거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오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공손한 질문이지만 단유를 경계하고 있는 눈빛이 램프 불빛과 함께 번뜩였다.
“실은 이곳의 학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단유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공국민이신가요?”
“아닙니다. 다만 공국 쪽에서 온 것은 맞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대답을 듣는다면 의심쩍게 단유를 바라볼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도 단유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 대신 다른 질문을 던짐으로서 화제를 돌렸다.
“그쪽 분은 어떻게 불러야 하죠?”
“아, 저는 포아테지라고 합니다.”
“그쪽도 학자이신가요?”
“저요? 아닙니다. 학자를 지망하긴 하지만, 아직은 그저 허드렛일만 할 뿐이죠.”
뭐랄까? 정확하진 않겠지만, 만약 학자를 교수에 비유한다면 눈 앞에 선 중년 사내, 포아테지는 조교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조교라기엔 나이가 좀 많아 보이지만, 그건 이쪽의 사정일 테다.
“제가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 학자 분들을 뵈려면 미리 약속을 해야 하는 건가요?”
“뭐, 그게···.”
포아테지는 땀에 절은 머리를 긁적이다 대답했다.
“약속을 하고 오는 게 좋긴 하겠지만, 사실 그 약속이란 것도 사실 어렵습니다. 학자 분들은 본인의 연구 때문에 시간을 내기 힘드시니까요.”
“여기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기는 책만 보관하는 곳입니다. ‘도서관’이니까요.”
“아.”
이번엔 단유가 볼을 긁적였다.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가진 단유의 이미지가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이곳에서 ‘도서관’은 오직 책들을 보관하는 서고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럼 어디로 가야 그분들을 뵐 수 있나요?”
“당연히 그분들의 ‘연구실’로 가야 뵐 수 있겠지만, 그건 어려울 겁니다. 바쁘시니까요.”
마치 따로 배정된 교수실과 연구실에서 개인 과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럼 혹시 여기 책들은, 원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하기도 하나요?”
“그럴 리가요. 그랬다가는 이 책들은 진작에 모두 사라지고 없어졌을 겁니다.”
그만큼 중요한 내용들을 담은 책이란 이야기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만져대다간 모두 부스러지고 말 테죠. 그런 끔찍한 일이라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요.”
“아, 네.”
“그리고, 사실 학자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도서관의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이 책들이 품고 있는 원대한 역사와 진실의 파편을 사람들은 모르죠. 심지어는 귀족들도 말이죠. 그들은 그저 오늘 하루만 사는 이들입니다. 어제 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 일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죠. 그나마 황제 폐하께서 이 도서관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시니 겨우 이어지고 있을 뿐이고, 만약 다른 왕이었다면 진작에 불쏘시개나 되고 말았을 일입니다.”
갑자기 흥분하며 열변을 토하는 중년 사내를 보며 단유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기나 할까마는, 어쨌든 단유는 사내가 가진 자부심에 속으로나마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단유는 다시 말을 붙였다.
“저는 이 책들에 담긴 진리의 파편에 관심이 많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어진 요청에 열변을 토하던 사내는 금방 열이 식은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군요.”
“만약 책의 훼손이 우려된다면 옆에서 도와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사례는 해드리겠습니다.”
“사례를 떠나, 책의 열람권은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외부인을 안으로 들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주시려 하셨기에 안에 들인 것이지, 만약 학자 분들께서 이 광경을 보신다면 전···.”
“포아테지!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포아테지의 말을 자르고 끼어든 고성에 포아테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 죽습니다.”
단유는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광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포아테지보다 작은 키에 굽은 등을 가진 사내의 목소리로 보건대 나이가 한참 많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리고 학자, 이려나?’
단유가 호기심을 가질 때, 포아테지가 얼른 그에게로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올스프. 오셨습니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포아테지를 질책하는 그의 손가락이 단유를 가리켰다. 포아테지가 단유를 힐끗 본 뒤, 염소 수염을 향해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양초들을 옮기는 데 도움을 주어서 잠시 들어온 참이었을 뿐입니다. 금방 나갈 겁니다.”
“양초 따위 옮기는 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단 것이냐!”
책상 옆에 쌓인 양초 상자를 보면, 포아테지 정도의 체구를 가진 사내가 쉽게 옮길 양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노인, 올스프의 역정은 오로지 포아테지를 향할 뿐이었다.
“금방 내보내겠습니다.”
대답하는 포아테지가 단유를 향해 몸을 돌릴 때, 단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올스프에게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단유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전 루치드라고 합니다. 이곳에 훌륭한 학자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왔습니다.”
“학자?”
올스프가 단유의 말에 반응했다.
“네. 실은 제가 호기심을 가진 부분이 있는데 혼자 해결하기가 어려워서요. 이곳 학자분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빨리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안으로는 허락받지 않은 이가 들어올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에 저지른 실수입니다. 금방 나가죠. 그런데 혹시 학자이십니까?”
대답은 포아테지가 대신했다.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분은 에강위에 계시는 학자분들 중에서도 존경받는 학자님이시죠.”
흠흠, 헛기침을 하는 올스프에게 단유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올스프는 코를 씰룩인 뒤, 손짓을 했다.
“우선 나오게. 여기는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치 않은 곳이니.”
사실 가만히 서서 이야기만 나누는 데 무슨 일이 있을까 싶지만, 혹시라도 책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학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단유는 올스프의 손짓에 따라 도서관을 나왔다.
다시 밝은 거리로 나와 돌아보니 올스프라는 노인의 외모가 선명히 드러났다. 윗머리가 벗겨진 올스프의 첫인상은 꽤나 완고한 고집이 엿보이는 얼굴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두껍고 낮은 콧대와 깊이 파인 팔자 주름, 그리고 그 주름 사이에 가둔 두꺼운 입술은 하얀 콧수염에 보일락말락 했고, 턱 아래 자란 하얀 수염은 가슴께까지 이르렀다. 자신의 팔뚝보다 굵어 보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찍으며 도서관을 나선 올스프는 단유를 올려다보며 한 마디 건넸다.
“자네, 상당히 몸이 좋구만.”
단순한 감상일 수도 있겠지만, 머리를 쓰는 족속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둘러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흠. 따라오게.”
단유는 앞장서는 올스프의 뒤에서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려 도서관을 바라보았다. 바닥을 긁으며 닫히는 문 사이로 울상을 짓는 포아테지의 얼굴이 보여서 단유는 짧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어내며 포아테지가 고개를 약하게 끄덕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