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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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단유가 잠시 걱정을 해 보았던 바이언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지치고 있었다.
웬만하면 집 밖을 나가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어 잠깐 나갔다가 금방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편에 선 스토보란 이름의 피난민 출신 사내와 그의 곁에 선 이들의 따가운 시선도 감당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은 기다려야 할 시기이니 차분하게 기다리자고 둘러대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바이언.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안했는지 한 두명씩 집을 찾아왔고, 찾아온 이에게 짜증을 낼 수 없어 굳은 얼굴로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역시나 불안과 걱정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손님들의 이야기에 바이언은 굳은 얼굴을 펼 수 없었다.
“하아.”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새삼 마법사에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지만, 동시에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감당해야 하는가 싶어 지치는 마음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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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언.”
“왜 그러는가?”
“이 마을에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아시나요?”
“이 마을에?”
뭔가 할 말이 있다면서 자신을 불러낸 마법사의 질문에 바이언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몰라서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탓에 그중에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지를 선별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현 상황에서 이 정도까지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당장 피난민들만 보아도, 그리고 마을을 떠난 친구들, 이웃들을 보아도 그렇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나라에 크고 작은 일이 벌어지면 언제나 피해를 보는 건 자신들처럼 힘없는 이들이었다. 나무를 하고, 땅을 일구고, 가축을 돌보고, 작은 망치를 들어 두드리는 게 전부이며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자신들 같은 사람들.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손님이 열 명이나 겨우 될까 싶은데도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작 마을 사람들 정도만 상대하며 가끔은 공짜로 술을 퍼주기도 하는 술집 주인이 있는 곳이 자신들이 살던 마을이다.
그런데 마법사는―물론 그의 등장과 함께 마을에 작지 않은 피해가 있었다지만 그건 논외로 하더라도―홀로 이런 기획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이 안전하게, 그리고 이전보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 정도만 해도 사실 감지덕지 해야 할 판인데, 마법사의 계획은 아직 끝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마을이 외부로 소문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머물 데가 없는, 혹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고생을 마다하고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지금의 피난민은 일부분입니다.”
그렇게까지 멀리 볼 문제인가 싶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늘어나고 외부인들의 유입이 잦아지면 자연히 마을의 질서와 안전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외부인을 받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닌 이상, 외부인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순한 예로, 과연 외부와의 거래 없이 이 마을이 자급자족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큰 질병이 들어 사람들이 죽지 않는 이상, 사람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마을은 그리 크지 않지 않나?”
“사람이 늘어나면 이 도시도 커질 것입니다.”
“어떻게?”
“바이언, 이 도시는 오롯이 저 혼자 만든 게 아니에요. 마을 사람들도 함께 만들어낸 도시예요. 제가 없다고 해도 충분히 땅을 넓히고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게다가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손도 늘 테니 나중에는 더 쉬워지겠죠.”
“그건 그렇다치세. 그럼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어느 공동체든 마찬가지겠지만, 여기에도 사람들이 질서를 지킬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구심점?”
“예전 이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공동 작업이 필요로 할 때, 그걸 조율하고 통제하던 사람이 누구였죠?”
“···촌장님이셨지.”
그리고 그분은 겨울이 오기 전에 마을을 떠났다. 군대로 끌려가지 않은 큰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걱정한다며 억지로 끌고 나갔다.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야밤에 사라졌다. 그래서 당연히 있어야 할 인수인계도 할 수 없으니, 다음 마을 촌장을 세우지 못한 채로 지내던 중이었다.
“구심점이 필요해요. 그리고, 사울른과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은 바이언이 그 구심점이 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하고요.”
“내가? 안 돼. 난 못 해.”
격렬하게 손사래를 치는 바이언에게 단유가 그 이유를 물었다.
“난 그런 거, 못 하네. 책임감도 없고, 사람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잘 못 하고.”
단유는 그 점에 대해 지난 과거의 일을 거론하며 반론을 펼칠까 하다가 말았다.
“하지만 이 마을에 그런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건 인정하시죠?”
“자네가 하면 되지 않나?”
“안 된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비록 이 도시를 건설하는데 가장 큰 힘을 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단유는 원죄(原罪)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처지. 그를 구심점으로 삼기엔 만만찮은 반대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바이언, 혹시 당신이 생각하기에 적당한, 그러니까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어요?”
“흠, 그렇게 물으니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기도 하네만.”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죠.”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 ‘사회학적 실험’이라는 알 수 없는 부제를 붙인 마법사의 제안에 바이언은 조금 혼란을 느꼈지만,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바이언이 보시기에 이 마을을 정말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보세요.”
“근데 내가 그걸 잘 할 수 있을까?”
“사실을 떠벌리지만 않는다면요.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때는 이렇게 부담이 클 줄은 몰랐다. 그저 자신이 잘 ‘연기’할 수 있을까만 걱정했었던 것 뿐인데, 이제는 과연 이 갈등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리고 혹여 마법사도 통제할 수 없을 상황까지 치닫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법사가 약속한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이라도 나타날까 싶었는데, 그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스토보의 말처럼 진짜 마법사에게 속은 것인가, 불쑥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의심은 나오자마자 사라졌다.
‘올 거야, 그는.’
그리고 다시 빈 탁자 위, 흔들리는 램프 불빛을 바라보며 그 위에 마을 사람들의 면면을 투영시켰다. 추천해달라 하였지만, 그 누구도 마땅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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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흔적을 따라 걸으니 어느새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숲마저 지나가게 되었다. 어제 아침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던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한팔로 안을 수 있을 만큼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 높게 솟아 있었고, 가지는 여러 방향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는 한 손으로 틀어쥘 수 있을 정도로 얇은 나무 줄기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자칫 실수하면 발에 걸릴 정도였다. 앞선 이들, 그리고 사울른은 그 가지들을 밟지 않는 대신, 드문드문 솟아나 있는 바위들을 밟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들키지 않고 따라가고 있는 사울른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쯤 되니 슬슬 사울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부상도 입은 몸인데, 이 먼 거리를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따라갔으니 몸에 부담이 이만저만 아닐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할 때쯤, 방향이 90도로 꺾였다. 여태 동쪽으로만 이동하던 선두 무리가 북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주변을 살펴 보려니 여간 어두운 게 아니었다. 빛이라도 밝혔으면 좋겠지만, 이런 곳에서 빛이 나게 했다가는 혹시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위를 가로막는 잎새들 사이로 간간이 비쳐오는 흐린 달빛에 의지해서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그 흐린 흔적 속에서도 단유는 정확히 자취를 찾아내 따랐다. 보이지 않는 게 문제지, 보인다면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들의 행선지가 마침내 숲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확인했을 때, 숲 가장자리에서 단유는 이제와 다른 흔적을 발견했다.
‘피.’
싸움의 흔적이 있었고, 넓게 고인 핏자국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사울른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한 사람을 눕혔지만, 체력이 부족했던 사울른은 다른 이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사울른을 붙잡은 이는 그가 쫓던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도 여기서 기다리던 적들의 또 다른 일행이 아닐까 추측됐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른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흔적이 옅어졌다. 아마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지운 듯 보이지만, 다행히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유는 초조했다. 이유는 눈에 보이는 그 싸움이 벌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었다. 조금 더 서두르면 붙잡힌 사울른을 구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단유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단유가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흔적을 찾아 쫓던 그 시간, 단유의 생각처럼 붙잡혔던 사울른은 마른 풀포기 하나 보이지 않는 산 중턱의 으슥한 동굴로 끌려가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고 두 팔을 등 뒤로 해서 단단히 결박한 뒤, 마치 돼지를 끌 듯 목에 줄을 채우고 끌려가는 사울른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뒤를 잡힌 후 분전했지만 결국 붙잡혀 이런 수모를 겪게 된 사울른. 그는 억울한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리 말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뒤를 쫓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루치드···.’
입이 막혀 말을 할 순 없었지만, 흑의인이 거칠게 줄을 당길 때마다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전에 입은 부상이 낫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상처를 몸에 새겼고, 그게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시 칼을 맞으니 이제 성한 곳이 없다 할 정도라 절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끌고 가는 흑의인은 그런 사울른을 동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정말 돼지새끼 같이 울어대는군.”
“돼지는 죽여서 먹기라도 하지, 이건 어디에 쓰나?”
“까마귀 밥이라도 주는 거지.”
“자비심이 넘치는군.”
시답잖은 농담이나 지껄이며 킬킬대던 그들은 동굴 앞에서 지키고 있던 그들의 또다른 동료와 만나 걸음을 멈췄다.
“뭐지, 그 뒤에는?”
외부 활동 시 어떠한 흔적도 남겨선 안되는 그들의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라도 인질을 데리고 오는 경우는 없었다.
“이 녀석, 그 마인 놈의 동료야.”
“아, 그 녀석인가?”
“어르신께 데리고 갈 생각이야. 아마 어르신이라면 이 녀석을 통해 마인 놈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거야.”
“그렇군. 들어가게.”
“그럼 수고해.”
간단한 수인사를 나눈 후, 사울른은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다시 끌려가기 시작했다. 긴 간격을 두고 벽에 꽂혀 있는 횃불에 의지해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따라가며, 사울른은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철저히 감추는 게 목적이라면, 이곳까지 오는 길도 비밀일 테니 눈을 가리든지 했겠지만, 그들은 사울른의 눈을 가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이 동굴을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얘기였고, 나아가 이 곳에서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한 마디라도 꺼낼 것 같으냐?’
결심은 해보지만 자신은 없었다. 자신이 고문에 못 이겨 단유에 대한 어떠한 사실을 토설할까 자신이 없는 게 아니었다. 무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기물(奇物)을 다루는 이들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이 아는 바를 토해내게 할까 봐, 그래서 자신이 없는 사울른이었다.
‘난 모른다, 난 모른다.’
방법이 될지 모르겠지만, 사울른은 그렇게 되뇌며 머릿속에 들어있는 모든 지식을 잊으려 노력했다.
“거참 되게 시끄럽게 끙끙거리네.”
“조금만 참아.”
“어르신 앞에서도 이럴까 봐 그러지. 어르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어떡하나?”
“그럼 미리 손 좀 볼까?”
“그러다가 죽으면? 안 그래도 꼴을 보아하니 오늘내일할 것 같은데.”
보이는 것과 달리 꽤 가벼운 놈들, 이라는 생각을 잠시 하던 사울른은 질끈 눈을 감고 다시 ‘모른다, 모른다’를 되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