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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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부러 그를 당황시키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니었고, 새삼스레 국가론을 들먹이며 근대 계몽론자처럼 행동할 목적도 아니었다. 다만 나름 지배계층에 속한 사람이고, 점령군 사령관이기에 피지배계층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의 변화가 있다면 단유의 요구에 대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말을 꺼낸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령관에겐 너무 급진적이었던 것일까?
“독특한 사고방식이군. 젊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마법사란 이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인가?”
사령관은 짧게 자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국가라···. 모름지기 국가란 왕의 보호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법이 아닌가? 왕이 없는 국가란 존재할 수 없다 생각하는데. 지금 이 공국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대공이란 자는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저버리고 저 혼자의 보신을 위해 왕좌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 그리고 남은 백성들은 어찌 되었는가? 그저 땅에 빌어 붙어서 연명하고 있는 수준 아닌가? 자네는 그들만으로 공국이 성립할 수 있다 보는가?”
“만약 백성이 없는 나라에 왕만 있다면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훌륭한 왕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제 발로 앙복(仰伏)하러 올 신민들이 수두룩할 걸세. 본래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지. 그들은 그들을 지켜줄 이를 찾는 법이지. 때로는 신을 찾기도 하고, 그래서 교국과 같은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고. 에토신스처럼 신의 축복을 받은 왕께서 지키는 나라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이기도 하지. 폐하의 통치 아래 에토신스는 늘 평화로웠고 부유했지. 만인들은 언제나 그분을 칭송하길 서슴지 않았고.”
단유는 사령관의 말에 섣부르게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그에게 에토신스라는 나라는, 그리고 그가 모시는 왕은 그의 자존심이었다. 평생에 걸쳐 쌓은 자존심을 몇 마디 말로 흠집내려 하다간 파토가 나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오히려 공국 내의 신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전한 셈이지. 그렇지 않은가?”
“일부분은 동의합니다.”
“일부분?”
“좋은 왕, 혹은 지배자가 있는 곳이라면 그 아래 사는 이들도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좋은 왕, 혹은 좋은 지배자는 어떤 이를 말하는 걸까요?”
사령관은 당연히 에토신스의 왕과 같은 이라고 대답하려다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에토신스의 왕은 좋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는 그의 나라를 잘 운영하였으며, 주변 국가들의 왕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매년 왕의 탄신일에 쏟아지는 축전들과 의전들을 보면 괜히 뿌듯함을 느낄 정도니까.
하지만 ‘신민’이라는 대상과의 관계적 측면에서 ‘좋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려면 조금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의 신하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왕이다. 그러나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우며, 가죽을 가공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신민들에게도 좋은 왕으로 비칠까? 사람이 상대를 좋다고 느낄 때, 사령관이 생각하기로는 무언가 혜택을 주는 면이 있어야 좋다고 느낄 것 같았다.
‘왕은 신민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 질문이 사령관의 입을 턱 막히게 했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
“왕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신민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존재이네.”
“공국의 대공 역시 존재합니다. 교국의 교황 역시 그렇고요. 그렇다면 그들은 좋은 지배자들입니까?”
존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들과 차별점이 생긴다. 무엇이 필요한가.
사령관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놀라운 언변이로고. 몇 마디 말로 사람을 이리 혼란스럽게 만들다니. 하마터면 자네의 화술에 말려들 뻔 했어.”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처음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저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좋은 지배자가 생기는 일이라면 저는 물론, 마을 사람들도 반길 거라고 했습니다.”
“······.”
“왕에 대해 언급하기가 힘드시다면, 사령관님은 어떻습니까?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일차적으로 점령지를 다스리고 통제해야 할 의무가 있으신 사령관님은 이곳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지배자일 것입니다. 사령관님은 좋은 지배자이십니까?”
바로 그 질문이 사령관의 입을 막은 또 다른 이유였다. 자신의 역할을 머릿속에 두고 있었기에 단유에게서 이어질 질문을 예상했고, 그래서 답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사령관께서 점령하려는 땅이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하기만 한 땅이라면 이렇게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나오셨겠습니까? 저의 짧은 식견으로도 에토신스 군의 병사들은 단순히 공국군을 상대하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공국군은 거의 괴멸 상태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렇다면 결국 점령지의 원활한 통제를 위한 병력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전리품이 될 상황이다. 과연 사령관은 전리품으로서 그들을 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신민으로서 그들을 대할 것인가?
“젊은 손님께서 쉽지 않은 질문을 가지고 왔군.”
단유가 대답했다.
“저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사령관님의 생각을, 혹은 에토신스의 진군을 막거나 바꿀 의도는 없습니다. 그저 마을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그렇게 될 걸세.”
“그렇게 믿습니다. 하지만 의심 많은 저의 성격상, 온전히 믿고 따르기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한 가지 고려해주십사 합니다.”
“···뭔가?”
“저는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지켜주겠다는 단순한 약속이지만, 저는 그 말을 어떤 경우에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말인가?”
사령관의 묵직한 되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 떨리는 약속이군. 약속의 당사자야 든든하겠지만 말이야.”
사령관은 깍지를 끼고 단유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단유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를 잠시 하지. 물론 자네가 멀쩡히 온 것을 보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자네 입으로 듣고 싶군. ···그들은 모두 죽었는가?”
모호한 대명사이지만 단유는 금방 알아들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저와 대면했던 이들은 그리 됐습니다.”
“그렇군. 그간의 공백이 그들을 약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네가 그만큼 강한 것일까?”
“그들은 사냥꾼입니까?”
“사냥개들이지.”
“사냥꾼은 누구입니까?”
“흑막에 가려져 있어 누구도 알지 못하지.”
“그럼 어떻게 그들과 연락을 한 것입니까?”
“그들이 먼저 연락을 취해왔지.”
“그들은 에토신스에 호의적입니까?”
“그들이 적대하는 대상은 오직 마법사들 뿐이네.”
“확실합니까?”
“지금까지는.”
사령관은 포도주가 든 잔을 붙잡았다가 잔이 비어 있음을 깨닫고 다시 술병을 붙잡았다. 그리고 단유의 앞에 놓인 잔을 슬쩍 바라보고 말했다.
“한잔 하겠나?”
“괜찮습니다.”
“술을 별로 즐기지는 않는 모양이로군. 그래서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사람은 말이야, 조금 유들유들한 면이 있는 게 좋아. 너무 경직되면 안 좋다고.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술이란 게 조금 도움이 될 테고 말이야.”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술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군요.”
“그런가.”
조르르, 술을 따르는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그런데 말이야.”
사령관은 화제를 바꾸려는 듯,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술병을 내려놓았다. 다시 술잔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더니 단유를 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마을에 있을 셈인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거 참, 그게 더 무섭군. 어쩌면 자네가 없을 때도 우린 그 마을에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
“······.”
“그런데 아까 자네 말로는 공국에는 속하지 않았다고 했었네.”
“네.”
“그럼 어디에도 속할 마음이 없는 것인가?”
“없습니다.”
“그 사냥개들은 세상 곳곳에 눈과 귀를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반면 자네는 그들에게 노출된 마법사이니 아마도 평생 그들과 싸워야 할지도 몰라. 불안하지 않은가? 차라리 말일세, 우리 에토신스로 오는 게 어떤가?”
“마법사는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으십니까?”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네. 하지만 자네처럼 대화가 되는 이라면 에토신스가 충분히 품어줄 수도 있다고 여겨지네만. 지금껏 어디에도 속한 적 없던 마법사들은 그저 들개 같은 이들이었어. 들개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그래서 사냥개들이 달려들었던 것이고. 하지만 집에서 보호받는 개들에게는 사냥개들이 달려들지 못할 걸세.”
“개 같은 신세네요.”
“개라도 왕의 손길이 닿은 개라면, 뭇 사람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하지. 듣기로 마법사들은 연구도 많이 해야 한다던데, 외부의 위협이나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자네에게 좋은 일 아닐까?”
“그들이 사람들을 어디론가로 데려가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응? 무슨 말인가?”
단유는 게리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국에서만 벌어지는 일 아닌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이의 말에 따르면, 교국에서도 이민을 제안하는 이가 있다더군요.”
사령관은 대전(大殿)에서 얼핏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소리소문없이 일가족이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사령관의 관심사도 아닐뿐더러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닌지라 그냥 넘어갔었던 적이 있었다. 속으로는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가 얼마나 무능력하면 영지민들을 잃는가 비웃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면? 사령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흠, 자네 말만 믿고 그들을 의심하기엔 자네에 대한 나의 신뢰가 그리 높지 않다네. 그들과 적대적인 자네이기에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인지도 모르지 않나?”
“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마법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응?”
“거짓과 위선은 마법사들에겐 독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사령관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게 선물이라고?”
“마법사가 가진 힘의 비밀을 알게 되셨잖아요.”
“글쎄, 그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 그 진위여부도 확실치 않고 말이야.”
“만약 저 외에 또 다른 마법사를 만날 기회가 닿는다면, 그것은 꽤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짓을 이야기하는 순간, 마법사는 그가 쌓은 힘을 잃게 될 테니까요.”
“마법사라···. 자네는 이 땅에서 마지막 마법사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 후 30년 만에 등장한 마법사이네. 자네 외에 또 다른 마법사가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렵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잔을 들었다.
대화를 그렇게 마무리 짓고 단유는 일어섰다. 사령관으로부터 딱 부러지는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내가 유일한 점령군 사령관도 아니고, 이미 다른 방향으로 진격 중인 사령관도 있네. 게다가 엄격히 말해서 자네가 머무는 마을에 대한 처분을 결정할 권리도 나에겐 없네. 오로지 대전에 거하시는 폐하의 결정에 따라야 하네.”
“그 점은 사령관께서 충분히 조율하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너무 큰 부담을 주는군.”
사령관은 여전히 앉은 채로 잔을 홀짝였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없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도 그렇네. 하지만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오늘보다 더 즐거운 대화를 나누도록 함세.”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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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에게는 지루한 기다림일 수 있는 일이지만, 사울른은 익숙하게 긴 시간을 버텼다. 가능성이 100%도 아닌 일이고, 어쩌면 영원히 그들이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울른은 그들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보답을 받았다.
‘왔구나.’
눈동자만 움직여 살피던 사울른은 좀 더 조심스럽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타난 예의 무명 조직의 흑의인들이 말뚝에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말없이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 후, 말뚝을 제거하고 사라졌다. 그 은밀한 움직임을 보며, 사울른은 그들의 뒤를 쫓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울른은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졌다.
‘해 보는 거지, 뭐.’
짐승의 자취를 쫓아 은밀히 미행을 해 보기는 했지만, 사람을 미행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어지간한 맹수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사람이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자신하며 사울른은 흑의인의 뒤를 밟았다.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아지트를 발견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그리고 이 미행이 단유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