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95화 (695/956)

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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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도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돌아올 때도 딱히 홀가분한 마음이 들진 않았다. 다행히 사령관과 원만한 대화를 나누었고, 우려했던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대화의 내용과 별개로 이 시대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서 과연 ‘자립형 생존’이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 까닭이었다.

‘너무 급진적인 걸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긴 했다. 그래도 서로의 이해가 상충되지 않는 속에서 적당히 조율하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단유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닫힌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 얼마나 사소한 부분들에서 사람들과 충돌이 벌어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될지는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자전거의 속도가 느려졌다. 페달을 밟는 다리에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낀 단유는 재차 바람을 불게 하였다. 등을 떠미는 바람의 힘에 다시 자전거가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단유는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주시하며 페달을 밟았다. 밤하늘에 떠오른 수많은 별빛이 단유의 앞을 밝혀주었다.

새벽 즈음에나 도착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동살이 내려와 눈꺼풀을 찔렀다.

자전거를 세우고 사울른이 눕혔던 집으로 들어가니 썰렁한 공기만 단유를 맞이했다. 주변을 살피니, 사울른이 집을 나선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시간만 따지면 거의 하루가 지난 셈이니, 그 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사울른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딱히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좀 더 날이 밝은 뒤에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잠깐 좀 쉴까?’

피곤이 몰려왔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쉬지 않고 움직였던 탓에 몸이 조금 무겁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사울른이 누웠던 곳에 머리를 기대고 누우니 금방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왔다. 본인이 체감하는 이상으로 몸은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단유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이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작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어.”

“고작 하루지만,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어요.”

“나도 그래, 바이언. 어쩌면 여기가 지상에서 꽤 떨어진 곳이니 바위를 뚫어내더라도 소리가 안 들리지 않을까?”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그냥 하루를 더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어?”

바이언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지만, 그들도 내심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고립과 폐쇄라는 환경에서 침착하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이언은 모인 이들의 어깨 너머로 자신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저 사람들 결국 분열이 일어나고 말 거요.”

스토보의 확정적인 어조에 스토보 주위에 몰려있던 이들도 바이언의 무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떡할 생각이요?”

누군가 스토보에게 물었다. 스토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 후 조심스럽게 화답했다.

“불안은 저들만의 약점이 아니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에 떤다는 사실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불안을 인정하고, 이를 타파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불안하지만, 우리는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면 분명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스토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나설 수 없는 이유는 역시 우리 수가 저들에 비해 적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행동할 사람을 더 모아야 합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않나요?”

“물론 그들 중에는 우리가 설득하면 뜻을 같이할 이가 있겠지만, 보다 확실하게 하려면 저들 중에서 우리와 함께할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다시 스토보의 시선을 따라 바이언의 무리로 향하는 시선들. 개중에는 바이언이 쳐다보니 얼른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아까 말한 것처럼, 사람이 불안하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저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처럼 말하지만, 그게 얼마나 낙관적인 망상인지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상황은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지금은 위기의식을 갖고 과감하게 헤쳐나갈 용기를 가진 이들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가진 이’들이란 표현을 쓸 때 스토보는 주위에 모인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제스처가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았다.

“하비, 혹시 저들 중에 말이 통하는 이가 있소?”

피난민 출신이 아닌, 원래 마을에 살던 이들 중 한 명인 하비는 스토보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바이언 쪽을 살피다 말했다.

“둘 셋 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냥저냥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긴 하지만, 지금은 서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은 없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 한 번 시도해보시오.”

“···알겠소.”

“하비. 이건 단순히 우리가 저들을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오. 당신이 그들을 설득하게 되면, 그들도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오.”

“목숨을?”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이건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요. 이대로 저들의 말대로만 따른다면, 만약 운이 좋아서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긴다 해도, 앞으로 이곳에서 살기 힘들 것이지 않소? 나중에 그들이 설령 무리한 부탁을 한다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다 해도 우리는 그저 끌려가기만 할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제대로 차리고 우리의 몫을 챙겨야 하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 맥락은 이해하지만, 더러 섞여있는 몇몇 단어가 조금 거슬렸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그게 어떻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할 뜻을 보일 뿐이었다.

“도대체 저들은 뭘 할 생각이지?”

“그러게나 말이야. 아무런 대안도 없이 그저 덮어놓고 반대만 할 뿐이라니. 저렇게 한심한 작태를 보이니 고향을 잃고 떠도는 게야.”

“애초에 저런 사람을 받으면 안 됐던 거 아닐까?”

“우리가 받았나? 루치드가 받았지.”

“루치드는 왜 저런 사람을 받아준거지?”

“마법사라는 이가 너무 마음을 선하게 쓴 거지. 사람은 말이야, 때로는 조금 독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맞아. 그런 독한 면이 있어야 돼. 그런 점에서 바이언이 확실히 강단이 있지.”

“내 생각도 그래. 이럴 때는 태도가 확실해야 하거든. 괜히 우유부단하게 이것저것 선택도 못하고 흔들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오늘 아침에도 봐. 몇몇 녀석들이 걱정을 하니까, 딱 잘라서 걱정할 필요 없다고, 여길 나갈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해주잖아. 바이언이 그런 확신을 하니까, 솔직히 난 안심이 되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난 바이언이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여도 좋을 것 같아. 솔직히 지금 이 마을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기도 하잖아? 물론 바이언의 것은 아니지만, 바이언이 자신의 몫을 강하게 주장한다고 해도, 난 수긍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반대 의사를 표시한 녀석들에게 바이언이 좀 더 단호하게 행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우리도 지난 겨울 동안 꽤 노력 많이 했잖아? 그런 고생도 않고 그저 얹혀 사는 주제에 불만만 늘어놓는 녀석들은 뭔가 제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내 말이!”

“이거 우리끼리만 이렇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거 같은데?”

“뭘 말이야?”

“지금 이 마을엔 촌장이 없잖아?”

“도망간 영감 이야기는 꺼내 뭐하나?”

“그러니까, 내 말은···지금 이 마을엔 이 마을을 끌고 나갈 사람이 없다는 소리야. 그래서 이 사단이 난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 참에 바이언을 이 마을의 촌장으로 삼는 게 어떨까 하는 거지.”

“아, 그래! 그러면 되겠네? 왜 지금껏 그 생각을 못 했지?”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거지. 또 촌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못 했었고.”

“나도 가만 생각해보니,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마법사가 마을에 있는데 다른 촌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군.”

“마법사가 언제까지 이 마을에서 우리와 함께 지낼 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와 별개로,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았으면서 마을 사람들을 잘 알고 조율할 수 있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래, 동의해.”

“이런 이야기, 우리끼리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니 얼른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그럼 저들은 어떡하나?”

“저들 때문이라도 빨리 우리가 결정을 지어야 하지. 우리가 빨리 마을 촌장을 뽑아야 더 이상 마을 사람들끼리 의견이 갈리는 일이 없을 것이고, 흔들리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저들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고.”

“명령?”

“이 마을의 촌장이니, 당연히 마을에서 지낼 수 있게 허락을 하거나 혹은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이 생기지 않겠나?”

“그렇군! 그럼 당장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우선 바이언은 빼고 우리끼리 이야기를 해 봄세. 만약 바이언을 부르면, 그는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거나 거절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군. 귀찮은 일은 떠맡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그런 성격인 주제에 지난번엔 용케도 앞장 섰었지.”

“그러니까, 이번엔 뒤에 불러도 될 꺼야. 그리고 우리가 합의를 해서 그에게 촌장직을 안겨 주면, 그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별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걸?”

“그렇지.”

숙덕대는 모의 속에서 마을은 묘한 기류에 휩싸여갔다.

****

점심이 훨씬 지났을 시간에 단유는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든 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그동안 누가 접근을 했더라도 깨지 못했을 정도로 깊게 잠들었던 단유였다. 덕분에 이틀에 걸쳐 쌓인 피로가 한결 가신 기분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 단유는 여태 사울른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찾아가 봐야 겠는걸?’

사울른처럼 미행, 은신은 배운 적이 없었고, 흔적을 찾아 추적하는 기술을 익힌 적도 없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형적(形跡)만 쫓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확실히 보는 법을 깨달은 후 이런 점에서 편리함을 느끼게 된 단유였다.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의식하지 못한 것은 보지 못하지만, 의식하고 보는 대상에 대해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볼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전거는 대충 집 뒤 그림자 진 곳에 세워두고 터벅터벅 여유로운 걸음으로 사울른의 형적을 따라 나섰다. 그의 눈에 비친 사울른의 그것 역시 그리 급하지 않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와 언덕 아래 모퉁이를 돌아가는 길을 갈 때는 꽤나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흑의인들과 맞선 뒤에 마을로 향할 때 지나쳤던 그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길을 가노라니, 어쩐지 사울른이 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무명 조직이 남긴 흔적이나 단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살피려는 것이겠지.’

그런 점에서 보면 사울른은 뼛속까지 군인, 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얼핏 생각해보면 확실히 사울른은 이 시대 사람 같지 않게 의식이 깨어있기도 하거니와 소소한 흔적을 엮어 이야기를 추적해내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길가에서 작은 동물의 발자국을 용케 찾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상처를 입은 사슴이 자신의 잠자리를 뺏겨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도는 것이라는 걸 알아낼 정도였다.

“숙련된 사냥꾼들이라면 이런 건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거지요.”

라고 겸양의 미덕을 내보이던 사울른을 떠올리며, 단유는 걸음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곳에서 단유는 걸음을 멈추었다. 단유의 시야에 여러 개의 흔적들과 동시에 몇몇 사람들의 움직임이 홀로그램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온 사울른은 저기에 숨었어. 그리고 이쪽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고, 그 사람의 뒤를 사울른이 쫓았네.’

그때부터는 사울른의 흔적은 아주 미미하게 보였다. 오히려 그의 앞에 선 두 사람의 흔적을 따라가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그 두 사람이 누군지는 보지 않으니 알 수 없었지만, 정황상 추측할 순 있었다.

‘그들을 쫓아간 것이군.’

단유는 그들이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미간을 좁혔다. 만약 이게 아니라면 단유는 사울른과 함께 마을로 향했을 것이고,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들을 정리하며 이번 사태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조금 틀어졌다. 누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우선 순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가 결국 결심했다.

“바이언이 조금 마음고생이 심하겠지만, 그것도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지.”

단유는 사울른이 향한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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