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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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사내들이 내뱉던 시시껄렁한 농담과 잡담은 어느 순간 뚝 끊어져 버렸다. 묵직한 정적이 감도는 동굴 통로를 걷고 있자니, 괜히 지하 도시로 가는 길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그곳과 달리 어둡기도 하거니와 괜히 불쾌감을 유발하는 끈적함이 느껴졌다.
보기에도 흉측한 벌레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쏘아댄 진액에 맞아 끈적거리는 기분.
그때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목줄을 거세게 잡아당기는 힘에 사울른은 넘어질 정도로 휘청거렸다.
“지금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몸에 달려 있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으면.”
의미 없는 협박이다. 어차피 이들을 보내줄 생각도, 아니 살려줄 생각도 없을 텐데. 입이 막혀 있지 않았다면 내키는 대로 독설을 내뱉었을 테지만 아쉽다.
황량하고 메말랐던 입산 풍경과 달리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습하고 끈적한 기운이 느껴져, 만약 지금 홀로 이곳을 탐험 중이었다면 꽤나 흥미를 가지고 내부를 탐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공기의 무게가 달라졌다. 묵직한 기운이 사울른을 짓눌렀다. 폭풍 속에 있다면 이럴까? 거센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쳐들고 있기가 어려웠다. 등 뒤로 돌려진 팔이 아니라면 손을 들어 앞을 막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질질 끌고가던 이들이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이 혼자 앞으로 나아갔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아니 그저 서 있었을 뿐이겠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한참을 여기에서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사울른의 눈은 어둠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띄엄띄엄 꽂혀 있던 횃불이 끊어 진지도 오래 되었는데, 용케 길을 찾는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이들은 그런 어둠에 구애받지 않는 듯했다.
사울른은 눈을 거듭 깜빡이며 주변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마치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 마냥 목줄이 죄어왔다.
“읍읍!”
다시 사울른을 끌고 가는 이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방향을 특정할 수 없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는?”
대답한 이는 사울른을 제압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마인의 동료인 탈영병입니다.”
이름은 없고, 그저 ‘탈영병’이란 수식어로 자신이 소개되니 사울른은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울른의 기분 따위를 생각해 줄 이는 여기 아무도 없었다.
“저희의 뒤를 쫓다가 헨하우트에게 걸려 생포되었습니다.”
“수고했다.”
그 과정에서 한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없었고, 목소리 역시 더 많은 걸 묻지 않았다.
“재갈을 풀어주어라.”
사내는 거칠게 재갈을 끌어내렸고, 그 과정에서 입술 아래가 쓸렸지만 사울른은 항의할 수 없었다.
“날 어찌할 셈인가!”
“이름은?”
어딘가를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사울른의 이름을 물었다.
“나에게 뭘 묻든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사울른은 다시 한번 각오를 드러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뒷통수에 화끈한 통증이 새겨졌다.
“윽!”
“···이름은?”
“······.”
“어줍짢게 의리를 지키려 들지 마라. 니가 맹세의 주먹을 들어올렸던 곳에 그는 있지 않았으니.”
‘맹세의 주먹’. 그것은 군에 들어갈 때 하는 의식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 맹세라 함은 왕을 향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니, 목소리가 지적하는 건 바로 사울른이 맹세를 저버리고 탈영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당신도 없지 않았소?”
“그러니 어줍짢은 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살기 위해 마인에게 빌붙었으니, 살고 싶다면 입을 열고 혀를 놀려라.”
“떳떳하지 못한 점은 있으나, 그래도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진 못하겠소. 적어도 그는 어둠 속에 숨지도 않았고, 말 한마디에도 신의를 담아 나를 대했소.”
“그러니 그가 마인인 것이거늘. 속인(俗人)들에게 힘을 과시하고, 미래가 없는 절망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한다. 마음이 곧지 못한 이들, 늪에서 자란 갈대보다 약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마인을 두려워하거나 그 힘에 굴종한다.”
“난 그의 부하가 아니오.”
“누구를 위한 착각인가? 그가 너를 부하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가?”
“그렇소!”
“우매한 이여. 이미 골수까지 세뇌당한 불쌍한 영혼이여.”
가래 끓는 목소리 끝에 이어지는 혀를 차는 탄식은 사울른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기만하는 너희들이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나 있느냐?”
“너의 좁은 식견으로는 진실을 볼 자격이 없으니 그런 오해를 할 만하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건데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적이 없으며, 기만한 적조차 없다.”
“헛소리! 내 직접 너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도륙하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그들이 죄가 없느냐?”
“그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진실을 보지 못한 죄가 있다.”
“뭐?”
“너 또한 죄가 있으나, 그나마 연명하는 건 오로지 자비로움 때문이니 그저 속죄하라.”
사울른은 밑도 끝도 없는 대화에 질려버릴 것 같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울른은 단유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거기서 ‘대화’란 이런 것이다, 같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깨달았다. 상급자가 명령을 내리듯 일방적이지 않고,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과정. 그것이 대화라고 사울른은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것은 대화라고 할 수 없었다. 마치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는 대화지만 실제로는 그저 일방적인 생각과 전달되지 않는 의사를 주도하려는 의지만이 전부인 대화였다.
사울른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미친놈들.”
또 다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뭔가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묵직한 뭔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이렇게 사람을 긴장시킬 수 있구나, 를 새삼 깨닫는 와중이었다.
“이름은?”
정말 미친 놈이든지, 미련한 놈이든지 둘 중 하나라 생각했다. 뭔가 대단한 걸 묻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이름이나 묻고 있다니.
“사울른.”
대답이 나오고 사울른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입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온 대답이었다.
상대는 마치 지금의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어디서 왔는가?”
“‘도테인’에서 왔소.”
“도테인이라. 큰 강이 흐르는 곳이군.”
“그렇소.”
“마인은 언제 처음 보았나?”
“겨울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소.”
“어디서 만났나?”
“리아빈의 북쪽 숲에서 보았소.”
조금 전과는 정반대로 주고받는 대화였다.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입은 술술 털어놓기만 할 뿐이었다.
“왜 마인과 같이 하게 되었나?”
이어진 질문에 처음으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목소리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다 다시 채근했다.
“왜 마인과 함께 다니기로 하였는가?”
“···죽기 싫었소.”
짧은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는데, 마치 ‘거봐라, 역시 그렇지 않은가’, 라고 비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기껏 대답하지 않으려 오는 동안 계속 되뇌었던 게 쓸모없게 돼버렸다. 목소리가 무엇을 묻든 사울른은 잠깐의 주저함이 있을지언정 모두 순순히 대답해주고 말았다.
단유와 처음 만난 순간, 단유가 사용한 마법에 대해서, 그 마법에 의해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 처음 마을에서 흑의인들과 만나 싸울 때 어떤 상황으로 전개되었던지, 단유가 회수한 기물에 대해 단유가 얼마나 알게 되었는지까지도 모두 털어놓은 사울른이었다.
어떤 저항도, 의지도 무소용이었다.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순순히 대답하는 입과 달리 사울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억울했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현재 단유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모르오.”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것까지 설명해보게.”
“···에토신스의 진군 사령관을 만나러 간 것까지만 알고 있소.”
“그가 자네를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소.”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듯 들리는군. 확신하는가?”
“그렇소.”
적어도 단유와의 유대에 있어서는 확신하는 바였지만,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이렇게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은 이미 제멋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좋아, 그럼···그가 만들었다는 마을은 어디에 있는가?”
정말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그것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하게.”
그것은 단유와 사울른이 목숨을 걸 정도로 지켜낸 마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사울른이 단유와 함께 하는 명분이기도 했으며, 사울른이 죽을 각오를 하고 이들의 뒤를 밟은 이유이기도 했다.
“호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끝내 짓이기며 열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에 목소리가 처음으로 감탄했다.
“그런 사내였군, 자네는.”
그의 인정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냥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걸세. 억지로 버티다간 자네에게 좋지 않아. 어차피 자네도 살고 싶지 않은가?”
사울른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콧등의 주름이 움찔거리고 입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옅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 뒤, 입이 열렸다.
“살기 위해 살리는 것이다.”
“음?”
살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사울른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저 혼자 목숨을 부지하는 거였다면, 애초에 군을 탈영할 마음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백한 것처럼, 단유를 처음 만났을 때도 사울른은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살려고 투항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동료들이 의미 없이 죽지 않도록, 그가 먼저 나서서 무릎을 꿇고 마법사의 자비를 구했던 것이다.
살고 싶은 마음은 다른 이도 똑같을 것이다. 가진 힘이 없어 저항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들이라도 그 마음은 같을 것이다. 그것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살고 싶은 마음도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죽고 자신만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사울른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진심을, 좀 더 길게, 명확하게 토해내고 싶었지만 그의 입은 더 이상의 말을 늘어놓지 않으려 했다. 애초에 상대에게 받은 질문은 그것을 묻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좋다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머리가 터져 나갈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는 직감이 들 때쯤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울른은 뒤에서 들려온 단유의 목소리와 함께 이어진 이명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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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오는 길이 조금 험하긴 했지만, 못 올 곳은 아니더군요.”
“조금 험하다고?”
막는 이가 한 둘이 아니었을 텐데. 그보다 어떻게 이렇게 소란 없이 등장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어떻게 왔나?”
“흔적을 따라 왔죠.”
흔적 따위를 남길 부하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마법사. 거짓을 말하지 않는 존재.
“놀랍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군. 역시 마법사인가?”
“글쎄요.”
단유의 대답 후에 몸을 숙여 사울른을 살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더듬어 사울른이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나마 고른 들숨과 날숨에 단유는 걱정을 한 시름 덜며 몸을 일으켰다.
“오히려 제가 더 놀랍군요.”
단유는 좌우를 살피며 말했다. 여기에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주위를 밝힐 수 없었다. 이럴 거라면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싶었다.
“마법사이기 때문인가? 이런 곳에서 나와 태연히 말을 주고받을 용담(勇膽)이라니.”
“이런 곳이 어떤 곳인데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자네의 무덤이 될 곳이지.”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만용 부리지 말게나. 그런 말 하다 죽은 마법사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자신은 보지 못하지만, 그는 자신을 잘 보는 듯 했으니 의미는 통할 것이다. 잠시 쿨럭거리는 기침소리가 나더니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부족했던 환영 인사부터 다시 받도록 하게.”
그 말을 끝으로 단유의 주위에 수십 개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