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07화 (707/956)

에토신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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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대답에 사령관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일로 가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일단은, 에토신스의 수도에 있다는 학자들을 만나러 가 볼 생각입니다.”

“학자를?”

“예.”

처음 녹스에서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려 했던 곳은 공국의 수도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공국의 수도는 이미 교국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비록 단유는 공국민이 아니었지만 교국민도 아니었기에 전쟁터의 한 복판인 공국의 수도를 평화롭게 방문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에토신스.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과거와 조우하는 경험을 수차례 겪은 단유는 어쩐지 에토신스에 가봐야 할 것 같은 직감을 느끼기도 했다. 에토신스 역시 이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이지만 공국처럼 치명적인 여파가 미치지는 않았을 테다.

“듣기로는 에토신스의 수도에도 학자들과 다양한 사료들을 보관한 도서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공국만큼 오래된 나라는 아니지만, 대대로 에토신스의 왕들은 현자들을 숭앙하고 그들의 연구를 지원하셨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제국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어지간한 나라들의 것보다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하나가 걸려 물었다.

“제국이요? 투르모 제국?”

단유의 물음에 사령관이 왜 그런 걸 묻냐는 눈으로 단유를 쳐다보았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사령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에 태양이 떠 있다는 걸 모르냐, 고 묻는 표정이었다. 단유는 아주 오래전, 이곳에 대해 들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드뷔시 대륙. 대산맥 동쪽에 위치한 넓은 땅을 일컫는 말로서 수많은 나라들이 정쟁과 전쟁으로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고 들었다. 그중 단유가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부오노 공국. 남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대산맥의 꼬리 부분에 위치한 공국은 대산맥의 황량한 절벽을 등지고 동으로 뻗어 나가는 형태의 나라였다. 하지만 북동쪽에 위치한 교국이 공국의 확장을 막고 있어 오래전부터 충돌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었다고 한다.

한편, 예전에는 듣지 못했었던 나라, 에토신스. 공국처럼 대산맥의 줄기 옆에 자리 잡은 나라로서 공국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나라였지만, 내실이 튼튼한 곳, 이라는 사울른의 평가를 들은 바가 있다. 지리적으로 표현하자면 공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이 나라는 공국과 사이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어차피 대산맥을 끼고 있는 나라들인지라 확장해봐야 이득도 없었고, 굳이 서로 부딪혀 갈등을 빚을 이유가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잘 언급은 되지 않지만 교국과 에토신스 사이에는 규모가 작은 왕국들이 있었고, 교국과 공국의 동쪽에도 국제 사회에 거의 힘을 투사하지 못하는 왕국들이 있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왕국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의, 도시국가 수준의 나라들이라는 평가다.

그리고 이전에는 들은 적이 없었지만, 최근 사울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된 투르모 제국. 북쪽의 동토(凍土)를 포함한 제국은 드뷔시 대륙의 지붕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했다. 영토의 3분의 1이 얼어붙은 땅이지만, 제국의 남쪽에는 어느 나라보다 넓고 비옥한 평야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장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군사력, 재력 어느 것으로 보아도 가장 강한 나라, 투르모 제국.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감히 덤비지도 못할 정도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대부분의 나라들이 몬스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형편인데 그런 말이 나올 정도라면 정말 강한 나라이긴 한가보다.

“하지만 역시 제국이 제국인 이유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

흔들리지 않는 황권, 공고한 신분제와 풍요로움은 뭇 나라들의 부러움을 받지만 어느 나라도 제국을 시기하지 못한다. 매년 조공을 보내고 환심을 사려 애를 쓸 뿐이다.

부디 제국이 이 이상으로 팽창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 에토신스에도 좋은 학자들과 장서들이 많지만, 제국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 그러니 이왕이면 제국으로 가는 게 더 좋지 않겠나?”

굳이 짐작하려 들지 않아도 사령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던 단유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게 단속하며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우선은 에토신스에서 볼 일을 보고 가보겠습니다.”

“···정말 에토신스에 가는 이유가 학자를 만나기 위함인 것인가?”

“그게 가장 큰 이유이고, 부수적인 이유라면 역시 사령관님이 생각하시는 그것이겠죠.”

사령관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단순히 유랑민이 자국의 수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무려 한 부대를 괴멸시킨 마법사가 수도로 가는 것이니 사령관으로서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막을 방법도 없다. 가지 말라고 조를 수도 없고, 가지 못하게 그를 구속할 수도 없다.

“난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러실 거라 믿습니다만, 불가피하게 마을을 떠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령관님의 약속만 믿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내며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는 사령관.

“그럼 여긴 왜 온 건가?”

통보라도 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편의를 위해 통행증이라도 발급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인가? 차마 체면 때문인지 대놓고 신경질을 부리지는 않지만, 나오는 말이 상냥하진 않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통보는 아니고요, 서로의 약속을 확인하고 앞으로도 이 평화가 유지되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게 통보지 뭔가?”

“그리고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만약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게 된다면 저 역시 모종의 행동을 취하겠다는 걸 알려드리려고요.”

“모종의?”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게 더 두려운 사령관은 눈에 힘을 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담담하게 시선을 받으며 손을 내밀었다.

“언제 본국으로 돌아가시나요?”

내밀어진 손을 힐끔 보고 사령관이 대답했다.

“여기가 완전히 안정을 취한 뒤에 돌아가겠지만, 지금 예상으로는 아마 최대한 빠른 시일에 돌아가지 않을까 싶네.”

“그럼 수도에서 다시 뵐 수도 있겠네요.”

“···그렇겠지.”

“그럼 그때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죠. 아, 그런데 에토신스의 수도는 뭐라고 부르나요?”

“에강위, 라고 부르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요?”

“높고 넓은 땅, 이라는 뜻이네.”

****

높고 넓은 땅, 에강위는 산허리를 뚝 자른 것 같은 고원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거친 절벽을 가진 협곡 사이의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야 수도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협곡을 지나면 펼쳐지는 넓은 평원과 그 평원의 끝자락에 위태롭게 선 높은 성벽, 그리고 그 성벽보다 높게 솟아있는 수많은 성탑들은 이야기 속에나 나올법한 그림이었다.

“카메라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도를 둘러싼 성벽의 웅장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좌우로 뻗은 데다 어지간한 아파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높은 성벽은 보는 이가 아찔할 정도였다. 이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서면 대부분 사람들은 절로 위축되리라.

성문에 다가가니 거대한 철문이 들려져 있었고 그 앞에 경비병들이 서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외모의 그들은 수도의 경비병답게 조금도 느슨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모든 통행인들을 눈으로 쫓으며 수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지 관찰하는 경비병들이었다.

“다 왔네.”

“고맙습니다.”

단유는 타고 있던 수레에서 내려 말을 끄는 노인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공국에서 에토신스로 넘어오는 길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라 자전거로 이동하기에 무리가 없었지만, 에토신스로 넘어온 뒤에는 지형 자체가 자전거로 이동하기에 부적절한 곳이 많았다. 결국 단유는 자전거를 포기하고 도보로 이동했는데, 수도 근처로 오는 중에 마침 수도로 들어가는 노(老)상인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내가 더 고맙지.”

앞니 하나가 빠져 바람 새는 소리를 내는 노인이 히죽 웃으며 단유의 인사를 받았다.

길에 솟아난 바윗돌에 걸려 축이 부러지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던 노인에게 도움을 준 단유였다.

“여기서는 모두 걸어서 들어가야 하네.”

“그렇군요.”

노인은 귀를 덮는 모자를 벗고 푸석푸석한 머리를 긁적인 뒤, 다시 모자를 뒤집어썼다.

“혹시 갈 곳이 없으면 날 찾아오게. 아니면 식사라도 대접하지.”

“알겠습니다.”

노인은 웃음을 흘리며 먼저 성문으로 향했다. 단유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핀 뒤 성문으로 걸어갔다.

“멈춰라.”

경비병들은 단유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수도라지만 현대의 그것처럼 왕래가 왕성하지 않은 탓에 이곳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거의 한정된 편이었고 그래서 낯선 얼굴이 등장하자 경비병들이 곧장 길을 막고 물었다.

단유는 공국에서 왔다는 말 대신,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의아해하는 경비병이 그것을 받아 확인하니, 그것은 신분이 확실한 분의 인장이 찍힌 출입증이었다.

경비병은 받아든 출입증과 단유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동료에게 그 출입증을 건네고 단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이곳에 유명한 학자들이 있다기에 그분들을 뵈려고 왔습니다.”

출입증을 건네 받은 이는 다시 종이를 말아 단유에게 돌려주었다.

“플란트 사령관님을 어디서 뵈었소?”

“공국에서 보았죠.”

“공국인인가?”

“아닙니다.”

경비병들이 날선 시선이 단유를 훑었지만, 단유는 그저 받아든 출입증을 품에 집어넣고 무덤덤이 기다릴 뿐이었다.

“이곳은 에토신스의 황제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오. 어떤 소란도 용납하지 않으니 조심하셔야 할 거요. 설령 플란트 사령관님께서 보증한 이라도 말이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무엇을 말이오?”

“이곳에 계시는 학자를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일레로 남쪽에 있다고 들었소.”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더 물어봐야 자세한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알아서 찾아보라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성내로 들어가 먼저 한 것은 학자를 찾기 전에 먼저 기거할 여관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관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성문 근처에 표지판을 매달고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짧은 머리에 굵은 눈썹, 각진 턱이 인상적인 여관 주인이 단유를 반겼다.

“어서 오시오.”

방을 잡은 단유는 오랜만에 몸을 씻고 끼니를 해결한 뒤, 여관 주인에게 학자가 있는 곳을 물었다.

“어느 학자를 말하는 것이오?”

“이곳에 계시는 학자 분들이 많은가요?”

“이상한 질문이군. 본국 제일의 도서관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히 학자분들도 많은 게 당연한 것 아니오?”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나요?”

여관 주인은 어딘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다가 학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설명해주었다.

성내는 생각보다 넓고 복잡했다. 바깥에서 볼 때도 크다고 느꼈지만, 단유가 본 것 중 가장 큰 성이었던 녹스가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크고 넓었다.

우선 중앙의 황궁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은 황궁 거리가 있는데, 마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리고 그 거리의 양 끝에서 좌우로 갈라지는데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다시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더 나온다. 그 거리를 일레로(Illero)라고 부르며 그 거리의 남쪽 어귀에 도서관이 있다고 주인은 설명했다.

우선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 같아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여관을 나온 단유는 길을 따라 걸었다.

여관은 황궁 거리의 남쪽, 좌우로 뻗어지는 거리에서 파생된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큰길로 나오니 황궁 거리 만큼은 아니라도 꽤 넓은 길이 동서로 이어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느라 꽤 분주해 보였다. 단유는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앞으로 한동안 머물 곳이라 여겨 주위도 살필 겸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다 하지만, 역시 이곳은 이곳대로 다른 곳과 다른 차별된 점이 있었다. 우선은 분위기 자체가 차분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수도라는 여유 때문인지, 전쟁에서 승리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걸음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굳이 녹스와 비교하자면, 녹스의 사람들은 늘 어딘가 바쁜 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은연중에 드러내는 경계심도 녹스에 대한 인상 중 하나였다면, 이곳에서 그런 경계심은 오직 경비병에게서만 관찰되는 것 중 하나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밝은 것만도 아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한다거나 하진 않았고, 아는 사람을 만나도 크게 반기기보단 그저 의례적인 인사를 한다는 느낌이 강해 보였다. 좋게 보면 침착한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무뚝뚝하달까? 타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예 무관심한 것도 아닌,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대학교 도서관 로비같은 분위기였다. 마냥 조용하지도, 그렇다고 시끄럽지도 않은 어중간한 분위기.

단유는 그 비유를 떠올림과 동시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대학교 도서관을 떠올리는 걸 보니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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