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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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신스 군의 숙영지는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이미 여러 곳에 설치한 횃불들로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저녁이 되며 조금 세어진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들이 에토신스 군의 위용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설한 목재 울타리의 주변으로 병사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가운데, 안쪽에서는 저녁이라도 준비하는지 몇몇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위로 하나 둘씩 하얀 연기가 피워 오를 때, 단유가 숙영지에 접근했다.
숙영지 앞에서 날선 창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던 경계병들이 가장 먼저 단유를 발견했다. 지팡이마냥 창을 땅에 짚은 채로 서 있던 병사들이 창을 고쳐 들고 단유를 지켜보았다. 그 앞으로 단유가 느릿하게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가니, 경계병들이 소리쳤다.
“멈춰라.”
단유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병사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채 단유의 신분을 물었다.
“마법사요.”
단유의 대답은 그들을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눈치를 보다가 한 사람이 안으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들어가고 남은 한 사람이 자세를 더욱 낮추고 단유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단유는 태연한 표정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 후, 이전에 보았던 전단장과 비슷한 무장을 한 사내가 경계병과 일단의 병사들을 이끌고 숙영지 정문 쪽으로 나왔다. 단유를 위아래로 훑던 중무장병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지 혀로 입술을 한 번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 마법사인가?”
“증명해야 합니까?”
마법을 쓸까요, 라고 묻는 말에 중무장병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질리는 듯 싶었다.
그를 구한 건 안쪽에서 달려온 또 다른 무장병이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달려온 그는 앞에 선 이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중무장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유를 보며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단유의 곁으로 일단의 병사들이 열을 지어 감쌌다. 당연히 단유를 경계하기 위함이지만, 그들 너머에서 쏘아지는 수많은 눈빛들을 감당하려니 어쩐지 축사로 끌고가는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아직 단유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 병사들은 그저 저자가 누군가 싶어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래서 더 그런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주변의 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고 느껴지는 텐트 앞에 당도했다. 다른 텐트들에 비해 크기도 크지만, 텐트 위로 한 겹의 차양막을 더 설치해 새벽이슬과 찬 바람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구조의 텐트였다.
단유를 세워두고 먼저 텐트 안으로 들어섰던 중무장병이 다시 나와 단유에게 말했다.
“들어오라.”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텐트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 중무장병이 손을 뻗어 단유의 가슴 앞을 가로 막았다.
“무기가 있는가?”
단유는 망토를 한 번 들었다 놓는 동작으로 비무장임을 보였다. 중무장병이 눈짓으로 옆에 선 병사들에게 신호를 주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텐트 앞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다가와 단유의 몸을 살폈다.
고개를 저으며 물러나는 병사를 본 후, 중무장병은 막고 있던 입구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입구를 막고 있던 장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탁자를 두고 흰머리가 희끗한 사령관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유가 들어왔음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서한을 작성하는 데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단유는 그 앞에서 잠시 서서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잠시 후, 사령관이 펜을 내려놓고 두껍고 주름진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하며 그제야 단유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의가 바른 친구구만.”
단유는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가? 손님이 왔는데 대접이 소홀해서 말이야. 미안하네. 원래 어떤 일에 집중을 하면 다른 곳으로 신경을 잘 쓰지 못하는 편이라 말일세.”
사령관은 몸을 뒤로 기울이며 텐트 안에 따라 온 중무장병에게 지시했다.
“히다스, 거기 의자 하나 내주게.”
히다스라 불린 이는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사령관에 맞은 편에 두었고, 사령관의 앉으라는 손짓에 단유는 의자 위에 착석했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원래 말이 그리 없는가? 말이 없다면 여기까지 굳이 이렇게 올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야죠. 바쁘신 듯 보여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려가 깊군. 다시 한번 응대에 소홀했던 점 사과하지. 히다스, 술 좀 가져다주겠나? 목이라도 축이며 ‘대화’라는 걸 해보지.”
히다스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가고 사령관은 그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깊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젊어 보이는군. 내가 알던 마, 법사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이들었는데. 아마 지금의 내 나이 정도, 아니면 그보다 많은 이들이었지. 듣기로는 마법이란 걸 익히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던데, 그런 면에서 보면 자네는 꽤 탁월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인가보군.”
딱히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시간 많은 노인네가 골목에서 어린 학생을 붙잡아두고 수다를 떠는 모양새라, 단유도 가볍게 말을 받았다.
“칭찬이라면 감사합니다.”
“칭찬이네. 사실 내가 자네와 각을 세운다고 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내 자랑 같지만, 난 솔직한 사람이고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때 히다스가 다시 돌아왔다. 포도주와 치즈를 가지고 들어온 그가 술을 따르려 하자 사령관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네, 나가보게.”
히다스가 단유를 힐끔 쳐다보자, 사령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여기 있는다고 달라질 게 뭐 있는가?”
히다스는 조금 머뭇거리나 싶었지만, 결국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아마 저 장막 밖에서 대기하며 언제든 들어올 수 있게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음···.”
“루치드라 부르시면 됩니다.”
“루치드···. 좋은 이름이군. 술은 할 줄 아는가?”
“네.”
“속을 터놓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포도주가 좋지.”
사령관은 단유 앞에 잔을 놓아주었다. 철제 잔이었는데 고급스러운 문양이 양각되어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잔이었다. 그 안으로 붉고 진한 포도주가 출렁이며 채워졌고, 사령관은 잔을 들었다.
“뭔가 원만한 대화를 위한 말을 하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군. 혹시 자네는 생각나는 게 있는가?”
“기분 좋은 술은 건강에 좋지만, 과하면 해롭습니다.”
“···그게 건배사인가?”
“뭐든 과하면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건배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적당히 서로의 기분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다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흠, 젊은 친구가 그리 낭만적이진 않군.”
사령관은 웃음을 흘리며 잔을 들었다.
“자네의 낭만을 위하여 건배하지.”
그리고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마신 것도 술에 아무런 독이 없다는 걸 증명하려는 모습일까. 단유는 뒤따라 술을 들이켰다.
엄지로 입가를 훔치던 사령관은 자신이 작성하던 서한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게 뭔지 아는가?”
“모릅니다.”
“자네 덕분에 승진한 전단장에게 보내는 서한일세.”
“······.”
“자네가 이곳에 방문하기 바로 전에 그가 전령을 보냈었지. 나는 우수한 능력을 지닌 부하 하나를 잃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게 그의 잘못은 아니니 그를 탓할 수는 없고, 오히려 남은 병사들을 독려해 남은 일정에 해가 되면 안 되니 그를 임시 부대장으로 승진시켜야 했네. 다행인 건 그 역시도 우수한 능력을 지닌 이고, 그래서 그를 승진시키는 일에 부담이 적었다는 것이지.”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아는가? 우리 에토신스에는 훌륭한 인재가 넘친다는 말일세. 설령 누군가가 불의의 사고로 제 역할을 못 하게 된다 해도 그를 대신하여 목표를 달성할 인재들이 많다는 말이지.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사령관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단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유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 혼자 너무 떠든 것 같군. 그래 손님께서는 어떤 말을 전하러 온 것인가?”
“···떠보시는 것이라면,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의미인가?”
“‘전하러’ 온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령관의 얼굴이 살짝 굳는 듯 했다.
“공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네.”
“그래. 사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마법사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었지.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자기만의 길을 걸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이해해주게.”
사령관은 탁자 오른쪽에 올려져 있던 서한을 집어 펼쳤다.
“사람을 지키려 한다···고 우리 전단장에게 이야기 했더군.”
“네. 그게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일세. 마법사가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단유는 잠시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전 예전의 마법사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들이 어떤 일을 벌였던 건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나본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모든 마법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령관님이 아시는 마법사들도 다 그런가요? 하나같이 잔인무도하고, 안하무인의 성격을 가졌던 건가요?”
“대부분은 그렇다고 전해지지.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마법사란 이들은 거의 그렇네.”
“거기에 대해서는 저도 달리 항변할 말이 없습니다만, 적어도 전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네요.”
“그런가? 하지만 이미 자네 손에 죽은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아네만. 우리 부대장을 비롯해서 말이네.”
뒷말을 붙이긴 했지만, 언급된 ‘죽음’에 해당하는 이가 자신의 병사만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름 없는 조직에 대한 것이리라.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변명해야겠군요. 그건 사령관님이 하시려는 전쟁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말인가?”
사령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잔을 들었다. 안주 없이 술만 마시더니 결국 한 잔을 비워낸 사령관은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고, 단유를 쳐다보았다. 단유는 사양했다. 사령관은 다시 한 모금을 마신 후, 잠시 침묵을 지켰다. 힘 빠진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지.”
“네.”
“추측해보자면, 자네는 우리 군의 진로를 틀기 바라는 것인가?”
“그것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럼 다른 용건도 있는가?”
“전 제가 있던 그 마을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 마을을? 왜? 도대체 거길 왜 지키려 하는 건가? 아, 설마 아까 이야기했던 그 ‘사람’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믿기 힘들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포함하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이득이 무엇인가?”
“그 전에 묻고 싶습니다. 그 마을을 차지해서 사령관님이, 그리고 에토신스가 얻을 이익이 무엇입니까?”
“우습지 않은가? 어느 점령군이 그런 식으로 땅을 듬성듬성 차지한단 말인가? 마치 구멍 난 종이에 밀랍인장을 찍는 꼴 아닌가?”
“구멍 난 종이가 아닙니다. 만약 에토신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땅을 차지한다면, 그 마을 역시 에토신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럼 뭔가?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지배자에게 제대로 세금도 낼 것입니다. 세금 징수원을 내쫓지 않을 것이며, 에토신스의 법치에 잘 따를 것입니다. 다만 바라는 건, 그들의 터전을 빼앗지 말아달란 이야깁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달란 이야기였습니다.”
사령관은 팔짱을 끼고 콧바람을 냈다.
“흠. 듣기로는 좋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간섭하지 않는다면 더욱 좋겠지요.”
“자치(自治)인가?”
“네.”
“그런 사례가 없기도 하네만, 위험하네.”
“왜 그렇습니까?”
“그곳이 도적의 소굴이 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혹은 반역자들의 무리가 모이는 아지트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겁니다.”
“모르는 일일세. 통제를 벗어난 양민들의 방종은 언제나 나라의 골칫거리야.”
“그게 충분히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라면 그 마을 사람들은 물론 점령지의 모든 사람들이 에토신스의 말을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통제가 아니라 탄압이 되어버리면 반발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탄압?”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민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가능합니까? 국민은 국가의 통치권에 복종할 의무를 지니지만, 동시에 국가는 그 존재의 당위성인 국민을 지킬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점령지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령관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