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98화 (698/956)

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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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른의 흔적을 쫓던 단유는 점점 메마른 사막처럼 변하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전진했다. 딱히 경계선이 그어진 것은 아니지만, 급격히 푸른색이 옅어지고 사라지더니 마른 풀마저 보기 힘들어지는 곳이었다.

지구였다면 환경문제를 논하기에 딱 좋은 지형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지구에서나 가능한 문제였고, 지금은 가릴 데 없이 노출된 지형 때문에 더 이상 은밀히 접근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말하자면 이제 곧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단유가 바위산에 접근할 때까지 어떤 제재도 발생하지 않았다. 솔직히 거의 대놓고 접근하는 데도 말이다.

바위산은 예전에 빈촌 남쪽에서 보았던 바위산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끝이 날카로운 바위들 때문에 바라만 봐도 온몸이 찔리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산은 그저 풍화 작용에 의해 둥그스름한 형태를 지닌 민둥산에 불과했다.

미끄러운 모래 때문에 위로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지만, 흔적들을 따라가니 딱히 어려움은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 입구에 섰을 때, 단유는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지하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와 비슷하게 보였다. 커다란 바위 사이에 존재하는 입구는 멀리서는 그저 바위 그림자처럼만 보여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거겠지.’

단유는 입구에 발을 들였다. 외부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굴의 앞은 밝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워졌고, 꽤 어두워진다 싶을 때쯤 멀리 횃불이 보였다.

그리고 횃불로 가는 사이에 단유는 첫 기습을 받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반응한 단유는 스치듯 지나가는 칼날의 반사광을 인지한 순간, 자연스럽게 공격들을 회피하고 반격했다. 준비한 단검을 휘둘러 상대를 무력화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사울른은?”

신음을 흘리며 노려보는 흑의인을 무심히 바라보던 단유는 손잡이를 내려쳐 상대를 기절시켰다.

이후로도 두어 번 기습이 있었지만 단유는 어렵지 않게 이겨냈다. 그리고 어둠이 이어지는 통로에 접어들었을 때, 단유는 마법이 막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그 난장판 같던 싸움을 이어나가야 하겠구나,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한 준비도 해 놓은 마당이니, 단유는 다시 걸음을 떼어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

“환영 인사를 다시 받도록 하게.”

겉보기에 단유는 태연해 보였다.

“여기는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야.”

친절한 설명이 뒤따랐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물론 그제 밤에 벌였던 싸움에서는 흐릿한 달빛이라도 비쳐 어렴풋이 상대의 공격을 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유리한 싸움을 벌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시야가 차단된 상황.

단유는 슬금슬금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서 있다 앞섶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꺼냈을 때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여러 장의 두루마리 종이들.

사령관을 만난 후 다시 돌아온 단유가 사울른이 묵었던 집에서 잠들었다가 깼을 때, 사울른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상황을 확인 후 바로 집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잠들기 전엔 피곤해서 대충 훑어만 봤던 집 안을 살피다, 이전 에토신스의 부대장이 이곳에 머물 때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들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사울른과 함께 왔을 때도 보았던 것들 중 하나였지만, 문득 사령관이 저 종이를 사용해 서신을 작성하던 모습을 떠올린 단유였다. 의자에 앉아 빈 종이를 바라보다 그 종이 곁에 놓여 있던 펜을 집어 들었다.

잠시 그렇게 보다가, 다시 펜을 놓고 품에 간직하고 있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동안 추적한 자료들을 단유 나름대로 정리한 것들이었다. 그것을 한 장씩 검토하다가 단유는 펜을 들었다.

아직 정확히 그 글자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이나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몇 개의 구절 혹은 단어들이 반복되고, 또 어떤 문장은 다른 곳에서 쓰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을 나름대로 유추해보자면, 일단 규칙성을 가진 문장들의 나열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아마도 특정한 효과를 부르는 주문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보편성에 기인했다.

사람은 시대와 환경, 교육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고 지역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중세 언어와 현대 언어의 차이가 나는 것이 그 방증일 테다.

그러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대상을 보고, 그 대상을 이해하고, 비교하고, 분석하여 이를 표현하는 언어의 구조는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유사한 면이 있다. 그것을 학자들은 ‘언어의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한다.

물론 여기, 이곳은 지구와 전혀 다른 환경,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설령 인간이 아니더라도, 문자로 작성되는 순간, 문자가 어떤 대상을 묘사, 설명을 한다면 그것은 다른 언어에서 사용되는 구조와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리고 단유가 추측하기로, 이 문장들에도 그런 규칙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바로 수식(修飾)과 정언(定言)의 구조였다. 정언이 어떤 효과를 발동시키기 위한 명령, 혹은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수식은 그 정언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구조라 볼 수 있었다.

흑의인의 몸에 새겨졌던 글자를 비교하면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몸에 새길 수 있는 글자는 한정적이었고, 그래서 수식의 표현이 간소화되는 면이 있는 반면, 정언의 경우에는 다른 곳에 쓰인 것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흑의인에 새겨진 문자, 동판에 새겨진 글자, 말뚝에 그려져 있던 문자들을 비교하여 살피면 정확하게 반복되는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세 개가 동시에 같은 기능을 발휘했다면, 그 반복되는 구절이 같은 효과를 불러오는 게 아니었을까, 유추하는 게 당연하다.

그 구절에 같이 쓰인 문자들은 아마도 수식을 위한 구절일 테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문장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아마도 마법을 봉쇄하는 효과를 부르는 문장이겠지.’

그렇다면 동판과 말뚝에 각기 적혀 있는 또 다른 문장은 어떤 효과를 부르는 것일까? 경우의 수가 적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쩌면 단 하나의 효과를 위해 조합되어야 할 부수적인 문장일지도 모르고, 혹은 전혀 다른 효과를 부르는 문장일 수도 있다.

지난 싸움들을 복기하여보면 가끔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라고 의문을 갖게 하는 능력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과 이 문장이 관련 있음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볼 만 가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 단유는 펜을 들어 빈 종이에 그것들을 필사했다.

그것을 끝낸 후, 다시 품에 집어넣고 집을 나선 단유는 사울른을 찾아 동굴까지 오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적들을 상대하게 된 상황. 자신은 그들을 볼 수 없는 반면, 적들은 마치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는 듯이 접근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자에 의한 능력이라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단유는 품에서 꺼낸 필사지들을 손에 쥐고 펼쳤다.

어둠 속에서 글자들이 노출되는 그 순간, 단유는 그 글자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 너머, 정면에서 자신을 노려보며 칼끝을 세운 적의 얼굴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적이 당황하여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리는 모습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이게 진짜 마법이네.’

어떤 원리인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서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보다 훨씬 신기하고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생각이 단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선은 이걸로 충분했다.

“어떻게···.”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부르튼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바로 앞에서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마게이아의 진언을 몸에 새기지 않으면 절대 앞을 볼 수 없는 곳인데도 마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날아드는 칼날을 피하고 반격하여 그의 수하들을 한 명씩 바닥에 눕히고 있었다.

십여 명에 달하던 수하들이 고작 한 사람에게, 게다가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손에 든 단검 하나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모습은 기이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미리 칼날이 어디로 날아들지 아는 것처럼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고 빈틈을 노려 단검을 휘두르니, 그의 수하들은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칼을 맞고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다. 그런 무기력한 모습은 평생동안 본 적이 없었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며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 쥐었다.

자리를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그의 마지막 수하까지 하얀 눈동자를 뒤집으며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목소리는, 마인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목소리는 혀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단유는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는 비대한 몸집의 노인을 슬쩍 본 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돔형의 실내는 외곽 쪽으로 굵은 기둥들이 서 있었고, 그 기둥들마다 예의 문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기둥들의 사이 사이에 화로(brazier)들이 놓여 불을 밝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불빛마저 감추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보는 것인가?”

비만일 게 분명할 노인의 목소리에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단유가 대답했다.

“당신들의 방법대로.”

“그것을 읽을 수 있는가?”

“아뇨. 하지만 사용은 가능하네요.”

단유는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 두루마리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요?”

노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단유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말씀하신 환영 인사는 받았으니, 이제 대화를 나눠볼까요?”

단유는 뚜벅뚜벅 걸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둥으로 다가갔다. 노인의 초조한 듯 빠른 어조의 목소리가 단유를 막아섰다.

“멈춰라!”

단유는 그를 흘깃 본 뒤, 단검을 들었다.

“대화를 나누려면 우선 서로를 가로막는 것부터 없애야 평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기둥의 윗부분을 칼로 강하게 찍은 단유는 힘껏 그어 내렸다. 돌과 칼날의 충돌에 듣기 거북한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안 돼!”

노인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단유의 칼날은 다음 기둥으로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낸 탓인지, 노인은 터져 나온 기침 때문에 가슴을 부여잡고 쿨럭거렸다. 그러나 단유는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훼손 작업을 이어나갔다.

“마, 마게이아의 진언을···감히···.”

네 개째 기둥의 글자들을 훼손했을 때, 단유는 시야에 들어오는 불빛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들을 보니 글자가 점점 옅어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어둡지 않았고, 화로에서 일렁이던 불빛도 선명하게 보였다. 쓸모가 없어진 종이들을 화로에 집어넣으니 불티들이 화로 주위를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단유가 돌아서니, 불빛이 드리우지 않는 그늘 속에 구부정하게 앉아 잔기침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단유는 머리맡에 빛의 구슬을 만들었다. 환한 빛이 실내 곳곳을 비추고, 노인의 새하얀 머리칼과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턱수염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에게로 터벅터벅 걸어간 단유는 도중에 사울른의 곁을 지나며 그가 무사한지 살피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리고 다시 노인에게로 다가선 단유. 노인은 단유와 단유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빛의 구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위로 치켜뜬 사나운 눈매에 붉은 핏줄이 서려 있다.

“어찌할 셈이냐.”

“사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왕 만났으니 정말 대화라는 걸 해보는 게 어떨까요?”

“대화라고? 언제부터 마인이 대화라는 걸 즐겨했다는 거지?”

“대화를 즐기지 않는 마법사들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서로를 이해하는 데 대화만큼 효율적인 방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선자로군.”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자에게도 그런 식으로 접근했던가?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그런 자가 없지는 않았어. 몇 마디 말로 혹세(惑世)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마인이 있었지. 그의 정체를 간파한 이들의 용기로운 행동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몇몇 나라는 그의 손에 들어가 죽음의 땅으로 변했을 것이야.”

“마법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정말로 대화를 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혀는 진실을 말하지만, 그의 의지는 불신과 갈등을 부르도록 했다. 아비와 자식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증오하도록 했다. 친구가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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