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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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단유는 접시에 새겨진 문양을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전에 동판에서도 비슷한 문양을 봤었지만, 거기서는 규칙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보면 발견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접시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했고, 그래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수차례에 걸쳐, 아니 수십 수백 차례는 반복해서 풀었던 수식과 유사한 구조였고, 그래서 단유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단 하나의 미지수를 구해내는 일차 방정식이었으니까.
언어의 보편성을 언급했었지만, 숫자는 그것을 뛰어넘는 우주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고 단유는 생각했다.
마법사로서, 라티오(ratio)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로서 보자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롯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단유는 부정하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단지 관념적인 측면에서 가정하지만, 마법사인 단유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개념의 존재가 실존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21세기 과학 문명 속에서 학습한 단유는 개념의 상대성을 긍정한다. 어느 시대에서는 유용했을 사물이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사례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이를 테면 염색약이 그렇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쓰였고, 로마시대와 중세를 지나 오늘날까지도 머리를 염색하는 행위와 이를 위한 약제로서 염색약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외 지역,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는 현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머리를 염색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그래서 염색약을 지칭하는 단어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1인 1휴대폰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 휴대폰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사물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의미가 변화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숫자이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하나’라고 개념화시키는 것은 변할 수 없다. 둘이 놓여 있을 때 그것을 ‘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나 동일하다. 쓰는 방법, 표기하는 방식이 다를지라도 말이다.
숫자의 개념이 동일하니, 그 숫자를 더하거나 빼거나 곱하거나 나누는 개념 역시 같을 수밖에 없다. 하나에 하나를 더해 둘이라고 부르자, 는 약속이 없더라도 더하는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개념은 수를 지칭하는 단어나 표기방식과 상관없이 동일하다.
그것이 단유가 생각하는 수학의 보편성이고, 거기에 익숙한 단유는 문양에서 금방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접시의 문양―숫자가 만들어내는 수식이 단순한 방정식이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게 뭔가? 그···게 뭔지 안단 말인가?”
노인의 떨리는 음성을 들으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뭔지 알겠네요. 아직 이게 어떤 숫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것이 방정식을 구하는 식을 서술한 거였다는 것은 알겠네요.”
“마게이아의 묵언(默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누구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문양의 의미, 그 묵언에 대해 알겠다는 단유의 말을 노인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유의 표정을 보면 거짓이 아닌 것 같아 보였고, 결코 그럴 상황은 아니었지만 노인은 다른 모든 걸 차치하고 단유에게 매달려 그 의미를 묻고 싶었다.
“이건 숫자이고 이건 연산기호네요. 숫자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는 게 놀라워요. 정확히 어떤 숫자를 지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성을 보면 방정식이라는 사실은 명확해지네요.”
단유는 접시 속의 익숙한 방정식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노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가? 그···그것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인가?”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진리요?”
노인은 단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수학은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불변이죠.”
단유의 확고한 음성이 실내를 메웠다. 노인은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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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한때 마법사의 제자였다. 대륙의 동쪽 작은 소국의 이름없는 마을에서 자라던 노인은 우연히 마법사를 만났고, 영특함이 눈에 띄어 마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거리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아이는 마법사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마법사라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이야기 속에는 무서운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자신을 제자로 받아준 마법사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마법사의 제자라는 직위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처음에야 부모님을 모시듯 마법사를 떠받들며 모시겠노라 작정했으나 마법사의 기괴한 성격을 맞추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엔 신체적 학대와 정신적인 폭력이 뒤따랐다.
한번은 이럴 거면 왜 자신을 제자로 받았냐고 항의하기도 했는데,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마법사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받아달라 조르지 않았더냐?”
그래도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이 고통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법사는 제대로 된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 것을.”
모진 일을 당하다 못해, 결국 마법사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품은 채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미 고향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라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아 보였고, 혹시라도 돌아갔다가 다시 마법사에게 잡히면 큰일이다 싶었던 마음에 결국 대륙을 누비며 유리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게이아의 뜻을 잇는 진리의 탐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진실의 한 조각을 보게 되었다. 그를 따라 다니며 결코 상상해본 적 없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마법사에 대한 증오를 품었던 마음에 불이 붙었다.
노인은 그의 스승 행세를 했던 마법사는 물론, 다른 마법사들까지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했다. 노인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고, 요행이 뒤따르긴 했지만 마침내 노인은 진실의 조각들을 모아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전지전능한 존재로만 보이던 마법사를 무릎 꿇리고 그들의 손과 발을 칼로 저밀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노인은 조직의 수장이 되었고, 어느새 전 대륙을 아우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어릴 적 꿈꿨던 전지전능의 힘을 비로소 얻은 것이다. 이 기틀을 굳건히 하기 위해 그의 자리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자들, 마법사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노라 다짐했다.
마침 교국과 연이 닿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마인 토벌전’에 앞장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노인은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마게이아의 진언으로는 마법사들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둠’에 기댄 반쪽짜리 힘이었다. 해가 창창히 비추는 밝은 대낮에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고, 역설적이지만 마법사도 아닌 이들에게는 별 다른 영향도 주지 못했다.
비록 마법사들에게는 우위에 설 수 있었지만, 만약 어느 나라의 경비대가 창칼을 세우고 들이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노인은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게이아의 묵언이 가진 비밀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각들을 모아도 묵언의 비밀은 풀 수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마법사가 묵언의 비밀을 이해한 듯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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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어떤 뜻인지 설명해다오.”
단유는 조금 전까지 분노와 증오를 불태우던 노인이 눈빛을 바꾸고, 마치 먹이를 주길 기다리는 개처럼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몰라요.”
“모른다고? 방금은 안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방정식이란 건 알지만, 이 문양들이 정확히 어떤 숫자를 지칭하는지는 다른 것과 비교 분석해봐야 알 수 있겠죠.”
“그, 방정식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일종의 주문인가?”
“수학이라니까요.”
“수학? 수학이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수를 다루는 학문이고, 좀 더 정확히 정의 내리자면, 연역과학의 일종으로서 요소 사이의 형식적 관계를 논리적으로 증명해내는 과학이죠.”
“···응?”
“1 더하기 1이 뭔지 아시죠?”
“···지금 나를 놀리려는 셈인가? 지금 거기 적힌 게 고작 애들 손가 락 장난 같은 거란 말인가?”
“손가락 장난으로 치부될 것은 아니죠. 모든 수학의 근본은 1 더하기 1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걸요.”
하지만 노인은 설명하는 단유의 가벼운 어조가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유가 그저 즐거운 마음에 목소리가 들뜬 것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인은 입술을 말아 씹으며 단유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 묵언의 비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준다면, 너의 행보를 방해하지 않겠다.”
“방해요?”
“설령 네가 마법으로 한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더라도 너를 막지 않겠다는 말이다. 서로의 영역을 지키자는 것이다.”
단유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제가 이대로 물러날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물러나지 않으면? 결판을 보겠다는 것이냐?”
“당신의 마법사에 대한 증오에 대해서는 내 알 바 아닙니다. 하지만 증오에 기댄 당신의 빈약한 논리가 죄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하고, 마치 공존하자는 것처럼 말하는 당신의 말에 대한 신뢰가 되지 못합니다.”
“뭐라?”
“그 증오심을 제거하면, 당신의 주장에 무엇이 남나요? 만약 이 세상에 모든 마법사들이 사라지면, 그다음 당신의 일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다시 일반 사람들처럼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할 건가요?”
노인은 뭔가 반론을 펼치려고 했지만, 단유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마치 마법사들이 이 세상 모든 죄악의 근원인 것처럼 주장하는 그 근거는 둘째치고, 그 죄악을 뿌리 뽑겠다는 당신의 정의론과 당위성은 상당히 빈약한 논리에 근거합니다. 그 증거로 당신 조직의 행태를 들 수 있겠지요. 그저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말로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거짓으로 선동하여 어딘가로 데려가고. 모순을 명정한다고 했나요? 그전에 스스로의 모순을 돌아보시죠?”
“놈!”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죠? 화가 난다면 스스로 인정한다는 말인가요?”
노인은 핏줄 선 눈으로 단유를 노려보았다. 잠시 가라앉혔던 분노와 증오가 노인의 머릴 가득 채우고,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며 입고 있던 장의(長衣)가 바람에 흩날리듯 흔들렸다.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세상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마법사만큼이나 당신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는 위험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만 납득하는 이유로 타인의 목숨을 빼앗고 그것을 설득력 없는 주장으로 정당화시키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의 주장대로 당신 역시 이 세상에서 없는 편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것이겠죠.”
“가히 마인이로다! 너의 음흉한 속내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저요?”
“이 진언과 묵언을 손에 차지하면 누구도 너에게 범접하지 못할 힘을 얻게 될 테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은 않은 것이겠지! 그래서 나에게 그런 누명을 씌워 죽이고 이것들을 모두 뺏으려는 속셈 아닌가!”
“이젠 도둑 취급이시네요. 하지만 당신의 편협함을 더 들어주기엔 저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죠. 당신들이 데리고 간 사람들, 어디에 있습니까?”
“네 알 바가 아니다!”
“살아는 있나요?”
“······.”
“오해일 수도 있고,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 산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다던가 하는 그런 식의 상상도 가능하니까요.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만, 그래도 모르는 거니까요.”
“···내가 너에게 말할 것 같으냐?”
“비밀인가요?”
태연스레 묻는 단유의 표정과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노인의 표정이 대조되었다.
“그곳은 선택받은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고통과 번민이 사라지고 오직 기쁨과 풍요만이 자리한 곳.”
“어디인가요?”
“악마 같은 마인들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곳, 알려 줄 수 없다!”
“그런데 왜 저는 계속 당신이 뭔갈 숨기려 드는 것처럼 느껴지죠?”
노인은 다시 입술을 굳게 닫아걸었다. 무슨 대단한 결사 의인이라도 되는양. 단유는 입꼬리를 올렸다.
“됐어요. 말하기 싫으면.”
노인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이미 지나간 일이죠. 만약 그들이 정말로 좋은 곳에서 지내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그들에게 좋은 일이니 그냥 두면 될 일이고, 설령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다면 그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니.”
“뭐?”
“제가 그들을 구하기라도 할 것 같았나요? 제 앞가림도 못하는 판인데. 다만 앞으로는 그곳으로 향할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게 최선이겠죠.”
노인의 부릅뜬 눈을 바라보며 단유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름이 뭔가요?”
“···왜 묻는 것이냐?”
“당신이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해둬도 좋을 것 같으니까요.”
“너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은···.”
단유는 손을 들어 올려 옆으로 그었다.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실내는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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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른을 데리고 동굴을 빠져 나왔다. 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그를 부축해 나온 후, 단유는 뒤돌아섰다.
‘해체.’
단유가 해체 마법을 익힌 후, 가장 규모가 큰 대상을 해체하는 것이다. 커다란 폭음이 공기를 찢고 하늘을 가르고 땅을 흔들었다.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뜬 사울른과 시선을 마주했다.
“돌아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