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의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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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죽었습니까?”
“네.”
사실 물으나 마나한 일이긴 했다. 그 폭발 속에서 살아남은 이가 있을 턱이 없으니까.
“왜···그에게 물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대답도 하지 않을뿐더러, 설령 대답을 듣더라도 결과는 똑같으리란 판단이 들었습니다.”
“루치드, 전 당신의 의견을 항상 존중하지만 이번만큼은 성급했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곳에서 쓸데없는 문답을 나누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임시로 지혈을 하긴 했지만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는 사울른을 그대로 두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고,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미 마을에 들어가 혼란을 정리했어야 하는데 하루라는 시간을 더 보낸 마당이었다. 이름도 말하길 꺼려한 노인과 지루한 문답을 끌어서 대답을 듣는다고 해봐야 관련도 없는 이들을 구하러 모험을 떠날 마음은 없었다는 게 진짜 속마음이기도 했고.
“그와 그의 조직이 없어지면 더 이상 희생당할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가요?”
“저라고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사울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지하도시의 중앙 광장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확히는 두 패로 나뉜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고, 그 주위를 패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아는가!”
“5일째지.”
“지금은 그저 5일이지만, 앞으로 50일, 500일이 지나도록 여기에 갇혀있게 되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겠는가?”
“과장하지 마시오. 그 전에 우린 나갈 수 있을 것이오.”
“그럼 당장 저 벽을 뚫어보시오!”
“다 같이 해야 할 일이오.”
“허! 자기들 편한대로 우리를 움직이려 드는가? 우리가 당신들이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노예처럼 보이시오?”
“그럼 어쩔 셈인데 그러시오? 당신들도 이곳을 나가고 싶은 것 아니오?”
“이 사태를 일으킨 당신들이 책임질 일 아니오!”
“맞소!”
“책임지시오!”
“그러니까, 다 같이 하면 더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소? 생각들이 없소?”
“뭐? 생각이 없어? 말 다했소?”
“말꼬리 잡고 시비 걸 생각 말고 다 같이 합심해서 나가자는 말이오.”
“시비라고? 이게 시비처럼 보인단 말이오?”
“주센! 말이 너무 심하잖아?”
“심하긴 뭐가 심해?”
“바이언이 우릴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서 그러나?”
“우리? 그 우리가 자네들만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자네들끼리 숙덕거리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뻔뻔하군. 쉐비른이 자네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었어. 자네들, 바이언을 마을 대표(Koivoβ)로 추대할 심산이라지?”
몰랐던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고, 몰래 모의하던 이들은 들켰다는 사실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바이언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오, 바이언?”
“나는 모르는 일이었소.”
바이언은 굳은 표정으로, 당황한 기색을 살짝 엿보이긴 했지만, 반대편에 선 이들에겐 그마저도 뻔뻔한 거짓처럼 느껴졌다.
“허, 정말 우습군. 그래, 자네들끼리만 모여서 대표를 뽑으면, 그 다음엔 뭔가? 이 마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자네들끼리 마음대로 하겠단 속셈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니오! 모두가 알겠지만, 이 마을에는 지금 대표가 없소. 예전의 촌장은 이미 오래전에 마을을 나간 상태라 이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할 사람이 없으니 어차피 새로운 촌장을 뽑아야 할 때였소. 그런 필요성 때문에 우리는 누가 적당할지 그저 의논했을 뿐이오.”
“그 의논이란 걸 왜 자네들끼리 하느냐 말이오.”
억지 부리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바이언 편에 선 무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현 상황이 다 같이 화목하게 모여 이야기를 나눌 형편이 아니라는 변명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고, 저들에겐 또 다른 꼬투리를 잡힐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으니까.
“역시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 그래서 여태 시간을 끌었던 것이겠지!”
“꿍꿍이가 웬 말이오! 막말로 우리가 당신들이 의심하듯 했다 치더라도 그렇게 해서 득을 볼 게 어디 있단 말이오? 이 마을을 차지한다고 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 통로가 열리는 즉시 마을을 나가시오.”
“뭐요?”
“마을에 욕심이 없다는 그 마음이 진심임을 증명해 보란 말이오?”
“그런 억지가 어딨소! 마을을 나가려면 당신이나 나가시오! 당신들 고향으로 돌아가란 말이오!”
“테위트! 말이 너무 심하잖아?”
“심하긴! 말을 먼저 꺼낸 건 저 치들이잖아? 이 마을에 온지 고작 며칠 밖에 되지 않은 자들이 말이야.”
“뭐? 말 다했어?”
“다했다! 어쩔래?”
테위트의 멱살을 잡은 피난민 출신민의 갑작스런 행동과 이에 촉발되어 달려드는 스토브 편의 사람들, 그리고 테위트가 위협받자 눈이 돌아간 바이언 쪽 사람들이 말릴 새도 없이 맞붙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고, 남자들이 시커먼 주먹을 붕붕 휘두르고 붉은 코피를 쏟아내며 충돌하는 장면에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들은 쉽게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속 시커먼 놈들이 이럴 줄 알았다!”
욕설과 독설과 주먹과 가래침이 오가는 폭력 속에서 광분한 사람들의 흉흉한 기세는 점점 더 거세어져만 갔다.
그때였다.
마을의 외곽,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를 막고 있던 바위가 흔들린 것은.
처음에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멀리서 들리는 소음보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악다구니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어?”
그러나 곧 누군가가 진동과 소음을 느꼈고, 한두 사람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분위기가 바뀌었다. 얼굴을 맞아 볼이 빨갛게 부어오른 이도,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누군가에게 잡혀 있던 이도, 옷이 찢어져 상반신이 반쯤 노출된 이도 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공기를 떨게 하는 진동과 벽을 긁는 소음이 점차 커져갈 때 몇몇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곧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통로를 막고 있던 거대 바위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오···올라간다?”
설마 저 바위가 들어올려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만 바이언만큼은 씁쓸한 눈빛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통로 안쪽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걸 원했던 것이오?’
그가 속으로 내뱉은 질문에 답해 줄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다!”
“루치드!”
이런 환영인사(?)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흑의인들의 조직에서 받았던 환영 인사와 비교하자면 충분히 감수할만 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단유는 입구 앞에 몰려든 이들을 둘러보았다. 단유의 둘러보는 시선에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서둘러 머리를 정리하고, 찢어진 옷을 여미고, 마른 세수로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아냈다.
단유의 시선이 무리의 뒤편에 서 있는 바이언에게로 향했다. 말없이 서로의 눈빛이 교차하고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 사울른이 조금 다쳤는데, 부축 좀 해주실래요?”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서 피비가 튀어나와 사울른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고, 이 사람은 왜 또 이렇게 많이 다쳤대.”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피비의 말에 단유는 싱긋 웃기만 했다.
“자기는 괜찮고?”
“네.”
“다행이네. 이봐요! 여 와서 좀 거들어요.”
부랴부랴 튀어나온 사람들이 사울른을 부축해, 집으로 데리고 갔다.
남은 사람들은 단유와 단유의 어깨 너머로 뻥 뚫린 통로를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마법이오?”
누군가 물었다.
“뭐가요?”
“저 바위 말이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들어올린거요?”
“장치가 있어요. 장치를 조작하면 바위를 오르고 내리게 할 수 있도록 해 놓았죠.”
사람들의 시선이 바이언에게로 향했다. 바이언은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단유를 주시할 뿐이었고, 단유는 그런 바이언을 마주보며 말했다.
“바이언도 몰랐을 거예요.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대체 왜?”
만약 이 모든 게 단유의 뜻이었다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들 각자의 시간을 먼저 가져야 할 것 같네요. 제가 피곤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여러분도 조금은 쉬어야 할 듯 보이니까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며 머뭇대다가 쭈뼛대며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온 단유를 반긴 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에밀리아였다.
“잘 지냈어요?”
에밀리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히 무슨 말을 꺼내진 않았다.
마을의 입구가 바위로 틀어막혔던 날, 에밀리아는 바깥의 소란에 잠시 나왔다가 흉흉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걸 보고는 겁에 질려 집으로 들어왔다. 이후 간간이 창밖으로만 마을 내부를 살폈고, 마을 어른들 간에 벌어지는 신경전과 더불어 마법사를 욕하거나 그에 대해 음해하는 말들이 오가는 것을 듣게 된 뒤로는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나마 피비가 집에 찾아와 에밀리아를 위로해주고 말상대가 되어 주었지만 에밀리아는 두려움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5일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더니 피딱지가 생기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단유의 눈에도 에밀리아가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었는지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단유는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 지냈어요?”
집에 있는 동안 할 거라고는 그저 단유가 알려준 지식들을 곱씹고 숙제들을 푸는 정도의 일이 전부였다.
“무서워서···나가질 못했어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무서울 땐 움츠릴 수도 있는 거니까요.”
“사람들이 루치드를 욕했어요. 자신들을 속이고 여기에 가두려 했던 것이라고. 전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못했어요. 그게 아니란 걸 아는데, 루치드가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헌신을 했는지 잘 아는데, 전 아무런 말도 못 해줬어요. 미안해요.”
다른 마을 사람들이 밖을 돌아다니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을 때, 에밀리아는 괜히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무서워서 나가지 못했고, 그래서 단유에 대해 변명해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 사실을 단유에게 고백하는 에밀리아는 굵은 눈물을 눈꼬리에 매달았다.
“일부러 저를 위해 나서지 않아도 괜찮아요.”
“미안했어요, 정말로.”
“에밀리아, 그렇게 마음 써준 것만으로도 전 당신한테 고마워요. 그리고···에밀리아가 나서지 않은 것은 잘한 거예요.”
“···왜요?”
“에밀리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에밀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오히려 역정을 내거나 에밀리아의 말에서 흠을 잡으려고 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래도 전 루치드를 변호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루치드는 절 보호해주려고 그렇게 싸웠는데, 전 루치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요.”
단유는 잠시 에밀리아를 바라보다가, 에밀리아의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대답했다.
“어쩌면 당신은 이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한 명일지도 몰라요.”
“제가요?”
“사실 지금 에밀리아가 공부한 것들만으로도 이 마을에서는 현자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설마요.”
“네, 조금 과장하긴 했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공부한다면 그게 현실이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에밀리아. 똑똑한 것과 현명한 것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랄게요. 똑똑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걸 안다는 뜻이지만, 현명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이요?”
어렴풋하게나마 단유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지만 명확하게 이해하긴 힘들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에밀리아는 무수한 선택지들 앞에 서게 될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죠. 인생의 수많은 길 앞에서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죠. 현명한 사람은 그 선택지에서 이상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어떤 선택이 유리하고 불리한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가늠해볼 줄 알아야 현명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반드시 똑똑할 필요는 없지만, 똑똑한 사람은 좀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거랍니다. 에밀리아는 그걸 연습한 거예요.”
“전···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는걸요.”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고를 수도 있는 거예요. 그 선택지를 고르는 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제가 잘한 건가요?”
“잘했다, 못했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에밀리아에게 있는 거예요. 그건 제가 뭐라고 할 수 없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지난 시간 동안 에밀리아가 그 선택지를 두고 열심히 싸웠다는 거예요. 이번엔 이런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체험한 거죠. 다음에는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겠죠.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에밀리아는 현명해질 수 있는 거예요.”
“경험을 통해 현명해진다는 말인가요?”
“네. 대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두고 후회하며 집착하지 마세요. 그 선택을 경험함으로서 앞으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생각이 에밀리아를 현명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어요.”
“그럴게요.”
에밀리아를 보며 웃음을 지은 단유는 등을 돌렸다. 이제 마을 사람들을 만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