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05화 (705/956)

통과의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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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쉽게 대답을 못 하자 괜한 걸 물었나 싶어 바로 사과를 하는 사울른이었다.

“제가 괜한 걸 물었나 봅니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저도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에 대답이 조금 느렸던 것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까?”

“지하도시를 건설한 뒤부터 계속 생각하던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나간 김에 처리할 일들도 있고 하니 그 문제들을 처리할 겸 떠나려는 겁니다.”

“어떤 일을?”

단유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에토신스의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죠.”

“아.···그럼 저도···.”

“아뇨,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처리할 문제도 끼어있으니까 저 혼자 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단유는 사울른을 바라보았다.

“사울른도 이제 좀 편해져야죠.”

생각지도 못한 농담을 들은 사람마냥 눈을 둥그렇게 떴던 사울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왜요? 전 이곳에서 사울른만큼 박식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걸요?”

“안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잘하지 않아도 돼요.”

사울른이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실수도 하고 좌절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런 시행 착오 끝에 경험이 쌓이고 노련함이 덧붙는 거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도 사울른은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난.”

“···모르겠습니다. 과연 제가 이런 평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정찰과 수색, 전쟁과 전투 속에서 수년을 살아온 사울른이었다.

“혼자 할 필요는 없잖아요? 힘들 때는 옆 사람에게 의지해도 괜찮고. 바이언에게 도움을 부탁하면 아마 잘 들어주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까 오면서 봤던 사람들에게 부탁해도 될 거고요.”

고개를 떨어뜨렸던 사울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루치드는 혼자 하려 하지 않나요?”

단유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 일은, 누군가 도와주기 힘든 문제라서요.”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혹시나 도와줄 이가 있지는 않은지, 그걸 찾기 위해 떠나려는 겁니다.”

사울른은 단유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후 단유는 방에서 두문불출하며 무언가에 매달렸고, 사울른과 에밀리아는 그게 단유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뭔가를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고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마을에 빨리 녹아들기 위해서라도 사람들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지금은 그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마을 집회소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토론회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꽤 환영을 받았다. 사울른이야 가장 힘든 시기,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에 단유와 함께 마을을 위해 의기롭게 나섰던 면을 모두에게 인정받은 사내였기에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고, 에밀리아의 참여는 마침 토론회에 참석하는 수가 줄어들던 차에 마을 내 남자들의 참여율을 극적으로 끌어 올리는 데 공헌을 했기에 환영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순서가 뒤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의 토론회 참석 이후 다시 집회소는 만석을 이루기 시작했다.

“저는 이 마을에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가축을 키울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위생 때문에 가축을 마을 외부에 따로 보관하고 있지만, 그 때문에 가축들을 수시로 관리하지 못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루치드가 그 가축들 때문에 위생이란 게 나빠지면 사람의 건강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루치드가 말했으니 그게 사실이긴 하겠지만 솔직히 잘 믿겨 지지 않는 이야깁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축들을 키웠는데, 전 한번도 그 녀석들 때문에 아픈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루치드도 위생을 지키려면 잘 씻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가축을 집 가까이 키우더라도 잘 씻기만 하면 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럼 루치드에게 가서 한 번 물어볼까요?”

토론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진행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토론회를 몇 번 거치면서 점점 마을에 필요한 것, 보완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루치드가 알게 모르게 걸어놓은 제약들도 많다는 걸 느꼈다. 그가 말한 것이니 지켜야 좋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왜 지켜져야 하는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바이언과 스토보가 자주 단유를 찾게 되는 이유기도 했다.

“저기요.”

남자들의 목소리가 오가던 집회소에 가녀린 목소리가 울리자 모두들 입을 다물고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밀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받았다.

“에밀리아,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바이언이 묻자, 에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각오를 다진 뒤 입을 열었다.

“저는 다른 곳에 있다가 와서요, 다들 이전에 어떻게 생활하셨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이 마을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며 이야길 나누는 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요.”

“건의할 게 있으면 뭐든 이야기하게. 에밀리아도 이제 우리 마을 사람 아닌가?”

“고맙습니다. 사실 건의라기보단 질문인데요, 이제 이 마을을 막던 바위도 사라졌으니까 마을로 들어오고 나가는 게 자유로워졌잖아요?”

“그렇지.”

아직까지는 에밀리아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여자 아이가 저렇게 용기를 내서 말하는 모습이 가상해 보여 다들 귀여운 딸을 보는 심정으로 에밀리아를 바라보며 경청했다.

“그럼 외부의 사람들도 이제 이 마을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처음에는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가고 그 다음으로는 당황, 그 다음에는 근심이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저 입구를 다시 막을 수는 없는 일인데, 어떡하지?”

웅성대는 사람들 속에서 바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스토보 역시 예상되는 미래의 한 지점을 응시하듯 천장을 바라보며 턱 아래를 긁었다.

“저기···.”

에밀리아가 다시 운을 떼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 두려워만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왜 그런가?”

“이전에도, 지상의 마을이 있을 때 여관이 있었잖아요? 그건 외부인이 이 마을에 자주 들렸다는 말 아닌가요?”

“···자주는 아니지만 들리긴 했었지.”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 마을은 지형적인 문제 때문에 자급자족을 하기엔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곳은 이곳만의 특산품, 희귀 약초나 질 좋은 숯, 가죽을 구해다 팔기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었기에 타 지역 사람들과의 거래는 필수였다. 그러다보니 비록 지금은 전쟁 때문에 왕래가 끊어졌지만 본래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은 편이었다.

“불미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게 되어 죄스러운 마음도 들어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말씀드리자면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저희가 여관에 묵었잖아요? 그 여관이 지금 없으니까, 만약 나중에 이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오게 되면 묵을 곳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에밀리아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몇몇은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는데, 개중에는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친한 친구, 이웃을 잃은 마음이 다시 떠오른 탓이기도 했다. 바이언은 헛기침을 한 뒤, 화제를 다시 돌렸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사람들이 편하게 돌아다니게 될 테고, 그러면 당연히 상인들도 이 마을에 들리겠지.”

“그렇군. 혹시 당황하지 않도록 지상에 팻말이라도 세워야 하려나?”

“그런데 그렇게 되면 더는 이 마을의 존재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에밀리아의 문제 제기에서 촉발된 외부인의 접근에 관한 문제는 곧 마을의 존재 이유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이 마을이 폐쇄되어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군.”

사람들은 물론 바이언과 스토보까지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반성해야 했다.

“만약에 외부 사람들 중에 이 마을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피난민과 같은 경우가 없으란 법은 없으니, 마을에 대한 소문이 퍼지게 되면 이 마을로 이주하길 희망하는 이가 나올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이 질문은 또 다른 고민을 낳게 했다.

이런 식으로 질문이 질문을 낳고, 가정이 또 다른 가정을 낳으니 그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잘 했어요, 에밀리아.”

옆에 앉아서 지켜만 보던 사울른이 팔꿈치로 툭 치며 히죽 웃었다.

“사울른 덕분이에요.”

옆에서 우물쭈물대기만 하는 에밀리아에게 뭐든 말해보라며 용기를 북돋아 준 사울른이 있었기에 에밀리아는 감히 손을 들어 말할 수 있었다. 에밀리아의 수줍은 감사에 사울른은 또 한번 히죽 웃은 뒤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유의 자주 쓰던 표현처럼, 제대로 ‘생산적’인 토의가 시작되었다. 정말 마을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 집회소였다. 그리고 거기에 에밀리아와 사울른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

금방 떠날 듯 했던 단유는 봄이 다 갈 무렵까지도 떠나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덕분에 에밀리아와 사울른은 조금이라도 함께 한다는 생각에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사울른이 운동 겸 해서 자주 외부를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공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공국이, 전쟁에서 졌습니다.”

예상한 바였지만, 사울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단유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에토신스는 어디까지 차지했나요?”

사울른이 조악하게 그려진 지도 위에 손을 그어 새로 생긴 국경선을 표시했다.

“사울른이 처음에 예상했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에토신스는 교국을 상대로 욕심을 내기 어려운 면이 있었으니까요. 이 이상으로 진군했다가는 교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그리고 당신 동군 진격로를 선택했던 사령관은 수오레 성까지만 점령하는 모양입니다.”

단유는 사울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물었다.

“그럼 돌아갈 땐 다시 여길 지나겠군요?”

“그렇겠죠. 하지만 금방 돌아가진 못할 겁니다. 점령군 사령관은 점령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임무가 완전히 끝이 난 게 아닐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오레 성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걸어서 간다면 10일 정도 걸릴 거리입니다.”

“그렇군요.”

“···여길 가실 겁니까?”

“우선은요. 사령관을 만나서 확실하게 약속을 받은 뒤에 떠나야죠.”

“네.”

한 톤 가라앉은 사울른의 목소리에 단유는 화제를 돌렸다.

“혹시 대공에 관한 소식은 들었나요?”

“그는 녹스 성에 갇힌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갇혀요?”

“리아빈 위쪽으로는 교국이 모두 점령을 마친 상황이라고 합니다. 공국의 군대가 없죠. 하지만 교국도 리아빈을 넘어 공국까지 진격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거기서 진군을 멈췄다고 합니다.”

“대공은 항복 선언을 하지 않았고요? 그럼 아직 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된 건 아니지 않나요?”

“리아빈이 빛을 발한 거죠. 어느 쪽이든 무리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결국 교국과 에토신스는 대공이 리아빈을 건너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건너지 않겠다는 내용을 교환했다고 합니다.”

“아, 그런 식으로 끝이 나는군요.”

“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종전이라기보다는 휴전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이미 상당수 병력을 잃기도 했고, 녹스에서 나올 생각도 보이지 않는 대공이니만큼 결국 종전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대공은 스스로 귀향지에 몸을 의탁한 셈이죠.”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의도치 않게 거센 소용돌이 속에 말려 들어갔다가 겨우 빠져나와 돌아보니 어느새 힘을 잃고 사그라들고 마는 바람을 목격한 것처럼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단유는 개인적인 작업을 하던 와중에도 시간을 빼서 에밀리아를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밀리아는 열정적인 학생도 아니었고, 천재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학생도 아니었지만 단유가 알려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모습도 단유가 그녀를 가르치는 걸 지루해하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곁에 두고 그녀를 가르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에밀리아.”

“네.”

“이거 받아요.”

“이게 뭐예요?”

“에밀리아에게 필요할 것 같다고 여겨지는 걸 나름대로 정리한 거예요.”

책이라고 부르기엔 엉성한 면이 많지만, 수기로 작성한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종이 뭉치를 받아든 에밀리아는 감격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내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그동안 혼자 방에서 무엇을 하나 했더니 이걸 만들려고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쏟았나보다. 그리고 이걸 만들어 자신에게 건넨 의미도 에밀리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제···떠나는 거예요?”

“네. 마침 날도 적당해서 오래 여행하기도 좋으니까요.”

“정말···같이 가면 안 되는 거죠?”

“에밀리아. 이제 에밀리아에겐 제가 필요 없을 거예요.”

‘그렇게 확신하지 말아요.’

에밀리아는 끝내 그 말을 단유에게 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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