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의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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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응?”
갑작스러운 아내의 부름에 사내는 바지춤을 추스르고 요강의 뚜껑을 닫은 뒤 돌아섰다.
“당신 말이에요. 이번에 나가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무슨 말을?”
“당신 지난번에 바이언 씨한테 큰소리쳤었잖아요? 마법사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그 이야기를 왜 해···.”
말끝을 흐리는 남편을 질책하는 아내의 눈빛.
“이번에는 나서지도 말고 그냥 뒤에 숨어 있어요.”
“나도 그쯤은 생각하고 있다고.”
“나이가 들었으면 생각 좀 하고 살아요. 도대체 무슨 객기로 그리 큰 소리를 질렀대.”
“······.”
혀를 차는 아내의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객기’를 부릴 수 없는 처지라 사내는 바지의 벨트를 고쳐 맬 뿐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잔소리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 마법사가 당신한테 뭐라고 그러면 무조건 죄송하다고 빌고. 알았죠?”
“내가 뭐 잘못했···.”
“여보!”
“···알았어.”
그렇지않아도 너무 긴장돼서 계속 오줌보가 마려웠다. 요강 앞에 서서 나오지도 않는 오줌 줄기를 기다리기만 몇 번인지 모르겠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쉴 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놀란 마음에 딸꾹질이 나왔다.
“히끅, 누, 누구요?”
“나야, 모일 시간이야.”
“으응. 알겠네.”
사내는 거무죽죽한 얼굴로 아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내를 쳐다보며 슬픈 눈빛을 보냈더니, 아내가 눈썹을 모으며 인상을 썼다.
“무조건 빌어요.”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
램프도 켜지 않은 어두운 실내에서 바이언은 식탁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유가 옴으로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흐지부지 돼버렸다. 그간 단유와의 약속 때문에 입도 뻥긋 못하고 속앓이했던 긴 시간도 이제는 끝이 났다. 하지만 바이언은 결코 쾌재를 부를 수 없었다.
‘마을을 이끌 사람이 필요합니다.’
단유의 그 말에 바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기 편에 섰던 이들이 자신을 추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난 못해.’
바이언은 누구 못지 않게 마을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예전 그는 작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잘 휘두르지도 못하는 칼을 들고 여관으로 가자고 선동했었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음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자신만 살자고 그런 일을 벌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자칫 자신의 친구와 이웃들을 위험에 빠뜨릴 뻔 했던 일이었다.
그것은 바이언에게 원죄(原罪)와도 같은 기억이고 트라우마였다. 때문에 단유가 자신에게 마을의 촌장이 되어달라고 했을 때, 바이언은 거절해야 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이언으로서는 결코 그 직위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자신을 그 자리에 올리려 했다. 그 사실이 두려웠다.
‘난 못해.’
바이언은 바깥으로 나가기가 겁이 났다.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과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언의 시선이 문으로 돌아갔다.
“누구요?”
“나야.”
“···들어오세요.”
삐걱대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피비였다.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오?”
“···괜찮아?”
밑도 끝도 없이 괜찮냐고 물으면 뭐라 답할까마는, 바이언은 피비의 말이 무엇을 묻는지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조금 있다가 나가야 되지?”
“···그래야죠.”
“그래. ···나중에 올까도 했는데, 그냥 지금이 말하기 편할 때일 거 같아서 왔어.”
“무슨 말인데요?”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바이언은 입을 다물었다. 별거 아닌데, 10살 먹은 애도 아닌데 아주머니의 말에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바이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까···, 힘든데도 잘 참았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고생은 무슨.”
무뚝뚝한 어조로 애써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바이언을 바라보며 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난 말이야, 바이언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봐.”
“···그렇지 않아요.”
“루치드도 그래서 자기한테 그런 부탁을 했었던 거라고 보고.”
“난 그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강하게 부정하는 바이언. 그 모습이 안타까워 피비는 한 마디를 더했다.
“나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장님은 아니야. 괜히 그 사람들이 자기를 대표로 뽑으려 했던 게 아니라고. 그동안 바이언을 보면서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된다고 보니까 그랬던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지금은···지금은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난 바이언이라면 충분히 우리 마을을 잘 이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오죽하면 루치드가 자기에게 그런 부탁을 했겠어?”
“절 아직 잘 모르니까 그런 거예요.”
피비는 바이언의 부정적인 평가에 다시 한 마디를 더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어, 아주머니도 계셨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바이언의 편에 섰던 마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바이언도 고개를 돌려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아, 그, 이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온 건데···, 혹시 제가 방해가 됐나요?”
“아니네. 나도 이제 일어날 참이었어.”
결국 피비도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도 가시죠?”
사내가 피비에게 말했다.
“그래야지.”
피비는 치마를 툭툭 털며 사내들의 뒤를 따랐다. 거리에는 광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
잠시간 비워졌던 마을의 광장은 금방 사람들로 메워졌다. 그러나 전과 달리 매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자세히 살펴보면 확연히 두 패로 나뉘어 있었는데, 어느 쪽도 지금의 상황을 크게 반기는 쪽은 없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언의 무리와 척을 졌던 쪽은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서 초조했다. 마법사의 힘을 자세히 보지 못한 피난민 출신 중에 몇몇이 이럴 필요 있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간 친해진 마을 출신 사람들의 귓속말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바이언의 편에 섰던 이라고 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물론 스토브 쪽 사람들보다야 편한 마음이긴 했지만, 자기들 마음대로 바이언을 마을의 대표로 추대하려던 움직임이 마법사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가늠할 수가 없던 탓이었다.
“우리가 뭐 잘못했어?”
떳떳하게 외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마법사의 의중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마을의 지도자를 뽑으려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어쨌든 힘을 가진 이는 마법사였고, 자신들은 평생을 힘을 가진 자들이 구축한 질서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처지임을 잠시 망각했었다는 걸 깨달은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마법사를 기다렸다.
곧 단유가 나타나자 수군거림마저 사라졌다. 그들 앞에 선 단유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에 사죄드리며 대신 이 마을을 향한 위협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려드립니다.”
본래라면 기뻐서 소리를 질러야 했을 테지만, ‘그동안’의 일을 ‘들었다’고 말하는 단유의 이야기에 눈치가 빠른 몇몇 사람들이 인상을 굳히자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려던 사람들이 동요하며 올렸던 손을 내렸다.
“먼저 밖에서 있었던 일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단유는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대신 사령관과 협상을 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흑의인의 조직과 그 수장이 더는 마을에 위협이 되지 않음을 선언했다.
“그럼 이제 마을은 안전한 거요?”
“네.”
마법사의 장담에 여자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얼굴을 굳히고 있어 기쁜 티를 낼 수 없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유가 무리 가운데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고 있는 바이언의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을 외부의 문제는 그걸로 해결됐다고 무방하니 넘어가도록 하고, 이제 내부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죠.”
스토보를 포함하여, 그의 편에 섰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보시오.”
단유가 말을 잇기 전에 군중 속에서 먼저 목소리가 나왔다. 단유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단발의 사내, 스토보였다.
“네, 말씀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이전과 달리 머리색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을 한 스토보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었다 하는데 누구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이야기가 잘못 전달되어 오해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되니 내가 먼저 이야기 해야겠소. 난 스토보라고 하고 지난번에 당신의 도움으로 이 곳으로 오게 된 피난민 출신이오.”
“알고 있습니다.”
“사실 당신이 저 마을의 입구를 틀어막은 것이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소. 만약 당신이 미리 우리들에게 그 커다란 바위로 입구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랬다면 우리는 불안에 떨지 않고 당신이 돌아올 날까지 차분히 기다릴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오.”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받으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고···, 아무튼, 흠흠, 뭐···아무튼 내 이야기 하고 싶은 건, 당신이 돌아와 저 입구를 개방하기 전까지 마을에서 사소한 언쟁과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오.”
사소하다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조금 전에 주먹을 쥐고 충돌을 일으켰던 마당에? 그러나 단유를 비롯한 사람들은 스토보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당신의 속내를 모르기도 하거니와 그저 무지한 이들이니 우린 의심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오. 저기, 바이언은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좀 더 많았으니 당신을 믿을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게 쉽지 않았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마흔 살이 넘도록 살던 고향에서 도망쳐야 했소. 여기 나와 같은 피난민 출신들도 다 그렇겠지만, 그건 오직 살기 위해서였소. 나와 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소. 당신의 배려로 이 지하 마을에 온 뒤 나와 내 가족, 친구들이 당신에게 무척이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아주시오. 하지만 저 입구가 막히고 언제 다시 열리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니 불안했소. 게다가 우리는 이 마을에 온 지 겨우 며칠이오. 고맙게도 이 마을의 모든 이들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우릴 환영해 주었지만 속이 좁은 나는 급작스럽게 변한 환경과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에 불안했소. 그런데 나만큼이나 불안감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뭉칠 수밖에 없었소. 변명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저 살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에 생긴 일이오. 그러니 루치드, 당신의 선처를 부탁하오.”
“···선처요?”
“당신의 힘과 진심을 믿지 못하고, 저기 당신과 뜻을 함께 한 바이언에게 대항하였소만, 그것은 정말 어떤 악의를 가지고 벌인 일이 아니었소. 그러니 부디 그 점을 고려하여 선처를 부탁드리오. 그리고···그리고.”
스토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려 턱수염에 매달린 땀방울을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의 말에 동조해준 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소. 내가 앞장서 그들의 마음을 흔든 탓일테니 만약 벌한다면 나만 벌하시오. 하지만 내 가족 또한 죄가 없소. 그러니 만약 벌한다면 나만 벌하고 부디 내 가족들은 여기 마을에서 계속 살 수 있게 해주시오.”
웅성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토보의 흐려진 말끝을 덮었다. 단유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바이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언.”
“······.”
“혹시 할 말 있나요?”
지목당한 바이언은 단유와 스토보를 번갈아보다 한숨을 쉬었다.
“어제까지,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자네가 돌아오면 할 말이 많았어. 정말 이게 자네가 원한 일이었던가, 자네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냐고 말이야.”
사람들은 바이언의 말에 더욱 웅성댔다.
“그럼 자네는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가 돌아올지?”
“알고 있었으면 말을 했었야지?”
바이언은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듣다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말해주게.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이런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