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신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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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넓은 평원에는 잠시 쉬어갈 그늘도 없이 그저 넓게 펼쳐진 풀밭만이 전부였다. 그래도 굴곡 많은 언덕을 넘는 것보단 수월하단 생각에 단유는 더욱 힘껏 페달을 밟았다.
지하도시가 완성된 이후, 잠깐 시간이 남을 때 자전거를 대체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들어볼까 고민도 했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단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또 다른 이유는 기술적으로 제약이 많다는 점이었다. 오직 나무만을 깎아 만든 최초의 자전거를 만들 때도 마모도나 기타 고장에 따른 부품의 수명에 대해 고민이 많았지만 그보다는 편의성이 좀 더 중요하다 여겨 그 부분을 희생시켰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했던 것처럼 자동차 형태의 탈 것은 적당히 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부품들은 아무리 단유가 마법으로 대체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런 점 때문에 단유는 지금도 페달을 밟아야 했고, 그늘 없는 평원을 달리며 약간의 피곤함을 느껴야 했다.
들판의 끝, 길고 완만한 경사를 올라가니 낮은 언덕의 정상에 홀로 솟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된 나무가 아닐까 생각되는 굵기의 나무였는데, 사방으로 뻗은 가지 덕에 그 아래에 드리워진 그늘은 땀을 식히기에 충분해 보였다.
자전거를 세운 단유가 맨바닥에 그대로 앉으니 서늘한 그늘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눈을 감고 여름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바람의 여운을 즐긴 단유는 옆에 내려놓은 자루를 열었다. 자루 속에서 꺼낸 것은 에밀리아가 챙겨준 육포와 딱딱해진 빵이었다.
간단한 요리라도 할 수 있게 챙겨주겠다던 조리기구는 받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요리에 재능 자체가 없던 단유였으니까. 대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육포와 치즈를 끼워 넣은 딱딱한 빵을 받았다. 냉장 보관을 할 수 없으니 빵은 최대한 빨리 먹어치워야 했고, 지금 손에 들린 것은 그렇게 남은 마지막 빵이었다. 우유 대신 물로 뻑뻑한 입안을 적셔가며 허기를 채운 단유는 이왕 앉은 김에 좀 더 쉬었다 가자는 생각에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흐음.”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가 보는 것이 바로 무명(無名)조직의 은신처에서 베껴서 가져온 문양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이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접시나 기타 다른 물건들은 단유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모두 거기에 두고 나왔다. 그러니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테지만, 거기에 적혀 있던 글자와 문양은 단유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종이에 그것들을 베껴 보관하고 있었다.
지하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 여유가 될 때마다 챙겨 봤지만 여전히 방정식의 정체에 대해서는 풀지 못한 단유였다. 문양과 그 문양이 지시하는 숫자를 정확하게 특정하지 못한 탓에 무엇을 풀기 위한 방정식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답답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퍼즐을 푸는 것마냥 즐거웠다.
잠깐 쉬겠다고 생각하고 방정식을 해석하는데 몰두했는데 어느새 해가 한참을 지나 하늘색이 바래질 정도가 되어서야 단유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아, 벌써.”
단유는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수십 번 들춰가며 보던 종이 뭉치를 품에 넣고 일어선 그는 앞으로 가야 할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푸른색으로 뒤덮인 언덕과 낮은 산, 그 산허리를 타고 올라가는 좁은 길을 눈에 담은 뒤, 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은 여기서 쉬는 게 좋겠다고 적당히 타협한 뒤, 다시 자루를 뒤졌다.
‘빵은 다 먹었구나.’
입맛을 다시며 마른 육포를 꺼내 입에 물고는 다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다행인 건, 혼자 여행을 하니 누군가에게 맞춰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무엇을 하든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뭇가지에 달린 푸른 잎들의 소리를 들으며 단유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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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단유의 첫 행선지는, 이전에 만났던 에토신스의 진군 사령관이 머물고 있다는 성이었다. 걸어서 간다면 10일이 넘게 걸릴 거리라던 사울른의 예측처럼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물론 자전거를 이용하니 걷는 것보단 빨랐지만, 사령관이 갑자기 임무를 팽개치고 다른 곳으로 간다거나 급한 일이 생겨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서둘러 갈 필요가 없으니 단유는 쉬엄쉬엄 여유롭게 목적지로 향했다.
가끔 등짐을 지고 이동하는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지만―그 사람들은 단유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라는 낯선 교통수단에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간단한 인사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참이라 아무래도 사람들의 경계심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때이기도 했고, 단유도 애써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도 없어, 그냥 눈으로 서로를 확인하며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성을 멀리서 확인했을 때, 단유는 성벽에서부터 전쟁의 여파를 느낄 수 있었다. 큰 저항 없이 진군한 에토신스였지만 모든 성을 무혈로 입성할 순 없었던 듯, ‘수오레 성’의 성벽 곳곳에서 파괴의 흔적과 그을린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문 앞에는 예의 에토신스 군의 군복과 깃대를 세운 병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성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그들에게서 날선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물론 단유는 그런 분위기에 위축되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가?”
창으로 길을 막고 묻는 병사의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 눈빛만큼은 번들번들한 것이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당장에라도 창을 휘둘러 보겠다는 심산인 듯 했다.
“야니쉬 지방의 부루흐 마을에서 왔습니다.”
“부루흐?”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부루흐’라는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았는데, 그 이름으로 마을을 지칭할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기도 했고 아직 자신들이 점령한 땅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에토신스 토박이 병사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거지?”
“뵈어야 할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누구지?”
거듭 말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때문에 아직은 상인들도 움직이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점령군 사령관이 자리하고 있는 성에 찾아오는 이가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병사들의 눈초리가 매섭게 단유를 훑었지만, 단유는 그저 덤덤하게 시선을 감내할 뿐이었다. 그리고 병사가 물은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령관님입니다.”
“···누구?”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되묻는 병사에게 단유는 다시 대답했다. 점령군 사령관이라고. 뒤이어 병사들이 창을 꼬나 들고 단유를 금방이라도 찌를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는 건 당연했다.
“누구냐! 첩자냐?”
이렇게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방문 목적을 솔직하게 말하는 첩자가 또 있을까마는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겐 그마저도 의심스러웠을까? 단유에게 증명서나 신분증 따위가 있을 턱이 없으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을 위로하여 살짝 손을 까닥이자 바닥에서부터 바람이 솟구쳐 올라와 단유를 향해 치켜들었던 창이 강제로 들려졌다.
“어어?”
놀란 병사들은 주춤대며 뒤로 물러섰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려고 눈동자를 분주히 굴려댔다. 다행히 한 병사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인이다!”
아무래도 이들에겐 마법사보다 마인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했던 모양이었다.
“사령관님께 알려주시겠어요?”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병사가 쭈뼛대며 단유의 눈치를 보다가 성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그 사이 남은 병사는 식은 땀을 흘리며 흔들리는 창을 단유를 향해 겨눴다. 멀찍이 떨어진 채로.
이윽고 무장병력이 성문에 다가왔고, 단유는 예전에 사령관을 찾아갔을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떠올리며 기다렸다.
“그때 그자로군.”
마침 찾아온 이도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 한명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단유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단유 주위로 병력을 둘러치게 만든 뒤 성 안으로 단유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무너진 집들이 보였다. 더러 혈흔도 보였는데 어느 쪽의 것이었던지는 몰라도 나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멸망 직전의 나라라고 해도 순순히 성을 내주진 못했던 것일까? 이 성을 지키던 병사들과 이 성의 성주가 어떤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을지 조금 궁금했다.
성문 근처의 무너진 잔해를 지나니 비교적 성한 형태로 남아있는 집들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흐린 표정으로 단유를 흘깃 쳐다보는 사람들이 관찰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단유를 구경하는 형국이겠지만, 오히려 이 상황에서 병사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건 단유가 아닌 그들이었다. 병사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등을 돌리면서도 그 안에 선 단유가 궁금해 고개를 비트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단유가 있던 곳의 사람들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거의 거지라고 착각 아닌 착각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복색과 얼굴들이었다. 제대로 기우지 못해 너덜너덜한 소매를 덜렁이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남자와 언제 씻었는지 모를 더러운 앞치마를 하고 물통을 힘겹게 이고 나르는 여자들. 그들에게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기운 빠진 눈동자들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무엇이냐?”
앞서 가던 무장병이 단유가 끌고 있는 자전거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지난번에는 자전거를 야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고 갔었기에 보지 못했던 것이, 이번에는 달리 둘 곳도 없고 별 문제도 생기지 않겠다 싶어 그냥 끌고 들어왔던 참이었다.
“말 대신 타고 다니는 거예요.”
“말 대신? 그걸 타고 움직인단 말이냐?”
저게 움직여? 라는 말보다 표정으로 바라보는 무장병에게 타볼까요, 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는 말로 단유를 제지했지만, 그것을 뺏겠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법사의 것이니 후환이 두려웠던지도 모르겠다.
자전거를 끌고 터덜터덜 걸어 도착한 곳은 성주가 묵었음이 분명한 거대한 주택이었다. 우선 ‘거대’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주변에서 유일하게 3층 이상으로 건축된 데다, 그 앞에 넓게 펼쳐진 마당 때문에 더욱 크고 웅장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전쟁 전이라면 노련한 정원사가 매일매일 관리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지금은 부러져서 밑둥만 흉물스럽게 남은 나무와 그을리고 짓밟혀서 엉망이 된 잔디밭만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저기요.”
“뭐냐?”
“이거 여기 세워둬도 되나요?”
“···위험한 것은 아니겠지?”
“보시다시피 위험한 건 아닙니다.”
처음 보는 물건인데, 그것의 위험성을 한 눈에 간파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무장병은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을 만든 채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단유는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채로 경계를 하고 있는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전거를 주택 정문 옆 벽에 자전거를 기대놓았다.
“오랜만이군.”
“반갑습니다.”
“정말 반가운지는 모르겠군. 우리 사이에 더 할 말이 남았나 싶기도 하고.”
“우선, 승리하신 것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우선, 고맙네. 여기 앉게나.”
업무용 책상 앞에 놓여진 고급 소파를 가리켜 보이는 사령관이었다. 며칠 사이에 나름 마음 고생을 했던 것인지 얼굴이 꽤 초췌해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지난 번에 약속해주신 내용이 잘 이행될지 확인차 왔습니다.”
“그때 말하길 마법사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했던가? 난 비록 마법사가 아니지만 나 역시 내가 꺼낸 말에 대해서는 꼭 지킬 걸세.”
“감사합니다.”
“그럼 끝인가?”
“네.”
“정말 그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네.”
“···그때 내가 했던 제안에 대해서는, 혹시 생각을 더 해보았는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전 어디에도 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갈 참인가?”
“아니요. 일단은 달리 갈 곳을 마음에 둔 참입니다.”
“마을을 떠난다고? ···그럼 어디로 갈 셈인가?”
“에토신스입니다.”
“뭐?”
사령관이 눈을 홉 뜨며 단유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